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황호재 기자] 프로 선수들은 구단과 팬들의 큰 기대를 받으며 데뷔한다. 하지만 모든 선수들이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대에 못 미친 선수들이 훨씬 더 많다. 부상과 자기관리 실패, 뜻밖의 사고 등 여러 가지 변수들이 이들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기대에 비해 N%가 부족한 커리어를 보낸 선수들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 그 네 번째 주인공은 빈 베이커다.

♣ 빈 베이커 PROFILE

출생 : 1971년 11월 21일 (미국 플로리다州 레이크 웨일즈)
신체조건 : 211cm, 105kg
출신대학 : 하트포드 대학교
데뷔 : 1993년 신인 드래프트 1라운드 8순위 (밀워키)
소속팀 : 밀워키 -> 시애틀 -> 보스턴 -> 뉴욕 -> 휴스턴 -> LA 클리퍼스 
수상실적 : 올스타 4회, 올-NBA 세컨드 팀 1회, 올-NBA 서드 팀 1회, 올-루키 퍼스트 팀, 2000 시드니 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통산기록 : 13시즌(총 791경기) 11,839득점 5,867리바운드 1,509어시스트 582스틸 798블록슛 / 경기당 평균 15.0득점 7.4리바운드 1.9어시스트 0.7스틸 1.0블록슛

 

• 무명학교에서 건진 기대주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 사이, NBA는 파워포워드의 춘추전국시대였다. 빈 베이커는 그 가운데서 최고의 선수로 꼽기에는 부족했지만, 강자를 논할 때 꼭 몇 손가락 안에 꼽히는 스타였다. 미국 플로리다주 태생인 베이커는 어릴 적 코네티컷으로 이주해 이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여러 이름난 학교들의 제의를 거절하고 베이커가 택한 곳은 코네티컷에 위치한 하트포트 대학이었다. 더 좋은 학교들의 제의를 뿌리친 이유는 다름 아닌 하트포트 대학이 제시한 장학금 때문이었다. 베이커의 대학시절은 전형적인 무명학교의 외로운 에이스였다. 팀 성적이 언제나 지지부진했기에 4년 동안 베이커는 NCAA 토너먼트 무대를 한 번도 밟아보지 못 했다. 하지만 그는 4학년 시절 경기당 평균 28.3득점, 10.7리바운드라는 출중한 성적을 남기며 컨퍼런스 ‘최우수선수’ 상을 차지했다.

약체 대학 팀 소속이었던 선수에게는 언제나 물음표가 붙는다. 이를테면 “약팀에서 뛴 덕에 기록이 부풀려진 것은 아닐까?”, “프로에 와서 밑천이 드러나지 않을까?”이런 의혹들 말이다. 하지만 밀워키 벅스는 1993년 드래프트에서 베이커를 8순위로 지명하는 도박을 감행했다. 그리고 시즌이 시작되자 그것은 탁월한 선택이었음이 드러났다. 1~5순위에 지명된 크리스 웨버, 숀 브래들리, 앤퍼니 하더웨이, 자말 매쉬번, 아이재아 라이더는 데뷔 시즌부터 이름값을 했다. 하지만 6, 7순위 지명자인 칼버트 체이니(워싱턴 불리츠), 바비 헐리(새크라멘토 킹스)는 베이커에 비해 딱히 나은 활약을 펼치지 못했다. 커리어 전체를 놓고 봐도 몇 시즌 반짝하다가 사라진 체이니나 교통사고로 선수생명이 빨리 단축된 헐리보다 결과적으로 베이커를 뽑은 밀워키의 선택이 더 나았다. 베이커는 키(211cm)가 크면서도 움직임이 가벼웠고, 포스트업에서 파생되는 점프슛과 골밑슛 등 각종 공격이 우수했다. 또 블록슛 타이밍을 맞추는 능력도 좋았기에 팀에 여러모로 큰 보탬이 됐다.

그는 데뷔 시즌에 경기당 평균 13.5득점 7.6리바운드 1.4블록을 기록했고, 크리스 웨버, 앤퍼니 하더웨이, 자말 매쉬번, 아이재아 라이더와 함께 올-루키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렸다. 그리고 이어진 1994-95시즌 밀워키는 퍼듀 대학의 ‘폭격기’ 글렌 로빈슨을 영입했다. 이전 시즌 20승 62패에 그쳤던 밀워키는 이 시즌에 34승 48패(동부 컨퍼런스 9위)로 크게 나은 성과를 거뒀다. 시즌 막판까지 보스턴 셀틱스와 플레이오프 8번 시드를 놓고 접전을 펼쳤지만 아쉽게도 1경기차로 무릎을 꿇었다. 베이커는 이때 생에 첫 더블-더블 시즌(경기당 평균 17.7득점 10.3리바운드 1.4블록)을 보내며 동부 컨퍼런스 올스타에 선정됐다.

