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키] 편집부 = 농구계의 레전드, 코비 브라이언트가 2015-16시즌을 끝으로 코트에 작별을 고했다. 우리는 그를 어떻게 추억하고 있을까.
◆ 코비의 끝없는 진화 비결…‘과학’이란 도구를 빌리다
코비는 세계에서 가장 농구를 잘하고 싶다는 열망을 품었다. 그러나 그가 지닌 바람은 막연한 꿈과는 다른 차원이었다. 구체적인 계획에 따라 과학적으로 구축된 목표였다.
커트 램비스 전 레이커스 감독은 “한 번은 경기가 끝난 뒤 코비가 어시스턴트 코치를 불렀다. 코치에게 자신의 팔을 계속 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슛 연습을 이어 갔다. 파울을 당했을 때도 성공률을 높이기 위한 코비만의 훈련 방법이었다. 그는 숙제가 생기면 어떠한 연습을 해야 정답을 찾을 수 있을지 늘 고민했다”고 말한 바 있다. 동료 메타 월드피스도 “코비가 왼손으로 점프슛 연습하는 걸 자주 봤다. 왼손 돌파가 아니라 왼손으로 슛을 시도했다. 정말 깜짝 놀랐다. 난관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마치 아인슈타인처럼 창의적인 해법을 내놓았다”고 밝혔다.
코비는 지독한 연습벌레로 유명하다. 날마다 새벽 4시에 일어나 1,500개의 슛을 던졌다. 득점왕에 오르고 정규 시즌 MVP에 선정된 뒤에도 한동안 이러한 연습량을 유지했다. 그는 단순히 양(量)만 고려한 연습 플랜을 짠 선수는 아니었다. 엄청난 연습량 뒤에는 과학적이면서 세밀한 자신만의 루틴이 구축돼 있었다.
코비는 2014년 11월 중국 유소년 선수를 대상으로 농구 캠프를 열었다. 이때 그가 강조한 부문이 있다. 단계별 목표였다. 코비는 “목표를 설정해야 한다. 그것도 단계별로 최대한 세분화해 설정해야 한다. 이 작업이 중요하다. 목표를 잘게 나누면 성과를 얻기 수월해진다. 내가 프로 데뷔 뒤 처음 아킬레스건을 다쳤을 때, 일단 다시 걸어야겠다는 첫 번째 목표를 세웠다. 혼자 걸을 수 있게 되면 그 다음에는 뛰고 이후에는 재활 과정을 소화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사이드스텝을 밟을 수 있을 때 슛 연습을 시작하겠다는 목표도 세웠다. 모든 일은 단계별로 이뤄진다. 계단을 밟고 올라가면서 문에 이르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을 잘 유지했던 게 지금의 나를 있게 한 원동력이라고 생각한다”고 힘주어 말했다.
그는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할 때마다 ‘농구의 신’을 원망하기보다 상황을 면밀히 살피고 작은 계획을 세웠다고 언급했다. 나쁜 상황에서도 계획을 통해 배움을 얻었다고 강조했다. 코비는 부상을 ‘환상적인 기회’라고 말하기도 했다.
또, 어떤 선수보다 경기 전 몸 풀기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코비는 리그에서 가장 세분화된 ‘루틴’을 지닌 선수였다. 보통 오후 1~3시에 낮잠을 잤다. 82경기에 이르는 1년 스케줄을 소화하기 위해선 낮잠을 꼬박 챙기는 것이 중요하다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다. 경기 시작 4시간 전부턴 분 단위로 훈련 루틴을 짜놓았다.
첫 번째 단계는 하체 스트레칭이었다. 근력 밴드로 발, 발가락, 아킬레스건, 무릎 등 부상이 잦았던 부위를 충분히 풀었다. 경기장에 도착해선 20년 동안 구단 물리치료를 맡은 베테랑 주디 세토의 관리 아래 슛 훈련을 시작했다. 훈련은 10~15분 동안 이뤄졌다. 슈팅 드릴이 끝난 뒤엔 어깨, 등, 하체 컨디션과 관련해 얘길 나눴다. 1시간 30분 전에는 20분 동안 하체 마사지를 받았다. 이후에도 엉덩이 스트레칭, 무릎 아이싱, 사이드스텝 드릴을 실시했다. 이 과정에서 동원되는 레이커스 소속 직원만 6~8명에 달했다. 분야마다 전문가를 대동해 꼼꼼하게 자기 관리에 임했다. 코비에게 훈련은 양을 채우는 시간이 아닌, 과학의 도구를 빌린 수련 과정이었다. 향상심을 현실로 구현해낸 작업이었다.

