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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스타] 1990년대 악동 스타 닉 밴 엑셀

[루키=황호재 기자] 프로 선수들은 구단과 팬들의 큰 기대를 받으며 데뷔한다. 하지만 모든 선수들이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대에 못 미친 선수들이 훨씬 더 많다. 부상과 자기관리 실패, 뜻밖의 사고 등 여러 가지 변수들이 이들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기대에 비해 N%가 부족한 커리어를 보낸 선수들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 그 여섯 번째 주인공은 닉 밴 엑셀이다.

 

♣ 닉 밴 엑셀ㆍNick Van Exel

출생 : 1971년 11월 27일 (미국 위스콘신州 커노샤)

신체조건 : 185cm, 77kg

출신대학 : 신시내티 대학

데뷔 : 1993년 신인드래프트 2라운드 37순위 (LA 레이커스)

소속팀 : LA 레이커스 -> 덴버 -> 댈러스 -> 골든스테이트 -> 포틀랜드 -> 샌안토니오

수상실적 : 올스타(1회), 올 루키 세컨드팀

통산기록 : 13시즌(총 880경기) 12,658득점 2,545리바운드 5,777어시스트 726스틸 통산 3점슛 1,528개 / 경기당 평균 14.4득점 2.9리바운드 6.6어시스트 0.8스틸 통산 3점슛 성공률 35.7%

 

♣ 빠르고 화려한 재주꾼

빠른 스피드는 포인트가드에게 무엇보다 큰 무기다. 한때 스피드를 논할 때 꼭 거론됐던 닉 밴 엑셀은 미국 위스콘신州 커노사에서 태어났다. 고교시절 그는 모교를 주(州)대회 결승으로 끌어올리며 동시에 득점왕까지 차지했던 유망주였다. 문제는 학업성적이었다. 농구 기량은 뛰어났지만 학업이 부진해 NCAA의 명문대학에 입학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그는 2년제 대학인 트리니티밸리 커뮤니티 칼리지에 입학했다. (앞서 1989년 숀 켐프도 이 학교에 적을 둔 적이 있으나 그는 한 경기도 뛰지 않은 채 NBA로 향했다.) 이 학교에서 2년을 보낸 밴 엑셀은 신시내티대학에 편입했다. 3, 4학년 동안 그는 먼 길을 돌아 NCAA에 입성한 설움을 풀기라도 하듯 유감없이 기량을 발휘했다. 4학년 때 신시내티대학을 NCAA 토너먼트 8강으로 이끈 밴 엑셀은 올-아메리칸 서드팀에 선정되며 대학생활을 마무리했다.

그는 1993년 NBA 드래프트에 참가하며 프로 무대를 노크했다. 하지만 여기서 밴 엑셀은 큰 실수를 범했다. 각종 인터뷰를 비롯해 구단들에게 자신을 알리는 자리에서 불손하고 거만한 태도로 임했던 것. 이는 밴 엑셀의 지명을 고려했던 구단들이 마음을 돌리게 만들었다. (변덕이 심하고 때로는 반항적인 그의 성격은 이때부터 그의 커리어에 큰 약점으로 작용했다.) 결국 그는 2라운드 37위라는 예상보다 훨씬 낮은 순위로 LA 레이커스에 지명됐다. 하지만 이것은 오히려 좋은 결과를 가져왔다. 지명 순위는 낮았지만 인기 있는 명문 구단이었기 때문. 레이커스 또한 1라운드에 지명이 예상되던 선수를 2라운드에 뽑으며 서로 웃을 수 있었다.

1993-94시즌이 시작되자 밴 엑셀은 진가를 발휘했다. 당시 레이커스가 드래프트 1라운드 12순위로 지명했던 조지 린치와 순위가 바뀌어도 이상할 것이 없어 보일 정도였다. 이때 레이커스는 영광의 시대를 뒤로하며 새롭게 출발하는 단계였다. 카림 압둘-자바, 매직 존슨 등과 함께 황금기를 지낸 제임스 워디는 이 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팀에 뚜렷한 구심점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밴 엑셀 입장에서는 부담 없이 NBA에 적응하며 많은 것을 배우기 좋은 시기였다. 그는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꿰차며 경기당 평균 13.6득점 5.8어시스트 1.0스틸을 기록했고, 올-루키 세컨드 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 화려했던 LA 레이커스 시절

