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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대 스타' 샤리프 압둘-라힘을 기억하시나요?

[루키=황호재 기자] 프로 선수들은 구단과 팬들의 큰 기대를 받으며 데뷔한다. 하지만 모든 선수들이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대에 못 미친 선수들이 훨씬 더 많다. 부상과 자기관리 실패, 뜻밖의 사고 등 여러 가지 변수들이 이들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기대에 비해 N%가 부족한 커리어를 보낸 선수들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 그 여덟 번째 주인공은 샤리프 압둘-라힘이다.

 

압둘-라힘은 1990년대 말 밴쿠버 그리즐리스의 간판 스타로 활약했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 샤리프 압둘-라힘 PROFILE

출생 : 1976년 12월 11일 (조지아州 매리에타)

신체조건 : 206cm, 102kg

출신대학 : 캘리포니아 대학

데뷔 : 1996년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3순위 (밴쿠버 그리즐리스)

소속팀 : 밴쿠버 -> 애틀랜타 -> 포틀랜드 -> 새크라멘토

수상실적 : 올스타(1회), 올-루키 퍼스트팀, 올림픽 금메달(1회)

통산기록 : 12시즌(총 830경기) 15,028득점 6,239리바운드 2,109어시스트 820스틸 638블록슛 / 경기당 평균 18.1득점 7.5리바운드 2.5어시스트 1.0스틸 0.8블록슛

 

♣ 특별한 이름을 지닌 유망주

NBA 선수들 중에는 다수의 이슬람교도들이 있다. 은퇴한 샤리프 압둘-라힘이 그 좋은 예이다. 과거 카림 압둘-자바, 마무드 압둘-라우프 등은 이슬람교로 개종한 후 이슬람식으로 개명했지만, 오늘날 케네스 퍼리드와 유서프 너키치 등은 본인의 이름을 그대로 사용하는 무슬림이다. 압둘-라힘은 이들과 달리 처음부터 이슬람식 이름을 가졌다. 이슬람교도인 부모님에게서 태어났기 때문이다. 압둘-라힘의 부모님은 아들에게 ‘가장 고귀하고 자비로운 자’라는 뜻의 샤리프 압둘-라힘(Shareef Abdur-Rahim)이라는 이슬람식 이름을 지어줬다. 조용하면서 진지한 성격이던 압둘-라힘은 농구인 가족 틈에서 자라며 농구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 고교생 시절 2년 연속 조지아주(州) 최고 선수로 선정된 그는 1994년 U-18 세계선수권대회에 미국대표로 출전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그리고 압둘-라힘은 캘리포니아 대학에 진학해 기세를 이어갔다. 신입생 시절 그는 경기당 평균 21.1득점 8.4리바운드 필드골 성공률 51.8%라는 훌륭한 기록을 남겼고, 컨퍼런스(PAC-12) 최고의 선수로 선정됐다. 심지어 학업 성적까지 우수했고, 겸손하고 바른 태도까지 갖춰 어디 하나 빠지는 데가 없었다. 1학년을 마친 압둘-라힘은 곧바로 NBA 드래프트에 뛰어들었다. 그것은 바로 스타의 산실이었던 1996년 드래프트였다. 압둘-라힘은 앨런 아이버슨과 마커스 캠비에 이어 3순위로 밴쿠버 그리즐리스에 지명됐다. 1995-96시즌 NBA에 첫 참여한 밴쿠버는 말 그대로 젊다 못해 어린 팀이었다. 밴쿠버는 이 전년도 드래프트에서 ‘빅 컨트리(Big Country)’라는 별명으로 유명한 센터 브라이언트 리브스를 지명했다. 이들은 그와 함께 팀을 이끌어갈 기둥으로 압둘-라힘을 택했다.