◆ ‘그저 묵묵히’ 코비, 당대 비판을 ‘자양분’ 삼다
어느 분야든 ‘오리지널’은 당대 격렬한 비판에 시달린다. 농구도 예외는 아니다. 그럼에도 위대한 발자취를 남긴 인물들은 소신을 굽히지 않고 자기 삶의 나침반이 가리키는 방향으로만 내달렸다. 크기와 방향을 모두 가진 벡터처럼 스스로 목표한 존재가 되기 위해 뚜벅뚜벅 걷는 데에만 집중했다.
코비는 누구보다 비판과 힐난에 익숙했다. 1996년 신인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13번으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됐을 때부터 그랬다. 당시 1라운드 17순위로 저메인 오닐이 포틀랜드 트레일 블레이저스의 선택을 받았다. 대학을 거치지 않은 고졸 선수가 1라운드에서 두 명이나 지명되긴 처음이었다. 많은 이들이 우려를 나타냈다. 특히 코비는 6년간 레이커스 주전 센터로 활약했던 블라디 디박과 맞트레이드 되며 ‘골드 앤드 퍼플’ 유니폼을 입었기에 반감을 갖는 팬들도 많았다.
데뷔 첫해 코비는 71경기에 나서 평균 7.6득점 1.9리바운드 1.3어시스트 0.7가로채기 3점슛 성공률 37.5%를 기록했다. 평균 출전 시간이 15분 30초인 점을 고려하면 나쁘지 않은 생산성이었다. 시즌이 끝난 뒤 올-루키 세컨드 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델 해리스 감독의 철저한 관리 아래 성공적인 연착륙을 이뤘다.
그러나 플레이오프에서 암초를 만났다. 1997년 5월 13일 유타 재즈와 플레이오프 2라운드 5차전이었다. 코비는 에디 존스의 백업 슈팅가드로 코트를 밟아 11점을 올렸다. 그러나 이 경기에서 역사적인 ‘에어볼 4개’를 쏘아 올렸다. 시리즈 스코어 1승 3패로 벼랑 끝에 몰렸던 레이커스는 결국 이날 93-98로 무릎을 꿇었다. 4쿼터 종료 11초 전부터 연장까지 이어진 코비의 에어쇼는 팬들의 거센 비판을 불렀다.
언론은 코비를 향해 아량을 베풀지 않았다. 모제스 말론, 숀 켐프, 케빈 가넷 등 그간 고졸 스타로 불렸던 선수들이 모두 빅맨 포지션임을 들먹였다. 하드웨어가 빼어난 고졸 빅맨 유망주라면 모를까, 고졸 가드는 결코 성공할 수 없다고 비판했다. 닉 밴 엑셀, 에디 존스, 데릭 피셔, 로버트 오리가 머뭇거리는 사이 과감하게 위닝샷을 노렸던 19살 신인은 그렇게 혹독한 첫 봄나들이를 했다.
코비의 농구인생은 ‘영욕의 20년사(史)’로 정리할 수 있다. 마냥 영예만 누리지 않았다. 그 못지않게 고통스러운 기억도 많았다. 에어볼 4개가 고통의 시작을 알렸다면 두 번째는 샤킬 오닐과 주도권 다툼이었다. 코비는 당돌했다. 당대 최고 센터로 각광받았던 오닐보다 더 많은 공격 기회와 볼 소유를 원했다. 자신을 중심으로 팀 공격이 이뤄지길 바랐다. 사람들은 비판의 칼날을 대부분 오닐이 아닌 코비에게 겨눴다.
코비는 1996년 11월 4일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전성기는 2000년대로 볼 수 있다. 현대농구에 뿌리내린 스몰볼 개념이 아직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데니스 스캇, 델 커리, 팀 레글러, 데일 엘리스 등 당시 리그를 주름잡았던 최고 3점슈터들은 팀의 중심이 아니었다. 소속팀에서 3~4옵션을 맡으면서 팀 승리에 묵묵히 이바지하는 배역이었다. 기본적으로 빅맨 포지션이 강한 팀만이 대권에 도전할 수 있다고 믿던 시절이었다(물론 이는 현재도 유효한 믿음이다).
