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을 축하드립니다…2025년 2월 10일, 114회 숙명여고 졸업식’

숙명여고의 졸업식이 열리는 2월 10일. 졸업생 신분의 한 소녀는 학교가 아닌 부산의 버스에서 SNS로 친구들의 졸업 사진을 스크롤하고 있었다. 지난해 협회장기에 이어 왕중왕전 MVP까지 휩쓸며, 그 누구보다 모교의 이름을 널리 알린 송윤하에게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을 수 있는 이번 졸업식은 꼭 참석하고 싶은 순간이었을 터.

“졸업식에 못 갈 거라는 건 어렴풋이 예상하고 있었어요.” 숙명여고의 송윤하가 말한다. “몇 주 전부터 달력을 보니, 이때쯤 열릴 BNK와 경기가 워낙 중요한 게임이 될 것 같았거든요. 졸업식에 못 가는 건 당연히 조금 아쉽긴 했지만, 뭐 그럴 겨를도 없었어요. 이게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니까.”

직전 경기였던 신한은행전에서 패배한 KB는 4위와 승차가 1경기로 벌어졌다. 남은 경기는 4경기, 사실상 남은 경기에서 하나라도 미끄러진다면 플레이오프는 어려워지는 배수의 진 상황. 송윤하는 스마트폰을 라커에 두고 졸업 대신 대업을 위해 코트로 향했다.

 

경기는 그야말로 혈투였다. 4강을 위해 남은 경기 전승의 각오를 다진 KB와 창단 첫 정규리그 우승을 꿈꾸고 있는 BNK는 경기 내내 도합 13번의 역전을 주고받으며 물러서는 법을 몰랐다. 그렇게 치열한 경기는 55-58 BNK의 리드 속 남은 시간은 36초. 이날 경기 승리를 위해 졸업식을 포기하고 온 송윤하가 투포원(2 For 1) 기회를 잡았다. 허예은과 투맨 게임을 통해 매치업을 김소니아에서 이이지마 사키로 바꾼 뒤 골밑으로 다이브, 그리고 45도에 있는 이윤미의 랍 패스로 안전하게 공을 배송 받았다.

“공을 잡고 나서는 제 매치가 누군지도 몰랐어요.” KB스타즈의 송윤하가 그 장면을 회상한다. “스위치로 수비를 바꾼 건 알았는데, 워낙 급한 상황이라 공을 잡고 좀 빨리 올렸어요. 올리는 순간 힘이 들어가서 손에서 떠날 때 ‘아!’하는 느낌이 딱 들었고…”

송윤하의 야투 실패로 KB의 계획은 어긋났다. 남은 시간은 17초. KB의 유일한 선택지는 단 하나, 파울 작전.

벤치의 김완수 감독은 선수들에게 다급하게 파울을 지시했고, KB 선수단은 백코트와 함께 볼을 찾았다. 그리고 볼을 가진 안혜지에게 파울하며 팀 반칙에 의한 자유투. 안혜지가 자유투 라인으로 향하는 사이, KB 선수단은 송윤하에게 다가와 어깨를 두드렸다.

“경기 전부터 ‘어떻게 이기지?’, ‘못 이길 경기야’라는 생각은 안 하려고 했어요.” KB의 주전 가드 허예은이 말한다. “윤하가 시즌 중반부터 게임에 본격적으로 투입되고 나서부터는 BNK전은 이상하게 자신이 있었거든요. 픽게임으로 스위치를 만들면, 어떻게든 윤하가 미스매치로 포스트에서 비벼줄 수 있잖아요. BNK가 워낙 강팀이지만 높이가 그렇게 강점인 팀은 아니니까. 그래서 상대 전적과는 상관없이 '해볼 만하다'라는 생각으로 마인드 컨트롤을 하고 있었어요.”

허예은의 말처럼 송윤하가 주전으로 도약한 뒤 KB의 공격 패턴은 확실히 다양해졌다. 시즌초반 KB가 강이슬, 나윤정, 허예은의 극단적인 점프슛 팀이었다면, 혜성처럼 등장한 빅맨 송윤하의 정통적인 픽앤롤 플레이는 상대 벤치에게 확실한 위협을 안겼다. 게다가 그 픽앤롤의 지휘자는 이 리그의 어시스트왕.

“저는 입단할 때부터 (박)지수 언니가 있었잖아요. 지수 언니는 그때나 지금이나 정말 말도 안 되는 최고의 센터였고, 그러니까 저는 신인 때부터 엄청난 행운을 누린 거죠. 그런데 한편으로는 그런 것도 있었죠. 제가 지수 언니랑 픽게임을 해서 성공하면, 아무리 좋은 패스가 나와도 모든 팀의 가드들이 다 그랬을 거예요. ‘허예은은 지수랑 하는데 저렇게 하는 게 당연하지’라고. 근데 맞잖아요. 지수 언니니까.”

“지수 언니랑 픽게임하던 시절 수비를 한번 보세요. 상대 핸들러랑 빅맨 두 명 모두 다 지수 언니를 견제하러 가요. 언니가 고생했죠. 그런데 윤하랑 픽게임을 하면, 두 명의 수비가 오히려 저한테 헷지를 와요. 그런데 저는 이런 수비가 지금은 오히려 즐거운 거죠. 힘들기도 하고 지수 언니가 보고 싶기도 하지만, 그러면서 저도 성장을 하고 있는 거니까요. 윤하가 없었으면 이런 픽게임도 못 했을 거고, 이런 성장도 없었을 거예요. 그리고 신인이라고 하기에는 픽하고 들어가는 롤, 캐칭, 슛까지 다 좋잖아요? 복덩이죠. 윤하가 거기서 실패했다고 윤하한테 뭐라고 할 팀원은 아무도 없어요.