압둘-라힘에게 약체팀에서의 출발은 쉽지 않았다. 시즌 개막 후 11연패를 겪은 그는 열두 번째 경기 만에 샌안토니오 스퍼스를 꺾고 첫 승리를 거뒀다. (당시 샌안토니오는 데이비드 로빈슨이 부상으로 단 6경기만을 출전하며, 20승 62패로 최악의 시즌을 보낸 약체였다.) 차차 NBA에 적응하기 시작한 압둘-라힘은 경기당 평균 18.7득점, 6.2리바운드, 1.0블록슛의 기록으로 시즌을 마쳤다. 그는 아이버슨, 캠비, 앤트완 워커, 스테판 마버리와 함께 올-루키 퍼스트팀에 이름을 올렸다. 밴쿠버의 리더는 확실히 리브스가 아닌 압둘-라힘이었다. 데뷔 시즌 그는 ‘암울한 팀(시즌 성적 14승 68패)에서 분전하는 옥석’이라는 인상을 남겼다. 이윽고 치러진 1997-98시즌에 밴쿠버는 브라이언 힐을 감독으로 영입하며 도약을 기대했다. 하지만 이들에게는 운이 따르지 않았다. 이 당시 드래프트에서 1순위 지명권을 거머쥐었다면 팀 던컨을 지명했을 텐데 이들에게 떨어진 순번은 4순위였다(당시 밴쿠버는 4순위로 안토니오 다니엘스를 지명). 압둘-라힘은 이 시즌에 전 경기를 출전하며 경기당 평균 22.3득점(리그 6위), 7.1리바운드, 2.6어시스트, 0.9블록슛이라는 준수한 기록을 남겼다. 하지만 수준 이하인 동료들의 지원사격 부족으로 그의 분전은 물거품이 됐다. 밴쿠버는 19승 63패로 시즌을 마감했고, 팬들은 조금씩 실망하기 시작했다.

 

♣ 잘못된 만남으로 끝난 밴쿠버

하지만 1998-99시즌 한줄기 빛이 보였다. 밴쿠버가 1998 드래프트 2순위로 마이크 비비를 영입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 밴쿠버의 가드들은 전성기가 한참 지났거나, 다른 팀에서는 출전시간 확보도 힘든 선수들이 많았다. 압둘-라힘 입장에서는 이제야 제대로 된 가드와 뛰게 된 셈이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운명의 장난인지 그 전까지 별다른 문제없던 리브스가 부상을 입는 바람에 시즌을 절반만 소화, 인저리-프론의 조짐을 보였다. 이것은 불운의 전주곡이었다. (결국 그는 이후 두 시즌을 더 소화하고 데뷔 6시즌 만에 은퇴했다.) 이런 악재 속에 밴쿠버는 파업으로 짧아진 시즌을 8승 42패로 마감했다. 팬들 입장에서는 “역시 밴쿠버는 어쩔 수 없구나”라는 말이 나왔다. 이 당시 밴쿠버는 선수들에게 매우 인기가 없는 팀이었다. 성적도 성적이지만 일단 캐나다 연고지라는 이유로 많은 미국 선수들이 싫어했다. 그나마 토론토는 상대적으로 미국 동부의 대도시들과 가까운데, 밴쿠버는 북서쪽 끝자락에 있기에 지리적인 면에서도 불리했다.

하지만 압둘-라힘은 불평불만을 늘어놓지 않았다. 오히려 밴쿠버를 사랑한다고 했다. 당시 밴쿠버는 동계올림픽 유치를 준비했는데 압둘-라힘은 이것을 홍보하는데도 적극적이었다. (결국 그들은 2010년 동계올림픽 유치에 성공했다.) 코트 밖에서도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고, 비시즌에 흥청망청 지내는 일부 선수들과 달리 조용히 혼자 메카에 성지순례를 다녀왔다. 연고지 팬들은 압둘-라힘에게만큼은 아낌없는 성원을 보냈다.