당시 “레지 밀러와 하킴 올라주원 중 누가 우승 반지를 끼었는가? 새크라멘토 킹스가 만년 하위팀에서 강호로 올라선 시기는 슈팅가드 미치 리치먼드를 보내고 파워포워드 크리스 웨버를 받아들였을 때부터였다. 인기와 성적은 비례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명했던 ‘Run TMC' 사례도 떠올려보라. 결국 농구는 ’높이 싸움'"이라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2010년대 들어 스테픈 커리, ‘모리볼' 등이 출현해 리그 패러다임이 많이 바뀌긴 했지만(특히 3점슛에 대한 위상이 매우 올라갔다) 2000년대만 해도 4, 5번을 중심으로 한 게임 플랜이 지배적이었다. 실제 1977년부터 2007년까지 30년 동안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뽑힌 선수를 보면 빅맨이 26명에 달했다. 가드는 단 2명이었다(1979년 매직 존슨, 1996년 알렌 아이버슨).
빅맨 선호는 세계 농구계를 오래도록 장악하고 있는 흐름이었다. 코비의 데뷔 초기엔 더했다. 지금이야 센터까지 외곽 라인 바깥으로 나와 3점을 던지려고 노력하는 시대지만 당시엔 그렇지 않았다. ‘농구는 신장이 아닌 심장으로 하는 것'이란 말의 이면에는 그만큼 키 큰 선수를 선호하는 리그 역사가 녹아 있다. 성적도 좋았다. 코비 데뷔 전 리그 최강으로 군림했던 팀들의 면면만 봐도 알 수 있다. 2연속 우승으로 조던 공백기를 가장 성공적으로 보낸 휴스턴 로케츠엔 하킴 올라주원이 있었다. ‘쇼타임 레이커스’에는 카림 압둘-자바가 자리했다. 보스턴 셀틱스에도 로버트 패리시와 케빈 맥해일이 꾸준히 올스타급 생산성을 보였다. 샌안토니오 스퍼스도 데이비드 로빈슨과 함께한 14년 동안 미드웨스트 디비전 1위를 8번이나 차지했다.
1995년 팻 라일리가 마이애미 히트 감독으로 부임했을 때 가장 먼저 시도한 일이 스몰포워드 글렌 라이스를 샬럿 센터 알론조 모닝과 맞바꾼 일이었다. 팀의 무게중심을 센터로 옮겨놓는 일부터 시작한 것이다. 라일리 감독은 “단단한 센터 없이 강호로 올라서는 건 어불성설이다. 백코트 중심을 잡는 일은 팀 하더웨이만으로 충분하다”며 모닝 영입 배경을 밝히기도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오닐을 향해 반기를 든 코비의 행동은 시대 조류를 거스르는 철부지 행동으로 읽혔다. 아직 뭘 모르는 젊은 선수의 치기로 여겨졌다. 당대 최고 센터 오닐보다 더 큰 입지와 스포트라이트, 그리고 승부처에서의 볼 소유를 원했던 코비는 그저 자기밖에 모르는 팀 정신을 망각한 가드로 해석됐다.
데뷔 첫 평균 20점대 공격수로 올라선 1999-2000시즌부터 조금씩 본격화된 두 선수의 대립 구도는 이듬해 절정을 이뤘다. 2000-01시즌 내내 오닐과 코비는 으르렁거렸다. 2001년 플레이오프에선 ‘전략적 휴전’을 맺으며 파죽의 11연승을 챙겼다. 공존 실마리를 찾는 듯했다. 필라델피아 76ers와의 파이널 1차전에서 일격을 당했지만, 이후 4연승을 거두며 두 번째 우승을 차지했다. 역대 가장 압도적인 플레이오프 시즌을 보내며 우승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미봉책이었다. 시카고 감독 시절 악동 데니스 로드맨을 컨트롤하고, 토니 쿠코치-스코티 피펜의 자존심 싸움을 진정시켰던 ‘젠(禪) 마스터' 필 잭슨 감독도 두 손을 들었다. 2003-04시즌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 완패한 레이커스는 결국 오닐을 마이애미로 보내며 둘 사이의 불화를 일단락 지었다.