• 올스타부터 올림픽 금메달까지

1995-96시즌 베이커와 로빈슨은 한층 더 무르익은 기량을 선보이며 리그에서 가장 유능한 포워드라인을 구축했다. 베이커는 정규시즌 82경기에 모두 선발로 출전하며 또 다시 올스타에 선정됐다. 하지만 문제는 팀 성적이었다. 두 선수를 제외한 다른 선수들의 지원사격이 부족한 가운데 밀워키는 실망스런 성적(25승 57패)을 거뒀다. 마이크 던리비 감독이 물러나고 크리스 포드가 사령탑을 맡은 밀워키는 1996년 드래프트에서 스테판 마버리를 지명한 후 미네소타 팀버울브스가 지명한 레이 알렌과 맞트레이드했다. 알렌의 가세는 분명히 큰 힘이 됐다. 그리고 베이커는 3시즌 연속 동부 컨퍼런스 올스타에 선정됐다. 하지만 밀워키는 베이커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팀에 한계를 느꼈다. 이들은 알렌의 성장가능성을 크게 봤고, 새로운 판을 짜기로 했다.

결국 밀워키는 시애틀 슈퍼소닉스(오클라호마시티 썬더의 전신),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 삼각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밀워키는 터렐 브랜든, 타이론 힐, 그리고 1998년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을 얻었고, 클리블랜드는 숀 켐프와 셔먼 더글라스를 얻었다. 그리고 시애틀은 베이커를 영입했다. 각 팀의 주축 선수들이 연루된 트레이드였기에 세간의 큰 관심을 받았다. 하지만 이때만 해도 이 트레이드 이후 베이커와 켐프, 두 엘리트 빅맨이 추락할거라 생각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들은 트레이드 된 첫 시즌만 해도 각각 서부 컨퍼런스와 동부 컨퍼런스 올스타에 선정될 정도로 훌륭한 기량을 뽐냈다. 베이커는 시애틀에서의 첫 시즌인 1998-99시즌에 주로 센터로 활약했다. 그는 경기당 평균 19.2득점 8.0리바운드 1.0블록을 기록했고, 시애틀은 플레이오프 2라운드까지 진출했다.

문제는 1998-99시즌부터였다. 선수단의 파업 때문에 NBA 직장폐쇄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시즌은 평소보다 3달가량 늦게 개막했다. 이때 차근차근 운동을 하며 시즌을 준비한 선수들도 있었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었다. 언제 파업이 종결돼 시즌이 시작될지 모르는 마당에, 마치 여름휴가라도 얻은 듯 마냥 놀면서 시간을 허비한 선수들도 많았다. 베이커와 켐프가 바로 후자에 해당했다. 새 시즌을 앞두고 시애틀이 센터 올든 폴리니스를 영입하며, 베이커는 다시 파워포워드를 맡게 됐다. 하지만 파업기간 동안 술에 찌들어 살며 운동을 하지 않았던 베이커는 체중이 증가했고 움직임도 둔해졌다. 베이커는 경기당 평균 13.8득점 6.2리바운드 1.0블록에 그치는 등 리그 최상위권 빅맨 그룹과 거리가 멀어졌다.

1999-00시즌 다시 센터를 맡게 된 베이커는 이전 시즌보다 나아진 활약을 펼쳤다. 정규시즌에 3경기밖에 결장하지 않았고, 경기당 평균 16.6득점 7.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게리 페이튼을 받쳐주는 공격 2옵션의 역할을 잘 수행했다. 시즌이 끝난 뒤에는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로 선발돼 미국에 금메달을 안겼다. 밀워키 시절이라면 국가대표로 손색이 없었겠지만, 이 당시 베이커의 기량은 대표팀에 선발되기에는 다소 부족해 보였다. 하지만 4대 센터(샤킬 오닐, 하킴 올라주원, 패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가 개인사정과 노쇠화 등의 이유로 더 이상 국제무대에 참가하지 못하게 되면서 베이커에게 기회가 왔다. 당시 미국대표팀은 높이가 턱없이 부족했다. 이 당시 알론조 모닝, 케빈 가넷, 샤리프 압둘라힘, 안토니오 맥다이스 등 좋은 빅맨들이 합류했지만 이들 중 본래 포지션이 센터인 선수는 모닝뿐이었다. 베이커는 케빈 가넷과 함께 팀 내에서 최장신이라는 것만으로도 큰 도움이 됐다. 미국은 다소 고전하며 팬들에게 실망을 안겼지만 어쨌든 전승 우승하며 금메달을 차지했다.