밴 엑셀은 빠르게 팬들을 매료시켰다. 남다른 스피드와 승부처에서 주눅 들지 않는 배짱을 앞세워 레이커스의 돌격대장으로 자리 잡았다. 그는 예상하기 힘든 노-룩 패스와 버저비터 등 화려한 플레이를 즐기며 레이커스를 다시 일으켰다. 팬들은 그를 ‘닉 더 퀵(Nick the Quick)’, ‘퀵 베스트 엑셀(Quick Best Exel)’등의 별명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밴 엑셀은 1994-95시즌 경기당 평균 16.9점 8.3어시스트 1.2스틸을 기록하며 팬들에게 큰 기대를 심어줬다. 밴 엑셀의 지휘 아래, 블라디 디박, 세드릭 세발로스, 엘든 켐벨, 신인 에디 존스 등이 조화를 이룬 레이커스는 1994-95시즌 플레이오프 2라운드 진출에 성공, 명가재건을 알렸다. 1995-96시즌에는 한 가지 좋은 소식도 있었다. 1996년 1월, 매직 존슨이 현역으로 복귀한 것이었다. 밴 엑셀은 존슨과 리딩을 분담하며 레이커스를 한층 더 강한 팀으로 끌어올렸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문제는 여기서 벌어졌다. 1995-96시즌 막바지였던 4월 9일, 덴버 너게츠와의 경기 도중 판정에 불만을 품은 밴 엑셀이 심판을 강하게 밀쳐버렸다. 이로 인해 그에게 7경기 출장정지가 선언됐고, 18만 7천 달러의 거액을 벌금으로 내야 했다. 밴 엑셀의 이미지는 유망주에서 하루아침에 ‘트러블 메이커’로 격하됐다.

씁쓸한 기억을 뒤로 한 채 맞은 1996-97시즌, 레이커스는 더욱 강해져서 돌아왔다. 블라디 디박을 샬럿 호네츠가 지명한 신인 코비 브라이언트와 트레이드했고, FA 시장에서 샤킬 오닐을 영입하며 단숨에 우승후보로 급부상했다. 하지만 첫술에 배가 부를 수는 없었다. 이들은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를 꺾었지만, 2라운드에서 유타 재즈에 1승 4패로 무릎을 꿇었다.

다시 전열을 가다듬고 맞이한 1997-98시즌 레이커스의 기세는 매서웠다. 이들은 정규시즌 61승 21패를 기록하며 서부 컨퍼런스 3위를 차지했다. 1위 유타(62승 20패)와의 승차는 고작 한 경기였고, 2위 시애틀 슈퍼소닉스(오클라호마시티 썬더의 전신)와는 동률이었지만 승자승 원칙(1승 3패)에 따라 아쉽게 3위를 기록했다.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포틀랜드를 3승 1패로 꺾은 뒤, 2라운드에서 시애틀을 4승 1패로 물리치며 승승장구했다. 그러나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유타에게 스윕 당하며 또 다시 우승에 실패했다. 이 당시 화려한 멤버들 사이에서 밴 엑셀의 역할(경기당 평균 13.8득점 6.9어시스트)은 줄어들었지만 그는 이때 생애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올스타에 선정됐다. (1998년 올스타전 당시 레이커스는 샤킬 오닐, 코비 브라이언트, 닉 밴 엑셀, 에디 존스까지 무려 4명의 올스타를 배출했다.)

 

♣ 잘못된 만남이었던 덴버 너게츠, 그리고 저니맨의 길

좋았던 시절은 딱 거기까지였다. 1998년 여름 레이커스는 밴 엑셀을 덴버 너게츠로 보내고 토니 배티와 타이론 루(現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 감독)를 영입했다. 조용한 성격이 아니었던 밴 엑셀이 이를 두고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화려한 대도시를 연고로 둔 인기 팀에서 조용한 동네에 위치한 약팀으로 옮기게 된 그는 불만이 가득했다. 이 당시 덴버는 이전 시즌 11승 71패라는 참담한 성적을 거두고 난 직후라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내세울만한 선수로는 안토니오 맥다이스와 천시 빌럽스 등이 있었지만 이들은 아직 어렸다. 감독이었던 마이크 댄토니 역시 NBA 감독으로는 초보였던지라 밴 엑셀을 컨트롤할 마땅한 사람이 없었다. 밴 엑셀은 마지못해 뛰는 듯한 인상을 풍기며 점점 팬들의 눈에서 멀어져갔다. 결국 덴버는 파업으로 짧아진 1998-99시즌을 14승 36패로 마쳤다.

1999-00시즌에는 그마나 상황이 좋아졌다. 덴버는 론 머서, 밴 엑셀, 맥다이스 트리오의 분전과 리프 라프렌츠, 조지 맥클라우드의 지원사격에 힘입어 제법 내외곽의 밸런스를 갖출 수 있었다. 하지만 서부 컨퍼런스의 벽은 너무 높았고, 이들은 서부 컨퍼런스 10위(35승 47패)에 만족해야 했다. 밴 엑셀은 경기당 평균 16.1점 9.0어시스트(리그 2위)를 기록하며 준수한 성적을 냈다. 2000-01시즌 밴 엑셀과 맥다이스 콤비는 어느덧 수준급으로 성장했고, 덴버는 40승 42패로 한층 더 좋아진 성적을 거뒀다. 하지만 서부는 역시나 너무 거친 무대였다. 이들은 5할에 가까운 성적을 거두고도 컨퍼런스 11위에 그쳤다. 당시 턱걸이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던 미네소타 팀버울브스(8위)의 성적이 무려 47승 35패일 정도였으니 말 다했다. 레이커스에서 플레이오프의 맛을 봤던 밴 엑셀에게 이 도시에서의 생활은 너무도 지긋지긋했다. 더군다나 자신이 떠난 후 레이커스가 우승하는 모습을 지켜봤기에, 강팀으로 이적하고 싶은 생각이 더욱 간절해졌다.

