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이 죽음의 조에서 탈출했다. 최대 난적으로 꼽혔던 레바논을 가볍게 제압했다. 그 중심에는 유기상이 있었다.
대한민국 농구 대표팀은 11일(이하 한국시간) 사우디아라비아 제다에서 열린 2025 FIBA 아시아컵 A조 조별예선 레바논과의 경기에서 97-86으로 승리했다.
경기 한때 20점 넘는 리드를 잡았을 정도로 압도적인 승리였다. 그 중심에는 3점슛 8개 포함 28점을 폭격한 유기상이 있었다.
카타르전에서 이미 3점슛 7개 포함 24점을 쏟아부었던 유기상이다.
절정의 슛감은 레바논전에서도 이어졌다. 3점슛 12개를 던져 8개를 성공했다.
이번 대회에서 유기상은 경기당 5.3개의 3점슛을 성공하고 있고, 이는 대회 전체 1위 기록이다. 3점슛 성공률은 59.3%에 달한다.
2025 FIBA 아시아컵 경기당 3점슛 성공 순위(괄호 안은 성공률)
1. 유기상(대한민국): 5.3개(59.3%)
2. 마틴 아가잔푸르(이란): 4.3개(52%)
3. 토미나가 케이세이(일본): 3.7개(47.8%)
특히 11일 레바논전에서 유기상은 레바논의 스위치 수비를 3점으로 공략하는 위력적인 모습을 보였다.
특유의 오프 볼 무브를 활용한 부지런한 움직임으로 레바논 수비를 농락한 유기상이었다. 핀다운 스크린, 엑시트(exit) 스크린을 활용한 3점까지 슈터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3점을 모두 보여줬다.
'작전판'에서 유기상의 인상적인 레바논전 3점슛 장면 3가지만 살펴보자.

1. 픽앤롤 사이드에서의 리프트 액션
유기상이 이번 대표팀에서 가장 자주 보여주는 3점슛 생산 패턴 중 하나는 픽앤롤 사이드에서의 리프트 액션(코너에서 윙으로 올라가는 것)을 통한 3점슛이다.
유기상은 국내에서 열린 4차례 평가전은 물론 최근 카타르전에서도 이 방식으로 3점슛을 만들었고, 레바논전 첫 3점을 같은 방법으로 만들었다.

경기 장면을 통해 확인해보자. 이현중이 김종규와 왼쪽 윙에서 사이드 픽앤롤을 시도하고 있다.(파란색 원)
이때 유기상은 픽앤롤이 일어나는 왼쪽 사이드의 코너에 위치한다.


이 공격의 핵심은 코너에 있던 유기상이 윙으로 올라오는 리프트 액션을 수행하는 타이밍이다.
김종규가 스크린을 세팅하는 타이밍부터 조금씩 윙으로 올라오던 유기상은 김종규가 림으로 돌진하기 시작하자 더욱 가속도를 붙여 윙으로 달려나간다.
이날 레바논은 한국의 2대2에 대해 자동 스위치에 가까운 노골적인 스위치 수비를 사용했고, 위 장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때문에 코너의 유기상을 막던 레바논의 코너 수비수(빨간색 원)은 림으로 대쉬하는 김종규에 대한 태깅 혹은 스크램 스위치(두 번째 스위치로 마크맨을 바꾸는 미스매치 보완 수비법)에 대한 책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기상을 막던 코너 수비수는 림으로 달려가는 김종규에게 아주 잠깐이라도 시선 혹은 발을 빼앗길 수밖에 없는 상황이 벌어질 수밖에 없다.
유기상의 리프트 액션은 이를 공략하는 움직임이다.
즉 의도적으로 유기상을 픽앤롤이 벌어지는 사이드의 코너에 위치시키고, 스크리너(김종규)의 대쉬로 유기상을 막던 코너 수비수의 눈과 발을 끌어당기고, 그 틈을 타 유기상의 3점슛 찬스를 보는 것이다.
유기상의 위치가 이유 없이 픽앤롤 사이드 코너였던 것이 아닌 셈이다.


유기상을 마크하는 코너 수비수가 김종규에게 아주 잠깐 시선이 쏠렸고, 유기상이 이를 틈타 깊은 3점 구역까지 리프트한다.
이를 놓치지 않고 이현중이 빠르게 패스, 유기상이 이현중 쪽으로 몸을 연 오픈 스탠스로 볼을 캐치하고, 유기상의 수비수는 황급히 클로즈아웃 수비를 뛰어나온다.



상대의 공격적이고 긴 클로즈아웃에 대한 유기상의 대응이 영리하다. 특유의 펌프페이크로 수비수를 날려버리고, 왼쪽 방향 사이드 스텝백으로 여유 있게 3점을 터트린다.
유기상의 뛰어난 오프 볼 무브(리프트 액션), 이후의 스텝과 클로즈아웃을 활용한 사이드 스텝백 동작이 모두 돋보인 3점슛이었다. 일반적인 스팟업 슈터라면 절대 보여줄 수 없는 장면이다.

