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 이민재 기자 = 처음에는 그저 그런 벤치 선수였다. 그러나 이제는 리그를 대표하는 올스타 가드로 성장했다. 바로 카일 라우리의 이야기다. 혹독한 성장통 끝에 스타로 발돋움한 라우리의 스토리를 키워드로 정리했다.
  
고집불통
카일 라우리는 토론토 랩터스의 리더로서 성숙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선수들 칭찬은 물론, 자신이 잘못했을 때는 이를 빠르게 인정하기도 한다. 동료들을 이끄는 리더십이 돋보인다. 그러나 라우리가 원래 성숙한 선수는 아니었다. 오히려 ‘고집불통’에 가까웠다.

그가 남을 믿지 않고 자신의 원하는 방향대로 행동하기 시작한 건 어렸을 때 사건으로 짐작해볼 수 있다. 라우리는 『The Players' Tribune』을 통해 어린 시절 경험담을 밝혔다.

“내가 살던 동네에 랍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이발을 시켜주고, 신발도 사줬다. 그는 모든 사람들을 신경 써주는 특별한 존재였다. 그는 남을 도와주는 걸 즐거워했다. 내가 우리 형 다음으로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내가 16살 때 랍이 약물 과다 복용으로 사망했다. 나를 지지하던 사람이 갑자기 사라진 것이었다. 그때부터 다른 사람에게 마음을 터놓기 쉽지 않았다. 특히 나를 이용하려는 사람들도 많았다. 더욱 세상과 소통하지 않았다. 대신 나 자신만 믿고 모든 짐을 짊어졌다.” 라우리의 말이다.

라우리의 성격은 성인이 된 후에도 그대로였다. 이는 NBA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감독의 지시보다는 자신의 플레이만 생각했다. 그러다 보니 경기력 자체도 좋지 않았다. 하지만 라우리는 더 잘하고 싶은 마음이 컸다. 감독의 말은 듣고 싶지 않지만 더욱 잘하고 싶다는 욕심만 있었다. 뭔가 앞뒤가 맞지 않는 듯한 당시 상황이었다.

라우리는 『Yahoo Sports』와의 인터뷰에서 “나의 NBA 첫 2년 동안 가장 두려웠던 점은 ‘D-리그로 내려가지 않을까’라는 점이었다. 특히 D-리그로 간 뒤 다시 NBA에 돌아오지 못할 것에 대해 두려움이 컸다. 나는 2006 신인 드래프트 전체 24순위로 뽑혔다. 로터리픽으로 뽑힌 선수들보다 기회를 덜 받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몇 번의 기회를 날리면 그대로 끝이었다. 조급함이 생겼다”라고 말했다.

덧붙여 그는 “나는 백업 멤버가 되기 싫었다. ‘백업’이라는 호칭이 싫었다. 그보다 더욱 나아지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열정이 사람들에게 잘못 전달된 것 같았다”라며 데뷔 당시를 회상했다.

라우리는 멤피스 그리즐리스에서 NBA 무대를 밟았다. 그러나 그 인연은 오래가지 못했다. 3년차가 되던 2008-09시즌, 트레이드를 통해 휴스턴 로케츠로 둥지를 틀었다. 라이오넬 홀린스 당시 감독이 마이크 콘리를 주전으로 내세우겠다는 계획을 드러냈기 때문이었다.

로케츠의 릭 아델만 감독은 새로 가세한 라우리에게 기회를 충분히 제공했다. 이적 첫날 라우리는 15분가량 뛸 수 있었다. 라우리는 “아델만은 나를 처음부터 신뢰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데뷔전부터 15분이나 뛸 수 있었다. 그는 느긋한 스타일이었다. 선수들이 직접 부딪히며 배우길 원했다. 필요할 때만 자신의 노하우를 전수했다. 아델만은 나에게 ‘내 기대치보다 더욱 좋은 선수가 되길 바란다’라는 말을 했다. 이를 증명하기 더욱 열심히 뛰었다”고 말했다.

그러나 이 기쁨도 오래가지 않았다. 아델만 감독이 떠나고 2011-12시즌 케빈 맥헤일 감독이 새로 가세했기 때문. 라우리는 맥헤일 감독과 스타일이 맞지 않았다. 맥헤일은 다소 직설적인 감독이었다. 보스턴 셀틱스 현역 시절 거친 골밑에서 살아남는 플레이 스타일 때문인지 그의 지도 스타일도 직설적이고 단호했다. 라우리는 점점 맥헤일 감독과 사이가 나빠지기 시작했다. 맥헤일 감독 지도 스타일을 이해하지 못하고, 받아들이지 않은 탓이었다.

결국 라우리의 휴스턴 생활도 이렇게 끝나고 말았다. 토론토로 트레이드가 됐다. 성적은 신통치 않았다. 토론토로 이적한 2012-13시즌, 평균 11.6점 4.7리바운드 6.4어시스트로 존재감이 그리 크지 않았다.

