[루키=이동환 기자] 한국 시간으로 지난 12월 19일, 미국 LA 스테이플스 센터에서는 전세계가 주목하는 행사가 열렸다. 바로 코비 브라이언트의 영구결번식이 진행된 것. 이날 레이커스는 코비가 달았던 등번호 8번과 24번을 모두 영구결번했고, 이로써 코비는 NBA 역사상 최초로 한 팀에서 등번호 2개가 모두 영구결번된 선수가 됐다. 이쯤에서 궁금해진다. 8번의 코비와 24번의 코비가 맞붙는다면? 당신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가?

*본 기사는 루키더바스켓 1월호에 실렸던 기사입니다.

 

8번의 코비: 야생마 같았던 득점 기계

코비 브라이언트는 그가 NBA에 데뷔한 1996년부터 2006년까지 8번을 달고 뛰었다. 정확히 10년이었다. 이 기간 동안 코비는 총 707경기를 출전해 16,866점 3,634리바운드 3,148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샤킬 오닐과 함께 레이커스의 3연패를 이끌었고(2000-2002), 역대 최연소 NBA 올스타전 주전 선수가 됐다. 생애 첫 득점왕 역시 8번을 달고 뛴 마지막 시즌(2005-06)에 차지했다. 

사실 처음 8번을 달고 코트에 나타났을 때, 코비는 서툴지만 사나운 야생마 같았다. 어딘가 다듬어지지 않았지만 자신감이 넘쳤고 저돌적이었다. 코비는 그의 롤 모델인 마이클 조던과 비견될 정도의 탄력을 가진 하이 플라이어는 아니었다. 하지만 누구보다 뛰어난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고, 이를 통해 자신만의 아름다운 공중 동작을 만들어냈다.

만 22살에 맞이한 2000-01 시즌은 코비의 기량이 완전히 물오르기 시작한 시기였다. 평균 28.5득점을 기록하며 이전 시즌보다 평균 득점이 무려 6점이 증가했다. 거의 모든 기록이 이전 시즌과 흡사한 가운데 더 많은 자유투를 얻어내고(자유투 시도 6.1개 → 8.2개) 미드레인지 점프슛이 더 안정되면서(10-16 피트 구역 야투 성공률 46.2%, 16피트-3점슛 라인 구역 야투 성공률 41.0%) 진정한 리그 최고 수준의 득점원으로 거듭난 시즌이었다.

8번의 코비는 지금의 카와이 레너드보다 더 무서운 공격력을 가진 ‘투-웨이 플레이어(Two-way Player)’이기도 했다. 공격에서 하루가 멀다하고 30득점 이상을 쏟아 부으면서도 수비에서는 상대 에이스들을 봉쇄해냈다. 코비는 2000년부터 2006년까지 6번 올-NBA 디펜시브 팀에 선정됐는데, 이 중 4번이 퍼스트 팀, 2번이 세컨드 팀이었다.

2005-06 시즌은 코비의 코트 위 에너지와 농구 선수로서의 기술이 가장 대단한 시너지 효과를 낸 시기였다. 이 시즌에 코비는 단일 경기 최다 득점 2위 기록인 81득점을 기록했으며(2006년 1월 23일 토론토전), 시즌 평균 35.4득점을 기록하며 NBA 역사상 단일 시즌 평균 득점이 35점을 넘어선 역대 5번째 선수로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또한 이 시즌에 코비는 무려 27번의 40득점 이상 경기를 기록했고, 총 2,832득점을 기록하기도 했다. 모두 LA 레이커스 구단 신기록이었다. 코비는 MVP 투표에서 4위로 2005-06 시즌을 마무리했는데, 정작 코비보다 MVP 1위표를 더 많이 받았던 선수는 2년 연속 MVP 수상에 성공한 스티브 내쉬뿐이었다.

 

24번의 코비: 코트 위의 모든 것을 마스터한 농구 도사

2006-07 시즌부터 코비는 24번으로 등번호를 바꿨다. 그리고 이후 10년 동안의 코비는 이전 10년에 비해 특유의 ‘야생미’가 많이 사라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기술적으로는 훨씬 더 노련해졌다. 로우 포스트, 하이 포스트의 포스트업 게임을 활용해 손쉬운 득점을 많이 올렸고, 영리한 파우 가솔과 꾸준히 손발을 맞추면서 게임을 조립하고 동료의 패스를 활용해 득점을 올리는 능력도 향상됐다.

24번의 코비는 이미 뛰어난 선수였음에도 끊임없이 새로운 득점 기술을 연구하는 열린 ‘장인’이었다. 그는 다른 선수의 기술을 배우는 데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덕 노비츠키의 ‘학다리 페이드어웨이슛’을 자신의 포스트업 플레이에 접목했으며, 이는 훗날 케빈 듀란트, 르브론 제임스, 카멜로 앤써니 등 후배 스윙맨들도 ‘학다리 페이드어웨이슛’을 던지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냈다. 올림픽 대표팀에 소집된 코비가 크리스 폴에게 볼 없는 움직임을 물어보고 배우려 했다는 것도 굉장히 유명한 일화다. 이를 통해 코비는 오프스크린을 통해서도 많은 득점을 올리는 기술자로 거듭났다.

이 같은 코비의 노력은 더 많은 팀 승리로도 이어졌다. 물론 당시 레이커스가 파우 가솔을 영입하고 앤드류 바이넘을 발굴하는 등 여러모로 좋은 움직임을 보여주기도 했다. 하지만 구심점이 되어준 슈퍼 에이스 코비가 없었다면 레이커스의 반등은 없었을 것이다.

코비 브라이언트, 파우 가솔, 앤드류 바이넘, 라마 오덤 등이 주축이 된 레이커스는 2000년대 후반 리그의 새로운 최강자로 떠올랐다. 2008년 파이널에서 보스턴에 우승을 내줬지만 2009년과 2010년에 우승을 차지하며 리그 2연패에 성공했다. 두 번의 우승을 차지하는 동안 파이널 MVP는 모두 코비의 차지였다. 1인자 코비가 마침내 온전한 자신의 성공 시대를 연 것이다.

또한 2007-08 시즌 코비는 생애 첫 정규시즌 MVP를 차지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그는 2012-13 시즌까지 꾸준히 평균 25득점 이상을 기록했다. 2000년대 NBA가 낳은 최고의 득점 기계였다. 이후 30대 중반이 되고 부상이 잦아지면서 코비는 급속도로 기량이 하락했다. 야투 기복은 심해졌고, 수비에서는 집중력과 에너지 레벨이 떨어지면서 구멍이 됐다.

하지만 수비수 입장에서 24번의 코비는 코트에서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 슈팅 감각이 돌아오는 날이면 여전히 상대를 끈질기게 물고 늘어졌고 기어코 팀을 승리로 이끌곤 했다. 결국 코비는 자신의 은퇴경기에서도 무려 60득점을 쏟아 부으며 레이커스의 극적인 역전승을 만들어내고 코트를 떠났다. 24번의 코비는 8번의 코비만큼 팔팔하고 날래지는 못했다. 하지만 코트에서의 끈질김과 승부욕은 젊은 시절과 별반 차이가 없었다. 코비는 그런 선수였다.

 

사진 제공 = 나이키, NBA 미디어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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