2. 더블 핸드오프
위에서도 이야기했듯, 이날 레바논은 노골적은 스위치 수비를 사용했다. 한국의 2대2는 물론 오프 볼 무브에서도 스위치 수비가 적극적으로 이뤄졌다.
때문에 이날 한국의 공격 최대 미션은 레바논의 스위치 수비를 어떻게 공략하느냐였다.
첫번째로 소개한 장면에서는 유기상이 리프트 액션을 통해 3점을 터트렸다면, 이번 장면에서는 스위치 수비를 공략하는 한국의 공격 패턴 속에서 유기상의 움직임이 빛을 발한다.

경기 장면을 통해 직접 확인해보자.
양준석이 이승현과 탑에서 하이 픽앤롤을 시도한다. 유기상은 왼쪽 코너에 위치해 공간을 벌려주고 있다.

레바논이 이번에도 스위치 수비로 대응한다. 이승현과 양준석 쪽에서 미스매치가 동시에 발생하고, 이승현이 안으로 이동하며 자연스럽게 미스매치 공략 준비를 시작한다.


이때 왼쪽 로우포스트에 있던 하윤기의 움직임을 주목하자.
하윤기가 엘보우 부근까지 뛰어나오는 밋 아웃(meet out) 동작을 통해 볼을 받는다. 이를 통해 하윤기가 미스매치 상황에 놓인 양준석, 이승현과 트라이앵글 대형을 만드는데, 이를 국내농구 현장에서는 브릿지(다리) 공격이라고 보통 부른다.
일반적으로 여기서 하윤기는 이승현에게 간결한 패스를 연결, 하이-로우 게임을 할 수도 있고 직접 미드레인지 점퍼를 던질 수도 있다.
다만 이번 한국 대표팀의 특징 중 하나는 이 같은 브릿지 공격에서 하윤기의 역할을 맡은 선수가 하이-로우 게임을 하려고 너무 오래 볼을 지연시키는 것보다는, 빠르고 간결하게 볼을 처리하는 것을 주문한다는 것이다.
과감하게 점퍼를 던지거나, 반대 사이드로 속도를 붙여 핸드오프를 빠르게 하는 것이 대표적이다.

하윤기의 선택은 양준석과의 핸드오프였다. 잠시 이승현을 바라본 하윤기는 곧바로 양준석과 핸드오프 2대2 게임을 펼친다.
이때 레바논의 40번은 첫 스위치 수비로 양준석을 마크하게 된 상황에서, 핸드오프 2대2 게임까지 따라가야 하는 부담이 순간적으로 생긴다.


여기서 양준석-유기상 LG 송골매 듀오의 호흡이 빛을 발한다.
레바논은 양준석과 하윤기의 2대2에 대해서도 곧바로 스위치로 대응한다. 이때 양준석은 왼쪽으로 드리블을 이어가며 왼쪽 코너의 유기상을 바라보며 다음 액션을 준비한다.
이번에 양준석이 볼을 드리블하며 왼쪽 사이드로 이동하고, 유기상이 코너에서 윙으로 올라오는 리프트 동작으로 핸드오프 패스를 받는 드리블 핸드오프 공격이다.

양준석이 순간적으로 왼쪽 사이드라인 방향으로 몸을 열며 핸드오프 패스를 시도한다.

갑작스러운 양준석-유기상의 핸드오프 게임으로 인해 유기상을 막던 수비수가 양준석의 스크린 아래로 지나가는 언더 수비를 하고 만다. 유기상이 사실상 오픈 상태가 됐다.


유기상의 또 다른 강점 중 하나는 오프 볼 무브 이후 볼을 캐치할 때 몸의 스탠스에 상관없이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밸런스를 만들어내는 부분이다.
자세히 보면 양준석의 핸드오프 패스를 받는 순간 유기상의 양발 스탠스가 림이 아닌 반대 사이드라인 방향으로 열려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유기상은 강한 하체 힘과 점프를 활용해 공중에서 몸을 비틀어 멋진 캐치앤슛 3점을 터트린다.

3. 핀다운+엑시트 스크린 연속 활용
위 2가지 장면에서는 유기상의 기습적인 리프트 액션이 사이드 픽앤롤, 스위치를 공략하는 연속 핸드오프 게임과 어우러졌다면, 이번 장면에서는 유기상의 오프 볼 무브를 활용하는 한국의 스크린이 빛을 발한다.