코비는 오닐이 떠난 뒤 부동의 1옵션으로 올라섰다. 그러나 팀은 대권과 멀어졌다. 개인 기록은 리그 최정상급으로 올라갔으나 팀은 플레이오프 진출도 버거울 만큼 전력이 떨어졌다. 언론은 오닐과 공존에 실패한 코비를 향해 “명가 몰락의 원흉”이라며 화살을 겨눴다. 이때부터 코비를 향한 호불호가 극적으로 나뉘기 시작했다. 미국 지역 방송 ‘컴캐스트스포츠넷’은 “코비는 리더가 될 수 없다”며 강하게 비판했다. 사람들은 오닐이 남아 있었다면 더 많은 우승 반지를 획득할 수 있었을 것이라며 비아냥댔다.
‘코비 이적설’이 모락모락 피어나기 시작한 때도 바로 이 시기였다. 2007년 10월 ESPN과 SI는 “시카고, 휴스턴, 댈러스 매버릭스, 뉴욕 닉스 등이 코비에 큰 관심을 보였다. 실제 몇몇 팀은 구체적인 트레이드 카드까지 거론했다. 한창 전성기 기량을 갖춘 아이버슨, 가넷이 프랜차이즈를 떠났다. 코비도 이 같은 흐름에 동참할 가능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고 보도하기도 했다.
데뷔 초 ‘조던 따라잡기에 급급한 애송이 2번’이라는 여론, 오닐과 영역 다툼, 2003년 성폭행 추문, 2012년 드와이트 하워드와 ‘2차 주도권 전쟁’, 타이밍을 놓친 레이커스 세대교체 등 코비는 커리어 내내 비판의 중심에 섰다. 안티 팬이 가장 많은 스포츠 스타를 꼽을 때도 늘 상위권을 다투던 선수가 코비였다. 불과 2년 전만 해도 ESPN, USA투데이 등 여러 언론은 “자기 밖에 모르는 선수”라며 코비를 몰아세웠다. 그가 ‘농구에게(Dear Basketball)’라는 은퇴 편지를 남길 때 ESPN은 “이기적인 성향, 성추문 논란 등으로 이미지가 바닥까지 추락했던 코비가 진정성 있는 편지 한 장으로 안티 팬들의 마음을 훔쳤다”고 표현했다. 그만큼 코비는 인기와 질타를 동시에 받는 대표적인 선수였다.
코비는 정공법을 택했다. 도망가지 않고 정면으로 대중의 시선과 맞섰다. 코비는 2년 전 중국에서 유소년 캠프를 열었을 때 “팬들과 언론이 정한 성공의 기준에 얽매이지 않았다. 성공은 남이 아니라 스스로 느끼는 거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마음을 잘 유지했기 때문에 우승 반지 5개를 손에 낄 수 있었다”고 말했다.
또 지난해 크리스마스를 앞두고 이뤄진 공식 은퇴 기자회견에선 “(어느 순간부터) 유니폼을 벗은 뒤 내가 NBA 역사에서 어떤 위치에 서게 될지는 깊게 고려하지 않았다. 논쟁할 가치도 적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가장 중요한 지점은 20년 동안 보여 준 ‘코비 브라이언트의 플레이’가 현 세대 또는 다음 세대, 농구인을 꿈꾸는 이들에게 얼마나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는가 여부다. 또 내 다음 세대가 그 다음 세대로, 그 다음 세대가 자신의 뒷세대로 좋은 영향을 이어 가는 게 가장 가치 있다고 생각한다. 내가 연감 속 어느 랭킹에 속하는지는 그리 중요하지 않다”고 말했다.
난사, 1옵션에 대한 집착 등의 이미지가 그를 둘러싸고 있지만 농구를 향한 코비의 진정성만큼은 누구도 의심의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바로 이 점이 미국의 ‘리스펙트 문화’와 더불어 은퇴투어를 다닐 때마다 아낌없는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코비는 NBA 통산 6,306어시스트를 쌓았다. 역대 NBA 선수 가운데 32,000점과 6,000어시스트를 동시에 넘긴 선수는 코비밖에 없다. 숫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진 않지만 나름의 방향은 가리키고 있다. 코비는 세상의 질타에도 굴하지 않고 농구에 정진함으로써 업적을 이뤄냈다. 현재 위치에 안주하지 않고 언제나 새로운 ‘작은 목표’를 창조하며 거인의 발자국을 찍었다. NBA 역사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친 코비가 조던과 함께 가장 위대한 슈팅가드라는 데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비교 목록에 ‘스포츠 역사상 가장 완벽한 선수’가 기입돼 있는 선수, 그가 바로 코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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