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으로부터 400일 전인 2022년 12월 24일, 부천에서 열린 하나원큐와 BNK의 경기에서 꼴찌 하나원큐가 역시나 56-74로 대패한 날이었다. 그러나 이 패배가 평소보다 좀 더 특별했던 건, 이날이 크리스마스 이브여서만은 아니었다. 바로 신인 박소희의 기록 때문이었다.

박소희는 이날 커리어하이 27득점을 기록했는데, 무려 28개의 야투를 시도해 19개를 놓쳤다. 이 19개 야투 실패는 지금까지도 깨지지 않고 여전히 리그 1위 기록으로 남아있다. 

“다 올아웃해, 나와. 너(박소희)가 1대1해. 여기서 쏘든, 싸워서 파울을 만들어 내든, 네가 처리해. 너 여기서 도망가면 농구 안 시킨다.

김도완 감독의 혹독한 지시를 그렁그렁한 눈망울로 듣던 신인 박소희, 이날 하나원큐의 4쿼터 작전타임은 여전히 팬들에게 유명한 장면이다.

“2016년이죠 아마. 제가 삼성생명에 처음 코치로 갔을 때였어요.” 김도완 감독이 초보 코치 시절을 회상했다.

“그때 유망주였던 박하나와 고아라가 야투를 10개씩 던지는 거예요. 저도 놀라서 감독님한테 찾아가서 여쭤봤죠. ‘감독님, 어떻게 저렇게 던지는데 그냥 두십니까?’했더니 감독님이 그러시더라고요. ‘저렇게 던져 봐야 느낄 거 아니냐. 언제 쏴야 하고, 또 언제 쏘지 말아야 하는지’라고.”

 

"한 아이를 키우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 (It takes a village to raise a child)."

나이지리아의 유명한 속담으로, 한 명의 아이를 온전히 성장시키기 위해서는 주위 모든 이들의 관심과 정성이 필요하다는 말이다. 하나원큐의 ‘보스’ 김정은 역시 이 말에 동의한다.

“소희가 키도 크고 기술도 좋고 참 가진 게 많은 아이인데…” 김정은이 박소희와 첫 만남을 떠올렸다. “다만 제가 처음 왔을 때 보니, 근성이 좀 부족했어요. 이적하고 얼마 안 돼 웨이트 파트너가 돼서 같이 운동을 하는데, 어느 날 오후에 애가 울고 있더라고요. 힘들다고. 그땐 진짜 막막했죠. ‘감독님, 코치님들이 그동안 얼마나 힘드셨을까’하고. 그때부터 제가 애들한테 눈물 금지령 내렸잖아요.(웃음) 그래도 지금은 다행히 웨이트도 곧잘하고 울지도 않아요. 악바리 근성도 생겼고 씩씩해요.”

400일 전 신인 하나를 키우기 위해 경기를 던졌던 김도완 감독의 작전타임, 16살 차이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모든 것을 주고 가고 싶다는 레전드 김정은의 멘토링, 무릎이 좋지 않은 박소희를 위해 한 시간씩 일찍 나와 1대1로 진행되는 김익겸 코치의 유연성 훈련, 그리고 박소희가 힘들 때마다 찾아가 손을 붙잡는 허윤자 코치의 멘탈 관리까지.

한 아이를 키우기 위한 이 온 마을의 정성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시즌 막판 플레이오프 마지막 티켓을 두고 1경기 차, 사실상 4위 결정전이나 다름없었던 4위 하나원큐와 5위 신한은행의 외나무다리 맞대결. 하나원큐는 선발 라인업 카드에 박소희의 이름을 적어냈다. 최근 부상에서 복귀해 아직 8경기 밖에 뛰지 않은, 직전 경기 우리은행전에서 3점슛 8개를 던져 단 1개 성공에 그쳤던 그 박소희를.

“소희가 선발로 나오더라고요? 김시온이나 정예림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의외네요.” 적장 구나단 감독이 경기 전 라커룸에서 라인업 카드를 보며 했던 말.

그러나 구 감독의 의심대로, 박소희는 이날 경기의 완벽한 엑스펙터로 작용했다. 시작부터 3점슛 두 방으로 상대 작전타임을 호출하더니, 3쿼터에도 또다시 3점슛을 적중하며 신한은행 벤치를 당황하게 했다.

하지만 시즌 전체가 달린 중요한 일전, 신한은행은 쉽게 꼬리를 내리지 않았다. 4쿼터 막판, 에이스 김소니아의 맹활약으로 한때 15점까지 뒤졌던 경기를 단 2점차까지 따라붙은 것. 종료 53초를 남기고 하나원큐의 59-57 살얼음판 리드, 베이스라인 아웃오브바운드 상황에서 김시온이 패스를 건네기 위해 공을 잡았다.

신지현이 오른쪽 사이드에서 출발해 코너로 가는 박소희와 교차, 왼쪽 사이드에서 대기하는 양인영과 김정은의 더블스크린을 받아 슛 찬스를 노리는 패턴. 신지현과 박소희가 교차하는 과정까진 순조로웠으나, 몇 초 뒤 문제가 발생했다. 패턴의 주인공이 신지현임을 눈치챈 강계리가 패스 길을 가로막은 것이다. 

 

“원래 지현이의 슛을 보는 패턴이었는데, 상대가 스위치로 대응하면 막힐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매치업이 작은 (김)지영이었던 제가 급하게 골밑으로 가서 받긴 했는데, 공을 제대로 못 잡았어요. ‘이거 큰일 났다’ 싶었는데…” 김정은이 급박했던 상황을 떠올렸다.

그렇게 어렵게 패스를 잡았지만 이미 두 명의 수비수가 김정은을 감싼 상황, 김정은의 시야에 코트 위 가장 어린 선수 박소희가 들어왔다. 머리 너머로 건넨 패스, 찰나의 체공 시간 동안 김소니아와 강계리가 박소희를 덮칠 듯한 기세로 일제히 뛰쳐나왔다. 웬만한 베테랑들도 슛을 올리기 어려운 터프샷 상황. 그러나 박소희의 몸은 2022년 크리스마스 이브를 기억하고 있었다. 주저 없이 올린 슛, 그리고 몇 초 뒤 중계석에 울린 김기웅 아나운서의 콜.

“박소희 투포인트! 박소희! 박소희의 게임이 되고 있습니다!”

400일 전 놓친 19개의 야투는 2024년 박소희에게 굳은살이 되었고, 그렇게 박소희는 게임을 끝냈다. 이 리그의 가장 오래된 신인왕이, 가장 어린 신인왕에게 건넨 어시스트와 함께.

“정은 언니가 그랬어요.” 박소희가 말했다. “우리 팀에는 다 착한 선수들이 너무 많은데, 제가 악바리를 맡아 달라고요. 그런데 저 원래 중학교, 고등학교 때까진 엄청 악바리라는 소리를 듣고 다녔거든요? 이제 다시 그렇게 될 때가 된 것 같아요. 다시 악바리가 돼서, 언젠가는 꼭 리그의 최고점을 찍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박지현-허예은-강유림-이해란. 해가 갈수록 신인들의 풀을 의심하고 또 걱정하지만, 2019년부터 2022년까지 이 리그의 역대 신인왕들은 모두 국가대표에 차출됐다. 자, 다음은 2023년 신인왕의 차례다.

 

사진 = 이현수 기자

저작권자 © ROOKI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