최악의 시즌을 마친 뒤 1999년 드래프트에서 밴쿠버는 상당히 복잡한 일을 겪게 된다. 2순위로 밴쿠버가 지명한 스티브 프랜시스가 노골적으로 트레이드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자신의 할머니가 계신 곳에서 가까운 휴스턴 로케츠에서 뛰고 싶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실질적인 이유는 누가 봐도 밴쿠버가 싫어서였다. 밴쿠버는 어쩔 수 없이 휴스턴, 올랜도 매직과 삼각트레이드를 단행해 프랜시스를 내보냈고, 빅맨 오델라 해링턴과 슈팅가드 마이클 디커슨을 영입했다. 디커슨은 밴쿠버에서 좋은 활약(경기당 평균 18.2득점 3점슛 성공률 40.9%)을 펼치며 비비와 전도유망한 백코트를 구성했다. 압둘-라힘은 시즌 전 경기에 출전하며 경기당 평균 20.3득점 10.1리바운드로 생에 첫 ‘시즌 평균 20-10’을 기록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밴쿠버는 22승 60패로 여전히 최하위권에 머물렀다. 성인군자 같았던 압둘-라힘도 조금씩 변하기 시작했다.

성적도 부진하고 인기도 없는 밴쿠버에 더 이상 NBA 구단이 남아있기란 힘들었다. 시드니 로우가 감독을 맡은 2000-01시즌도 23승 59패로 부진했던 밴쿠버는 결국 시즌 종료 후 연고지 이전과 함께 로스터를 정리했다. 이들은 압둘-라힘과 자말 틴슬리를 애틀랜타 호크스로 보내고, 파우 가솔, 로렌젠 라이트, 브레빈 나이트를 영입했다. 또 마이크 비비와 브렌트 프라이스를 새크라멘토 킹스로 보내고 제이슨 윌리엄스와 닉 앤더슨을 데려왔다. 밴쿠버 시대는 이렇게 마감됐다. 2001-02시즌부터는 멤피스 그리즐리스로 새 출발했다.

 

압둘-라힘(15번)은 2000 시드니 올림픽에 미국 국가대표로 참여해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 게티이미지코리아

 

♣ 머나먼 플레이오프 진출

비극으로 끝난 밴쿠버를 뒤로 한 압둘-라힘은 애틀랜타에서 심기일전했다. 그는 2001년 11월 23일 디트로이트 피스톤스를 상대로 무려 50득점을 올렸고, 올스타에도 선정됐다. 밴쿠버에서는 실력에 비해 주목을 못 받기도 했거니와, 당시 서부 컨퍼런스에는 팀 던컨, 칼 말론, 케빈 가넷, 크리스 웨버, 덕 노비츠키 등이 버티고 있어 올스타에 뽑히기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동부 컨퍼런스로 넘어오니 압둘-라힘은 빛을 발했다. 애틀랜타가 33승 49패에 그치며 첫 플레이오프 진출의 꿈은 미뤄야 했지만, 밴쿠버에 비하면 모든 것이 좋아보였다. 애틀랜타는 2002-03시즌 압둘-라힘, 글렌 로빈슨, 제이슨 테리 트리오를 앞세워 플레이오프 진출을 노렸다. 하지만 35승 47패를 기록하며 또 다시 실패했다.

압둘-라힘은 이때 여전히 좋은 활약(경기당 평균 19.9득점 8.4리바운드)을 펼쳤지만 애틀랜타 프론트는 생각보다 빨리 결정을 내렸다. 결국 그 다음 시즌이 한창이던 2004년 2월 압둘-라힘은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로 트레이드 됐다. 여기서 그는 잭 랜돌프의 백업 역할을 하며 2003-04시즌을 마감했다. 2004-05시즌 압둘-라힘은 다시 주전으로 올라섰지만 부상으로 결장하는 경기가 많았고, 이 당시 포틀랜드 구단의 분위기도 그다지 좋지 않았다. 오랫동안 플레이오프 단골손님이었던 포틀랜드였지만, 하필 이 시기에 주춤했다. 압둘-라힘은 또 다시 플레이오프와 인연을 맺지 못했다. 2005년 여름 압둘-라힘은 새크라멘토 킹스와 FA 계약을 맺었다. 그곳에서 프로 데뷔 초창기를 함께 했던 비비와 다시 만나게 됐다. 하지만 이때 한창 기량에 물이 오른 비비와 달리 압둘-라힘은 완연한 내리막을 걷고 있었다. 주전보다 후보로 출전하는 날이 더 많았고, 기록 면에서도 이전에 비해 눈에 띄게 하락한 경기당 평균 12.3득점 5.0리바운드 0.6블록슛에 그쳤다.