루키 시절, 박지수와 함께 하며 이제 어엿한 어시스트왕으로 성장한 허예은이 새로운 루키 송윤하의 실패를 치켜세운다.

 

송윤하 그리고 허예은과 함께, 종료 17초를 남기고 안혜지의 자유투 루틴을 골밑에서 바라보고 있는 또 다른 선수가 있었다. 안혜지의 자유투 포물선 너머로 보이는 사직의 관중석들과 벤치. 아시아쿼터 나가타 모에에게 이곳 사직은 썩 좋은 추억이 있는 곳은 아니다.

“한국에 와서 BNK와 처음 경기를 하던 날, 일본에 계신 어머니가 처음으로 경기를 보기 위해 부산에 왔었어요.” 나가사키 출신의 모에가 BNK와 첫 만남을 떠올렸다. “좋은 모습을 보여드리고 싶었는지 너무 힘이 들어갔던 것 같아요. BNK가 제 플레이를 분석해서 수비를 잘 준비한 것 같더라고요. 그날 경기는 씁쓸한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웃음)

모에의 말처럼 BNK는 시즌 초반, 모에의 장점과 단점을 가장 잘 연구해 준비한 팀이었다. 일본 시절부터 돌파와 컷인이 좋은 대신, 3점슛이 약했던 모에를 파악한 BNK는 모에에게 3점슛을 내주는 새깅 디펜스를 준비하며 KB의 공격 계획을 망가뜨렸다. 개막 후 평균 16.0점을 기록 중이던 모에는 이날 BNK와 첫 만남에서 4점으로 꽁꽁 묶였고 팀도 함께 패배했다. 이후 WKBL의 모든 팀은 본격적으로 모에를 상대로 새깅 디펜스를 준비했고, 이는 모에와 KB의 숙제가 됐다.

“부정적인 말은 하고 싶지 않지만, 3점슛은 확실히 제 장기가 아닙니다.” 모에가 자신의 슛에 대해 조심스럽게 얘기했다. “때때로 제가 팀의 스페이싱을 방해하는 건 아닐까 걱정합니다. 또 제 수비 때문에 방해를 받는 동료들에게 미안할 때도 많고…”

하지만 모에는 이토록 낮은 3점슛 성공률로도 리그에서 살아 남는 법을 아는 선수다. 안혜지가 자유투 2구째를 실패하는 순간, 특유의 기민한 몸놀림으로 이날 경기 11번째 리바운드를 잡아냈다. 이것은 확실한 모에의 장기다. 17초, 16초, 15초… 모에가 직접 공을 드리블하며 코트를 넘어왔다.

 

“솔직히 공을 잡고 넘어올 때만 해도 제가 슛을 던질 생각은 없었어요.” 16%. 이날 경기 전까지 나가타 모에의 3점슛 성공률.

“원래 감독님의 작전은 돌파를 해서 (강)이슬 언니나 (허)예은이에게 패스를 주라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이슬 언니를 보니 소니아 선수가 너무 강하게 밀착 마크를 하고 있어서 도저히 패스가 안 될 거라 생각했죠. 그래서 돌파를 시도해서 수비를 모으려고 했는데, 예은이도 수비가 좋은 사키 선수가 마킹을 하고 있어 빼주더라도 3점을 던지기에는 어려울 것 같았어요. 그래서 예은이와 눈이 마주친 순간 결심했어요. ‘이 슛은 내가 던져야 한다’고요.”

청주 KB스타즈의 한 시즌이 걸린 슛. 모에가 팔을 림으로 뻗쳤고, 미움 받을 용기로 쏘아올린 이 작은 공은 경기 종료 1초를 남기고 깨끗이 림을 통과했다. 58-58 동점. 1월 25일 이후로 보름이 넘게 3점슛 성공이 없던 모에의 기록지와 함께, KB의 시즌도 다시 쓰여지는 순간. 결국 기세를 올린 KB는 연장전 끝에 대어 BNK를 잡고 시즌도 함께 연장했다.

 

“단지 한국에서 뛰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과 일본의 이 제도의 발전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일본의 첫 아시아쿼터 선수로 활약한다는 건, 모에에게 남다른 의미를 갖는다. “제가 이렇게 한국에서 활약하는 모습을 보면서 이 제도에 관심을 갖는 일본 선수가 한 명이라도 더 늘었으면 좋겠습니다. 코트 안에서뿐만 아니라 코트 바깥에서도 여러 방법을 통해 적극적으로 알릴 생각이에요.”

남은 경기는 3경기, 모에가 쏘아 올린 이 작은 공은 리그의 판도를 뒤집었다. 우리은행과 0.5 경기 차로 치열하게 선두 싸움을 벌이던 BNK는 이제 자력 우승의 매직 넘버를 우리은행에게 빼앗겼다. KB는 4위 신한은행과 승차를 0.5경기 차로 줄이며 다시 닻을 올렸다.

“물론 지금의 가장 큰 목표는 플레이오프 진출이고요. 남은 경기를 전부 승리로 가져가 팬들에게 반드시 플레이오프 티켓을 선물해드리겠습니다.”

4위를 앞두고 펼치는 이 역대급 고지전. 모에의 기적은 과연 WKBL의 세계선을 어떻게 바꿀까? 리그의 시계바늘은 서서히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사진 = 이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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