 

• 끊임없는 추락
 
올림픽 이후 두 시즌을 시애틀에서 보낸 베이커는 2002년 여름 보스턴 셀틱스로 트레이드됐다. 베이커와 쉐몬드 윌리엄스가 보스턴으로 향하고, 케니 앤더슨과 비탈리 포타펜코, 조셉 포르테가 시애틀로 넘어오는 대형 트레이드였다. 하지만 이적 후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오프시즌 동안 술독에 빠져 살았던 베이커가 몰라보게 살이 쪄버린 것이다. 밀워키에서 시애틀로 트레이드됐을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상태가 더 나빠져 버렸다. 전성기 때 105kg 정도였던 그의 체중은 130kg을 훌쩍 넘겨버렸다. 당시 감독이던 짐 오브라이언은 베이커의 상태를 보고 크게 실망했다. 베이커는 원정길에서도 밤마다 호텔방에서 술로 시간을 보냈다. 이튿날 연습시간에 술 냄새를 풍기며 나타나기 일쑤였던 베이커를 보며 오브라이언 감독은 크게 놀랐다. 결국 그는 구단자체 징계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 당시 보스턴은 앤트완 워커, 폴 피어스 등 젊은 선수들의 강한 체력을 무기삼아 경기를 펼쳤다. 느려진 베이커는 도저히 쓸모가 없었다. 그는 경기당 평균 5.2득점 3.8리바운드라는 초라한 성적으로 보스턴에서의 첫 시즌을 마쳤다. 큰 수술을 받거나 심각한 부상을 당한 경우가 아닌데도 이렇게까지 추락하는 경우는 드물다. 그래서 그의 모습은 더욱 실망스러웠다. 2003-04시즌에 들어서 조금씩 살아나는 듯 했지만 결국 시즌 후반 방출됐다. 그리고 뉴욕 닉스와 계약하며 잔여 시즌을 보냈다. 하지만 이제 급격한 노쇠화와 부상까지 겹쳐 더 이상 예전의 기량을 찾지 못했다. 2005년 2월 그는 휴스턴 로케츠로 트레이드되며 어렵게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2004-05시즌 그가 출전한 정규시즌 경기는 뉴욕에서 24경기, 휴스턴에서 3경기를 합쳐 고작 27경기에 불과했다. 그리고 2005-06시즌이 시작되기 직전, 베이커는 휴스턴에서 방출됐다.

버림받은 베이커에게 손길을 내민 팀은 LA 클리퍼스였다. 2005-06시즌 막판 클리퍼스와 계약한 베이커는 8경기에 출전해 11.4득점 8.0리바운드 1.7블록을 기록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아직 현역으로 뛸 여력이 남아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애썼다. 2006-07시즌을 앞두고 베이커는 미네소타와 계약했다. 하지만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며 그길로 코트를 떠났다. 은퇴 후 그는 학교에서 어린 학생들을 가르쳤다. 지도자로 성공해 NBA로 돌아갈 것이라는 포부를 밝혔지만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다. 이후 그는 2014년 1월 데니스 로드맨의 방북 길에 동행하며 북한에서 열린 친선경기에 참가하기도 했다.

• 무엇이 아쉬웠나? 

베이커에 대한 아쉬움은 하나부터 열까지 ‘자기관리 실패’다. 무엇보다도 술이 문제였다. 술로 인해 급격하게 살이 쪘고, 운동능력을 잃었다. 데뷔 이래 첫 다섯 시즌 동안 단 4경기밖에 결장하지 않았던 그는 알코올중독에 빠진 이후로 속절없이 망가졌다. 밀워키에서 활약하던 시절 만해도 그가 장차 ‘명예의 전당’에 입성할 것이라 점쳤던 이들도 많았다. 만약 베이커가 술에 빠지지 않고 성실히 선수생활을 이어갔다면 최소한 두세 번 정도는 더 올스타와 올-NBA 팀 등에 이름을 올릴 수 있었을 것이다. 전성기 시절 큰 부상을 당하거나 고질적인 질환을 앓은 것이 아니라, 스스로 무너졌다는 점에서 더욱 안타깝다.

또한 직장폐쇄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남는다. 물론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인의 잘못이 크다. 그러나 직장폐쇄가 없었다면 베이커 역시 평소 루틴대로 관성처럼 시즌을 준비하며 지냈을 것이고, 그랬다면 상황은 크게 달라졌을 것 같다. 하필이면 맞트레이드 상대였던 베이커와 켐프가 함께 망가졌기에 팬들이 느끼는 씁쓸함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이 둘은 자기관리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표본으로 아직까지 회자되고 있다. 제 아무리 올스타 레벨에 오른 선수라고 할지라도, 그 이상이 되기 위해서는 모든 것을 초월한 정신력과 의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려주는 사례.

은퇴 후 베이커는 술을 끊었다가 다시 마시기를 반복했다. 안타깝게도 그는 투자 실패, 사업 실패 등의 악재가 겹치며 현역시절 벌었던 1억 달러에 가까운 돈을 모두 잃었다. 그래도 다행히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지는 않았다. 2015년, 그는 시애틀에서 활약하던 시절 구단주였던 하워드 슐츠(스타벅스 회장)의 도움을 얻어 커피전문점 스타벅스 매장을 차렸다. 베이커는 현재 코네티컷에 차린 매장에서 직접 바리스타로도 일하고 있다. 가산을 탕진한 뒤 나락에 떨어진 많은 선수들과 달리, ‘제 2의 삶’을 시작했다는 희망적인 소식. 뿐만 아니라 이제 술도 끊고 정말로 새로운 삶을 살고 있다고 한다. 진작 그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자기관리를 소홀히 하는 선수들은 베이커의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아야 할 것이다.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코리아

저작권자 © ROOKI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