그러나 좋은 일이 생겼다. 새크라멘토가 이때 44승 38패로 서부 컨퍼런스 8위를 차지한 것. 압둘-라힘은 마침내 플레이오프 무대에 서게 됐다. 데뷔 후 10시즌 동안 정규시즌 총 744경기를 출전한 끝에 이룬 쾌거(?)였다. (그는 아직까지 가장 많은 정규시즌 경기를 치른 끝에 플레이오프 무대를 처음 밟은 선수로 남아있다.) 이때 샌안토니오를 상대로 1라운드에서 치른 6경기가 압둘-라힘의 처음이자 마지막 플레이오프 경험이었다. 이후 2006-07시즌에는 백업 멤버로 뛰며 비비, 케빈 마틴, 메타 월드 피스 등을 보좌했지만 새크라멘토는 33승 49패에 그쳤다. 그리고 2007-08시즌 압둘-라힘은 단 6경기만을 출전한 뒤 고질적인 무릎부상으로 아쉽게 은퇴했다.

 

♣ 무엇이 아쉬웠나?

밴쿠버 시절만 놓고 본다면 압둘-라힘 만큼이나 동료복(福)이 없는 선수도 찾기 힘들다. 당초 큰 기대를 모았던 브라이언트 리브스가 그렇게 빨리 은퇴할 것이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리브스는 대학시절 전국구 스타였고, 부상으로 무너지기 이전 3시즌 동안은 리그 평균 이상의 활약을 해낸 센터였다. 그가 오랫동안 곹밑에서 압둘-라힘의 보디가드 역할을 잘 해냈더라면, 혹은 건강에 이상이 없어서 좋은 트레이드 카드 역할이라도 해냈더라면 밴쿠버의 역사, 그리고 압둘-라힘의 커리어는 꼬이지 않았을 것이다. 프랜시스 역시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신인왕을 차지할 정도로 기량이 출중했다. 그렇기 때문에 밴쿠버 팬들의 상심과 분노는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밴쿠버 선수들은 내심 ‘프랜시스가 우리 팀에 뛰었더라면...’이란 생각을 했을 것이다.

애초에 선수 수급 자체가 어려운 것이 신생팀의 숙명이지만 너무 한물간 선수들 위주로 로스터를 채웠던 밴쿠버의 판단도 이 팀의 창단 초창기를 힘들게 했다. 그렇다고 보란 듯이 드래프트 1순위 지명권을 얻었던 적도 없었다. 만일 이들이 첫 단추를 잘못 꿰지 않았더라면 토론토 랩터스처럼 연고지 이전 없이 밴쿠버에 남았을 수도 있었다. 또 지극한 부진에도 잘 참아내던 압둘-라힘 역시 이 팀에 더 오래 남아있을지도 모른다. 그랬다면 그리즐리스의 첫 영구결번은 압둘-라힘의 등번호 3번이 아니었을까?

애틀랜타 역시 압둘-라힘 입장에서 아쉽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애틀랜타에서 두 시즌 반 동안 경기당 평균 20.4득점 8.9리바운드 1.0블록슛으로 수준급의 활약을 펼쳤다. 그의 조력자로 다른 조합을 더 생각해볼 법도 했는데, 너무 쉽고 빠르게 포기한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런 복잡한 와중에도 2000 시드니 올림픽 미국대표팀에 선발돼 금메달을 목에 건 점, 그리고 올스타에도 선정된 것을 보면 압둘-라힘은 좋은 선수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너무 뒤늦게, 단 한 번뿐이었지만 어쨌든 플레이오프에 나선 점은 그나마 참 다행이었다.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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