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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키] 편집부 = 2015년 여름, 보스턴 셀틱스의 대니 에인지 단장은 “브래드 스티븐스는 10년 혹은 20년 뒤 역대 최고의 명장이 될 재목"이라고 호언장담한 바 있다. 그런데 스티븐스 감독은 벌써부터 명장 대열에 합류한 것 같다.
※ 본 기사는 루키 11월호에 실린 기사입니다.
포스트 ‘빅 3’ 시대
3년 전, 셀틱스는 ‘빅 3’ 시대를 마감했다. 2012년 여름, 당대 최고의 3점슈터 레이 알렌이 마이애미 히트로 이적하면서 불협화음이 불거졌다. 해체의 신호탄이었다. 알렌은 2012 플레이오프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보스턴을 탈락시켰던 라이벌 구단(마이애미 히트)으로 이적했다. 이에 케빈 가넷, 라존 론도가 발끈했다. 가넷은 언론과 인터뷰에서 “(알렌의) 전화번호를 이미 지웠다"며 섭섭한 감정을 드러냈다. 론도 역시 “등 번호 20번에 관한 기사는 단 한 줄도 읽지 않았다"며 분통을 터트렸다.
이듬해 ‘빅 3’는 완전히 해체됐다. 부진한 팀 성적이 로스터 변화를 이끌었다. 보스턴은 2013 플레이오프 1라운드에서 뉴욕 닉스에 2승 4패로 무릎을 꿇었다. 대권 후보에서 ‘종이호랑이'가 된 것. 대니 에인지 단장은 칼을 꺼내들었다. 구단 통산 17번째 우승을 안겼던 ‘가넷-피어스-알렌’ 트리오를 역사의 뒤안길로 흘려보냈다. 또, 셀틱스에서 9년 동안 장기 집권했던 닥 리버스 감독도 LA 클리퍼스로 발걸음을 옮겨야 했다. 호오를 떠나 에인지 단장은 과감하고 완전하게 ‘새 판'을 짰다.
에인지 단장은 셀틱스의 새로운 미래 설계자로 브래드 스티븐스 감독을 점찍었다. 스티븐스는 만년 약체 버틀러 대학교를 2년 연속 NCAA 준우승(2010, 2011)으로 이끈 촉망받는 젊은 지도자였다. 날카로운 분석력과 다양한 공격 전술, 선수들과의 끈끈한 스킨십으로 명성을 얻었다. 이에 따라 스티븐스는 보스턴 역대 17번째 감독이 됐다.
그러나 모든 이가 ‘에인지의 선택'에 긍정적으로 호응했던 건 아니었다. 특히 NCAA의 전설적인 감독 릭 피티노의 실패 사례를 기억하는 보스턴 팬들은 반신반의했다. 기본적인 팀 전력이 몇 년 사이 크게 떨어졌고 스티븐스가 ‘악동' 론도를 컨트롤할 수 있을지도 미지수였다. NBA에서 검증되지 않은 젊은 감독에게 우군은 그리 많지 않았다.
예상은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스티븐스 감독은 프로 데뷔 첫해였던 2013-14시즌 25승 57패, 승률 30.5%에 그쳤다. 직전 시즌 동부 컨퍼런스 7위 팀이 12위로 내려앉았다. 보스턴은 7년 만에 처음으로 봄 농구 무대를 밟지 못했다. 래리 버드 시대 이후 15년 넘게 이어졌던 암흑기가 또다시 똬리를 트는 듯했다.

놀라운 반전
그러나 보스턴의 침체기는 오래 가지 않았다. 에인지 단장의 눈이 정확했다. 셀틱스는 전문가들의 예상을 보기 좋게 뒤집고, 빠르게 플레이오프 컨텐더로 복귀했다. 2014-15시즌 보스턴은 놀라운 후반기 승률을 보이며 동부 7위에 이름을 올렸다. 시즌 중반 에이스 론도가 댈러스로 떠나고 제프 그린까지 유니폼을 갈아입었다. 미래를 위해 전력 누수를 감행했던 상황을 고려하면 인상적인 성과였다.
보스턴은 마지막 24경기에서 17승을 챙겼는데, 특히 4월의 기세가 무서웠다. 6연승 포함 7승 1패를 기록했다. 상승기류 정점은 그해 4월 10일, 12일에 열린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와 백-투-백 경기였다. 이 기간 동안 르브론 제임스, 케빈 러브가 버틴 클리블랜드를 상대로 두 경기를 모두 따냈다. ‘스티븐스와 아이들'의 가능성을 엿볼 수 있던 작은 파란이었다.
상징적인 사건은 또 있었다. 스티븐스 감독은 2015 플레이오프에 앞서 닥 리버스 클리퍼스 감독과 함께 ‘4월의 감독'으로 뽑혔다. 데뷔 2년차의 새파란 젊은 감독이 지도자 경력 15년의 베테랑과 어깨를 나란히 한 것다. 에인지 단장은 “그때의 공동 선정을 계기로, 우리가 ‘리버스의 흔적'을 성공적으로 지울 수 있겠다는 확신을 가지게 됐다"고 밝혔다.