결국 밴 엑셀은 2001-02시즌 중반 댈러스 매버릭스로 트레이드 됐다. 댈러스에는 이미 스티브 내쉬가 선발 포인트가드 자리를 꿰차고 있었기 때문에, 밴 엑셀은 벤치로 자리를 옮길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덴버를 탈출해 우승을 노릴 수 있는 팀으로 이적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기뻐했다. 댈러스에서 밴 엑셀은 키 식스맨으로 활약, 댈러스를 주전과 벤치의 격차가 작은 강팀으로 만드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우승과는 인연이 없었다. 2001-02시즌에는 플레이오프 2라운드, 2002-03시즌에는 서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무너졌다.

2003년 여름, 밴 엑셀은 무려 9명의 선수가 연루된 초대형 트레이드를 통해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이적했다. 또 다시 우승과 멀어진 밴 엑셀이 기뻐할 리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각종 부상이 겹치는 등 정규시즌 단 39경기 출전에 그쳤다. 시즌 종료 후 포틀랜드로 트레이드 된 밴 엑셀은 2004-05시즌을 조용히 보냈다. (이때 그는 하승진과 한솥밥을 먹었다. 하승진이 우리에게 익숙한 ‘폭풍 2어시스트’를 기록했던 때가 바로 이 시즌이었다). 2005-06시즌 밴 엑셀은 우승을 위한 마지막 도전으로 샌안토니오 스퍼스 行을 택했다. 그는 벤치 멤버로 활약하며 평균 5.5점에 그쳤다. 한 자릿수 평균 득점을 기록한 것은 데뷔 이래 처음이었다. 말 그대로 ‘우승’만을 바라보며 모든 것을 포기한 채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샌안토니오는 플레이오프 2라운드에서 밴 엑셀의 친정팀 댈러스에게 3승 4패로 무너졌다. 그리고 밴 엑셀은 여기서 아쉽게 커리어를 마감했다.

 

♣ 무엇이 아쉬웠나?

신인 시절의 밴 엑셀은 여러 면에서 운이 좋았다. 좋은 팀에서 훌륭한 동료들과 함께 하며 많은 것을 배웠다. 승리도 자연스레 따라왔다. 또한 리복과 계약을 맺는 등 상품성도 인정받았다. 문제는 역시 마인드 컨트롤이었다. 그의 불같은 성격과 고집은 두고두고 아쉬운 부분이다. 변화된 환경을 받아들이고 묵묵히 자기 역할을 수행했어야 했지만 그러지 못했다. 당시 플레이오프와 거리가 멀었던 덴버, 골든스테이트, 포틀랜드 등에서 밴 엑셀은 언제나 불만을 내비쳤다. 당시 서부 컨퍼런스에는 막강한 팀들이 너무 많았다. 밴 엑셀 혼자 이를 극복하기는 역부족이었다. 데뷔 초에 너무 많은 달콤함을 맛봤기에, 이런 시련들이 그에게는 더욱 큰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하지만 그의 태도가 좀 더 유순하고 반듯했더라면, 강팀들이 그를 가만히 두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며, 밴 엑셀은 차차 성질을 누그러뜨렸다. 덴버와 샌안토니오에서는 팀에 융화되기도 했으나 우승과 연이 없던 것이 안타까웠다. 샌안토니오는 밴 엑셀이 뛰었던 2005-06시즌만 건너뛰고 2004-05시즌과 2006-07시즌에 징검다리 우승을 차지했다. 이 세 시즌 동안 멤버 구성은 크게 다르지 않았고, 정규시즌은 성적은 오히려 2005-06시즌(63승 19패)이 가장 좋았던 점을 감안하면 정말 일이 안 풀린 케이스였다. ‘레이커스에 더 오래 남아 있었더라면’, ‘샌안토니오에 한 시즌 더 빨리 합류하거나 이 팀에서 한 시즌 더 뛰고 은퇴를 했더라면’ 등의 아쉬움이 남는다.

은퇴 후 그는 대학팀, D-리그 등을 거쳐 현재 멤피스 그리즐리스의 어시스턴트 코치로 활약하고 있다. D-리그의 텍사스 레전즈에서는 감독직을 맡기도 했다. 그는 지도자로서 차근차근 커리어를 쌓아가는 중이다. 현역시절 워낙 다사다난했고 아쉬움도 많았기에 후배들에게 전해줄 이야기가 많을 것이다. 지금도 이따금 중계 카메라에 잡히는 밴 엑셀을 보며 예전의 ‘닉 더 퀵’을 그리워하는 팬들이 많다. 그만큼 그의 재능이 대단했기 때문이었다.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코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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