한국의 3쿼터 첫 공격 장면이다.
양준석이 탑에서 볼을 잡고 있고, 이현중과 김종규는 슬롯(slot, 자유투 박스의 옆 라인을 가상으로 3점슛 라인까지 연장했을 때 일직선상에 있는 위치)에 위치해 있다. 중계화면에 모두 잡히진 않았지만 나머지 2명은 코너에 위치해 있다.
혼(horn) 대형의 공격이다.


양준석이 이현중 쪽으로 드리블하며 이동하고, 이현중은 양준석을 위해 볼 스크린을 걸고 반대 윙으로 이동한다.
이때 김종규는 양준석으로부터 멀어지는 이현중을 위해 플레어 스크린을 건다.
전형적인 혼 플레어(horn flare) 공격 패턴이다.

전반 내내 한국의 오프 볼 무브 패턴에 당했던 레바논이 발빠르게 대응, 정상적으로 마크맨들을 따라간다. 이현중이 곧바로 손짓하며 다음 액션이 시작된다.

한국의 다음 액션은 오른쪽 코너의 유기상을 위한 양준석의 핀다운 스크린 세팅이다.


그러나 전반 폭격 후 유기상을 의식하고 있는 레바논이 좋은 대응을 한다.
양준석을 막고 있던 10번(파란색 원)이 볼 쪽을 등지고 유기상의 동선을 미리 잡는 탑 락(top lock) 수비를 펼치며 유기상 쪽으로 스위치해버린다.
볼을 가진 이현중에게서 유기상 쪽으로 패스가 갈 수 있는 길이 10번의 몸에 가로 막힌 상태.
이로 인해 유기상을 위한 핀다운 스크린 액션도 무산된다.

그러나 여기서 끝이 아니다. 한국의 3번째 액션이 시작된다. 유기상은 반대 코너로, 양준석은 탑으로 뛰어나오며 공간을 벌린다.

유기상과 양준석의 움직임으로 순간적으로 이현중 주변에 헬프 수비수가 사라졌다.
이현중과 가장 가까운 헬프 수비수들의 위치와 코너와 반대 윙이다. 이현중이 아이솔레이션 상태를 놓치지 않고 특유의 왼쪽 돌파를 시작한다.(위와 같은 이현중 주변의 스페이싱 상태를 전술적으로는 더블 갭(double gap) 상태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현중을 도와줄 헬프 수비수가 없는 상황이 되자. 유기상을 막던 10번(파란색 원)이 유기상을 버려두고 RA 구역 앞에 서서 이현중의 림 어택을 체크하게 되는 것이 보인다.

여기서 이현중, 문정현, 유기상의 기막힌 3인 액션이 나온다.
유기상은 헬프 수비를 하고 있는 10번(파란색 원)을 버려두고 반대 코너로 돌아올라가고, 문정현은 유기상을 위해 자신의 수비수를 안으로 밀어넣는 엑시트 스크린(exit screen, 코너로 빠져나가는 슈터를 위해 동료 공격수가 림 방향으로 거는 스크린)을 시도한다.

플레이메이커 이현중의 장점이 여기서 또 발휘된다.
문정현의 엑시트 스크린, 코너로 돌아가는 유기상의 움직임을 발견하고 곧바로 코너로 킥아웃 패스를 한다.

유기상이 볼을 잡았을 때 유기상의 수비수 10번과 문정현을 막던 수비수가 모두 문정현의 엑시트 스크린에 걸려 꼼짝 못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문정현의 단단한 몸싸움과 강한 힘은 이날 수비에서는 디드릭 로슨 봉쇄와 박스아웃에서, 공격에서는 이 같은 스크린에서 빛을 발했다.
결국 유기상이 또 3점을 터트리며 후반 시작과 동시에 레바논을 절망에 빠뜨린다.

이번 대회에서 유기상은 슈터로서 자신의 강점을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2024-2025시즌부터 소속 팀 LG에서 오프 볼 무브의 3점 시도를 많이 가져가면서 슈터로서의 영역을 꾸준히 넓혀온 효과가 아시아컵이라는 중요한 국제무대 대회에서도 빛을 발하는 중이다.
더 의미 있는 것은 유기상의 오프 볼 무브가 한국의 전반적인 오펜스 흐름과 패턴과 효과적으로 어우러지며 시너지를 내고 있는 점이다.
유기상의 활약 속에 'KOR든스테이트'의 위력은 더욱 빛을 발하고 있다. 다만 8강 상대로 점쳐지는 중국 관계자들이 이날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보며 그 위력을 확인한 이상, 앞으로는 훨씬 심한 견제에 시달릴 것이다.
유기상이 상대의 집중 수비를 어떻게 이겨낼지, 한국이 이를 역이용해 공격에서 어떤 새로운 결과물을 만들어낼지 궁금하다.
사진 =FIBA 제공, FIBA 중계화면 캡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