이듬해 5월, 토론토는 마사이 유지리 단장을 영입했다. 당시 유지리 단장은 라우리의 능력은 인정했지만 성격 문제가 큰 걸림돌이었다고 고민했다. 그런 상황에서 유지리 단장은 라우리에게 “평생 2~300만 달러의 선수가 되길 원해? 아니면 1,000만 달러 이상의 선수가 되고 싶어?”라고 말했다. 강한 말로 라우리를 자극하려는 의도였다.

다행히 라우리는 점점 바뀌기 시작했다. 유지리 단장의 조언, 드웨인 케이시 감독의 가르침을 본받아 성격을 고치는 데 성공했다. 더마 드로잔도 당시 “라우리가 처음 왔을 때는 성난 사자 같았다. 그게 본 모습이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모두를 대할 때 인내심을 가지고 부드럽게 대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가정을 꾸리면서 이어진 변화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아내인 아야나는 라우리의 감정 기복을 잘 이해해줬다고. 그러면서 라우리는 한 여자의 ‘남편’,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면서 점점 성숙해졌다. 라우리는 “집 밖의 문제를 집까지 끌고 오면 안 된다. 이런 것들이 내 인생에 부정적인 영향을 주기 때문이다. 경기장에서 있었던 일은 금방 잊어야 한다”며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라우리는 현재 성숙해진 모습으로 코트를 누비고 있다. 휴스턴 시절, 맥헤일 감독과의 설전은 아쉬움으로 남고 있지만 이 역시도 성장통으로 생각한다. “이전에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생각했는지 상관없다. 지금이 나의 진짜 모습이다. 변화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멘토
라우리는 점진적으로 변화했다. 더욱 나아지기 위해 노력했다. 이 과정에서 주변 인물의 도움도 컸다. 바로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서 활약한 천시 빌럽스가 그의 멘토로 큰 역할을 했다.
라우리는 지난 2006년 드래프트를 위해 앤디 밀러 에이전트과 계약을 맺었다. 그때 밀러는 라우리에게 빌럽스를 소개해줬다. 라우리의 부탁이 아닌 밀러의 자발적인 행동이었다. 독불장군 라우리가 빌럽스의 조언을 잘 들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빌럽스 역시 라우리를 통해 자신의 옛 모습을 발견할 수 있어 그를 좋아했다고 한다.

빌럽스는 라우리와 비슷한 부분이 많았다. 어린 시절 가난함을 극복하고 NBA에서 성공하는 과정까지 여러 우여곡절을 겪었다. 두 선수 모두 인생 멘토의 부재, 슬럼프 등을 겪었기에 서로 진심이 담긴 이야기를 할 수 있었다.

빌럽스는 라우리의 투쟁심을 높게 평가했다. “라우리는 매우 고집이 세고 자기가 무조건 옳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점점 자신을 들여다보고 반성했다. 변화하기 시작했다. 그의 가장 큰 장점은 바로 투쟁심이다. 그는 젊은 선수들의 기술력을 갖추면서 예전 선배들의 투쟁심과 경쟁심을 갖춘 선수였다. 완벽한 구성을 갖춘 셈이다. 그가 더욱 발전할 수 있는 계기였다.” 빌럽스의 말이다.

이와 함께 라우리가 많이 본받고 따르려고 했던 선배는 쉐인 베티에다. 휴스턴 시절 라우리는 누구보다도 열심히 움직임에 대해 연구하고 공부했는데, 그 대상이 바로 베티에의 기술이었다. 라우리는 “베티에는 매 경기를 철저히 준비했다. 그 점은 정말 가장 본받고 싶은 부분이었다”고 말했다.

라우리 성장에는 케이시 감독의 공도 컸다. 케이시 감독은 켄터키 대학에서 어시스턴트 코치로 지도자 생활을 시작한 뒤 1994년 시애틀 슈퍼소닉스(現 오클라호마시티 썬더)를 통해 처음으로 NBA에 몸담았다. 당시 시애틀은 거침없기는 언변으로 유명한 게리 페이튼이 있었다. 그러한 페이튼과 조지 칼 감독과의 관계를 끊임없이 배우고 연구했다. 이를 라우리에게도 적용했다.

“라우리의 말투와 행동은 페이튼과 비슷했다. 동료가 실수할 때면 페이튼은 욕을 하거나 심하게 꾸짖었다. 페이튼의 말은 틀리지 않았지만 그의 언행 때문에 동료 선수들이 힘들어했다.” 케이시 감독의 말이다.

케이시 감독은 라우리에게 리더로서 본보기를 알려줬다. 그가 선수들을 이끌도록 격려했다. 라우리는 점점 마음을 열기 시작했고, 빌럽스 등 여러 멘토의 말을 받아들이며 성장하기 시작했다.

②편에서 계속

사진 제공 = NBA 미디어 센트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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