셀틱스가 2년 동안 뿌린 씨앗이 2015-16시즌 들어 열매를 맺었다. 보스턴은 지난 시즌 48승 34패를 거두며 동부 5위에 올랐다. 3년 만에 5할 이상의 승률로 복귀했고, 플레이오프에서도 어느 정도 성과를 거뒀다. ‘스티븐스표 농구'가 3년 만에 완전히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았다.
1선의 강력한 압박, 왕성한 활동량을 바탕으로 한 기민한 로테이션 수비, 적극적인 벤치 멤버 활용 등이 빛을 발했다. 실제로 보스턴의 NetRtg(100번의 공격/수비 기회에서 득실점 마진 기대치)는 최근 3년간 꾸준히 증가했다(-4.8→0.2→3.2). 점차 팀으로서의 완성도가 무르익어간 것이다. 특히 DRtg(디펜시브 레이팅)는 스티븐스 부임 첫해 리그 17위에서 지난 시즌 4위로 껑충 뛰어올랐다. 탄탄한 팀 수비력은 대권 도전의 필수 요소다. 이 부문에서 보스턴은 기본적인 토대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또, 아이재아 토마스가 4쿼터 해결사로 성장했으며, 2016년 여름, 재능과 경험을 두루 갖춘 알 호포드를 영입했다. 향후 FA 시장에서 대어 한 명만 더 잡을 수 있다면 진지하게 파이널 진출을 노릴 수 있는 위치까지 왔다. 『AP통신』은 2015-16시즌 결산 기사에서 “레드 아워벅 감독 이후 처음으로 보스턴은 선수보다 눈에 띄는 헤드코치를 얻었다"며 스티븐스 감독의 지도력을 호평했다.

스티븐스의 지도철학
스티븐스는 '침착성'을 제1과제로 상정하는 지도자다. 어떤 상황에 놓이든 선수들에게 냉철한 판단력을 잃지 말 것을 주문한다. 이는 경험에서 비롯된 가르침이다. 그는 버틀러 대학교를 이끌었던 NCAA 감독 시절, 이해할 수 없는 심판 콜에 휘말려 경기를 그르친 경험을 많이 했다. 상대 팀 신경전에도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럴 때마다 팀이 궁지에 몰리는 일이 반복됐다. 스티븐스는 원점에서 자신을 돌아봤다. 그는 과거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어느 감독이든 마찬가지겠지만 나는 지는 게 너무 싫다. 특히 내 ‘잘못된 접근'으로 인해 무릎을 꿇는 건 질색이다. 초짜 감독일 때 겪었던 몇 번의 패배를 통해, 어려운 상황에서도 마음을 다잡고 최상의 경기력을 유지하는 것이 야투 연습보다 더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다"고 밝힌 바 있다.
6년 전 봄, 스티븐스 감독, 고든 헤이워드 등과 함께 파이널 포(Final Four) 진출 영광을 함께했던 윌리 비즐리는 “32세의 젊은 감독은 늘 우리에게 침착하라고 강조했다. 그 말을 입버릇처럼 되뇌었다. 우리가 캔자스 대학교, 시라큐스 대학교 등 1번 시드를 획득한 강호들을 차례로 꺾었을 때도 그랬다. 점수 차가 크게 벌어져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기가 막히게 작전 타임을 불러 우리를 흔들어 깨웠다. 앞서 있든, 뒤져 있든 상관없이 말이다. 그는 마음이 차분해지는 단어를 잘 구사한다. 사람을 긍정적으로 고양시키는 법을 누구보다 잘 아는 감독"이라고 말했다.
보스턴의 훈련 내용이 담긴 짤막한 영상이 지난해 『NBA.com』을 통해 공개된 적이 있다. 스티븐스는 훈련 내내 말을 멈추지 않았다. 끊임없이 기본기에 관한 주문을 주술처럼 외웠다. 주입식 교육이 연상될 정도였다. 그는 “자기가 매치업한 선수가 풀-업 점퍼를 던지거든 그냥 내버려둬도 괜찮다. 그런 상황에서 적극적으로 붙었다간 오히려 슈팅 파울 자유투를 내줄 수 있다. 공격수가 풀-업 점퍼를 시도해야 할 정도로 몰아세웠다는 것은 성공적인 수비를 했다는 뜻이다. 드리블하면서 던지는 슛은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몸이 기억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밖에도 여러 농구 격언을 거침없이 풀어냈다. 마커스 스마트가 자체 청백전에서 박스-아웃에 실패, 수비 리바운드를 챙기지 못하는 일이 있었다. 스티븐스는 그 즉시 호루라기를 불었다. “경기 중에 절대로 나와선 안 될 것이 하나 있다. 바로 공격 리바운드를 뺏기는 일이다. 농구를 하다보면 수비 밸런스가 완벽하게 무너지는 순간이 종종 있는데,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상대 빅맨에게 공격 리바운드를 허용했을 때다. 세컨드 찬스를 내주지 않을수록 승률이 올라간다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이어 “목적이 있는 움직임이 중요하다. 우리가 왜 힘들게 앞선에서부터 압박 수비를 펼쳐야 하는지 이해해야 한다. 1선 수비 강도를 높이는 건 상대 실책을 유도하기 위함이다. 실책을 유발한 뒤 올리는 속공 득점은 농구에서 가장 쉬운 득점 가운데 하나다. 쉬운 득점을 많이 적립해야 경기를 지배할 수 있다. 또, 상대의 볼 흐름을 뻑뻑하게 만들어야 한다. 그래야 적군이 리듬을 타지 못한다. 우리는 쉽게, 상대는 어렵게 플레이할 수 있도록 해야 승리에 가까워진다"고 덧붙였다.
스티븐스의 휘슬이 바삐 울릴수록 팀은 더 끈끈해지고 있다. 셀틱스는 지난 시즌 팀 가로채기 2위, 외곽슛 허용률 4위, 팀 리바운드ㆍ어시스트 6위에 올랐다. 이러한 수비 혁신의 밑바탕에는 39세 감독의 잔소리가 있었다.

넥스트 포포비치?
스티븐스는 코트를 밟는 5명 모두가 바지런히 스크린을 걸기를 원한다. 또, 공이 없을 때의 움직임을 독려해 오픈 기회를 잡는 것을 우선시한다. 경기 속도도 빠르다. 보스턴은 지난 시즌 경기 속도 부문에서 리그 4위를 차지했다. 많이 움직이면서 빠른 농구를 펼치는 팀이라 뛰어난 체력은 필수다. 특정 선수에게 34분 이상 출전 시간을 허락하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자연스레 주전과 비주전의 경계가 옅어졌다. 이는 팀 내 건강한 경쟁을 유도하는 ‘2차 효과'를 낳았다. 많은 농구인들은 스티븐스의 지도자 역량을 칭찬할 때 ‘좋은 시너지를 생산하는 팀 문화 구축’을 첫손으로 꼽는다.
‘21세기 대표 명장' 그렉 포포비치 샌안토니오 감독은 열렬한 스티븐스의 팬이다. 포포비치 감독은 “보스턴을 지옥에서 끄집어낸 구원투수다. 풍부한 농구 지식과 훌륭한 성품을 두루 지녔다. 오랫동안 프로 세계에 몸담은 감독으로서 젊고 유능한 수장을 마주하는 건 즐거운 일이다. (그의 존재로) 보스턴은 지금보다 앞으로가 더 기대되는 팀"이라며 스티븐스를 인정했다.
지난 6월 피닉스 선즈에 새 둥지를 튼 포워드 자레드 더들리는 “지금 당장 시즌을 함께 보내고 싶은 감독이 누구인지 묻는 설문조사를 진행하면 매사추세츠 주에 있는 감독은 반드시 최상위권에 이름을 올릴 것이다. 최소 3위 안에서 스티븐스의 이름을 볼 수 있을 것"이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그를 선택했던 에인지 단장도 칭찬 릴레이에 합류했다. 에인지 단장은 “스티븐스는 NBA에서 가장 꼼꼼하고 명석한 감독이다. 그는 놀라운 속도로 프로 스포츠 생리에 대해 배워나가고 있다. ‘인화(人和)'에도 일가견이 있다. 팬ㆍ선수ㆍ프런트와 스킨십이 뛰어나 롱런 요건을 갖췄다. 앞으로 지도자 생활을 하면서 분명히 한 번은 하강 곡선을 그리는 날이 올 것이다. 그러나 난 크게 걱정하지 않는다. 빼어난 실력과 성장 의지는 물론 인품까지 훌륭하기 때문이다. 향후 20년 안에 리그 역사상 가장 눈부신 발자취를 남긴 감독으로 거듭날 것이라 확신한다"고 극찬했다.
인디애나 출신의 무명 농구선수가 이른 나이에 지도자의 길로 들어섰다. 농구선수로서는 빛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많은 명감독이 그랬듯, 스티븐스의 ‘농구 재능'도 코트 위가 아닌 사이드라인에서 진가를 드러내고 있다. 어시스턴트 코치 생활 7년 만에 헤드코치 지휘봉을 잡았다. 이후 자신이 겪은 무명의 설움을 단숨에 날려버렸다. 스티븐스 개인과 버틀러 대학교 모두 전국적 인지도를 얻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2년 연속 준우승’ 드라마를 연출, 대학 스포츠의 신데렐라로 올라섰다.
보스턴에서도 비슷한 흐름을 보이고 있다. 큰 기대를 받지 않고 출발선에 섰으나, 빠르게 팀을 재정비해 우승권으로 진입했다. 이제 막 영화 초반부가 끝났을 뿐이다. 메가폰을 쥔 스티븐스 감독의 시나리오에는 더 큰 그림이 녹아 있다. 빌 러셀-래리 버드 시대에 이어 구단 역대 세 번째 왕조 건설을 꿈꾸는 중이다. 스티븐스가 비상(飛上)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 제공 = NBA 미디어 센트럴
일러스트 제공 = 홍기훈 일러스트레이터(incob@naver.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