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BA는 미국 내 그 어떤 리그보다도 흑인 사회와 많은 접점을 가지는 곳이다. 이는 지난 2021-2022시즌 NBA에 등록된 선수 중 무려 73.2%가 흑인이라는 사실만 봐도 그 이유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흑인 선수가 많으니 흑인 사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게 당연한 셈. 많은 선수가 코트 안팎에서 인권 신장을 위해 노력했는데 그중에서도 1950년대에 프로 생활을 시작한 러셀은 NBA의 인권 투쟁 역사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마치 미국 내 흑인 인권 운동 활성화의 횃불을 들고 거리를 누빈 마틴 루터 킹 목사처럼 말이다. 이번 시간에는 러셀이 흑인의 인권을 지키기 위해 어떤 노력을 했는지를 알아보자.

 

고요의 바다

빌 러셀이 처음 NBA 무대에 발을 들인 1950년대는 흑인을 향한 백인들의 차별이 상당히 심한 때였다. 아니 그전부터 흑인 인종 차별은 미국 사회에 널리 퍼져 있었다. 러셀은 어렸을 때부터 흑인을 바라보는 백인들의 눈초리가 얼마나 날카로웠는지를 피부로 느끼며 자랐다. 러셀의 부모님은 이웃 주민들의 쏟아지는 편견과 차별에 이사를 결심한 적도 있었고, 샌프란시스코 대학 시절 러셀과 그의 흑인 팀 동료들이 아무리 팀에서 좋은 활약을 펼쳐도 이들은 고작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환영받지 못했다. 백인 학생들에게 흑인 선수들은 조롱거리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렇게 흑인들은 가늠할 수 없는 고통으로 가득한 고요의 바다 위에서 오랜 시간 표류했다. 

이는 러셀이 NBA 선수가 된 이후에도 똑같았다. 데뷔 후 빠르게 보스턴의 핵심으로 자리 잡았지만 러셀을 바라보는 시선은 차갑기만 했다. 나아질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는 다른 흑인 선수들도 마찬가지였다. 코트 위에서는 압도적인 존재감을 발휘하는 선수였을지 몰라도 경기장 밖으로 나가면 이들을 향한 대우는 여전히 그대로였다. 1957-1958시즌 올스타에 선정됐던 러셀이 1958-1959시즌 개막 전 그와 함께 직전 시즌 올스타 명단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과 전미 투어를 할 때 분리 정책이 시행되고 있던 노스캐롤라이나 지역의 한 백인 호텔 주인이 러셀과 다른 흑인 선수들에게는 방을 내어줄 수 없다며 그들을 내쫓은 일화만 봐도 당시 사회가 흑인을 얼마나 배제했는지를 알 수 있다. 

그리고 1961-1962시즌 개막 전 러셀의 화가 머리 꼭대기까지 치밀어 오르도록 만든 사건이 있었다. 켄터키주 렉싱턴에서 벌어진 일이었다. 보스턴 선수단은 세인트루이스 호크스와의 시범 경기를 치르기 위해 렉싱턴을 찾았는데, 러셀의 동료였던 샘 존스와 새치 샌더스가 한 레스토랑에 갔다가 직원에게 ‘저희는 흑인에게 서빙을 할 수 없습니다’라는 충격적인 소리를 들은 것. 그런데 이 말을 들은 사람은 존스와 샌더스 말고 또 있었다. 세인트루이스 소속 흑인 선수였던 클레오 힐 역시 똑같은 레스토랑에서 똑같은 말을 듣고 발걸음을 돌렸다. 

동료들에게 이 소식을 전해 들은 러셀은 분개했다. 무려 NBA 챔피언 자리에 올랐음에도 이렇게 무시 받을 이유가 없다고 생각한 러셀은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결국 그는 예정된 시범 경기를 소화하지 않고 먼저 렉싱턴을 떠나 보스턴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밝혔다. 러셀의 동료인 K.C. 존스와 알 버틀러, 세인트루이스 소속의 클레오 힐과 우디 솔즈베리도 보이콧에 동참했다. 곧장 렉싱턴에서 비행기를 타고 보스턴에 도착한 러셀은 이렇게 이야기했다. 

“저는 흑인들이 이렇게 부당한 대우에 반감을 느낀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세상은 절대 변할 수 없어요. 인간은 누구나 똑같이 대우받을 권리가 있습니다. 다시는 이런 일이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만약 이러한 사태가 또 벌어진다면, 저희는 그때도 가만히 앉아만 있지 않을 겁니다. 그 어떤 상황에서도 경기에 나서지 않을 거예요. 흑인은 자신들의 기본적인 인권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투쟁하고 있어요. 저도 흑인과 뜻을 함께하겠습니다.”

 

혁신가

러셀의 선택은 용감했지만 그만큼 리스크가 컸다. 지금은 이상할 게 없지만 어쨌든 당시 사회 분위기에는 반하는 행동이었기에 논란의 여지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셀이 당당히 흑인을 대표해서 목소리를 낼 수 있었던 이유는 그의 뒤에서 한 혁신가가 무한한 신뢰와 지지를 보낸 덕분이었다. 러셀이 보스턴으로 돌아가겠다는 뜻을 내비쳤을 때도 처음에는 시범 경기를 위해 렉싱턴에 남아야 한다고 그와 다른 선수들을 설득했지만 결국 러셀의 뜻을 받아들여 시범 경기 보이콧을 선언한 선수들을 공항까지 데려다준 인물, 당시 러셀을 지도하는 감독이었던 레드 아워백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아워백은 반세기 넘게 보스턴과 함께 한 전설적인 인물이다. 1950년부터 1966년까지는 보스턴의 지휘봉을 잡은 아워백은 1965-1966시즌이 끝난 뒤에는 단장 자리에 앉아 1984년까지 팀을 지원했다. 이후 1984년부터 2006년까지는 회장직과 부회장직을 맡는 등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구단 운영에 힘을 보탰다.

아워백은 보스턴이 지금까지 기록한 17번의 파이널 우승 중 무려 16번의 기쁨을 선수들과 함께 누렸다. 감독 시절 속공을 중시하는 빠른 템포의 전술과 뛰어난 동기 부여 능력을 바탕으로 무려 9번이나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렸고 단장의 위치에서도 7번이나 우승을 경험했다. 전대미문의 업적 덕분에 아워백은 지난 시즌 NBA 75주년을 기념해 발표된 NBA 역대 최고의 감독 15인 명단에 가뿐하게 이름을 올렸다.

하지만 아워백이 혁신가라는 별명과 어울리는 이유는 단순히 농구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며 수많은 승리를 손에 넣어서가 아니다. 흑인 선수들의 미래를 가로막고 있던 보이지 않는 인종의 바리케이드를 허물었기 때문이다. 선수의 피부색이 어떤지는 그에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워백은 코트 위에서 선수들을 오직 실력으로만 평가하는 인물이었다. 

사실 1940년대까지만 해도 NBA는 흑인 선수들에게 호의적인 리그가 아니었다. 1949년까지는 리그에 소속된 흑인 선수가 단 한 명도 없었고 드래프트에서는 아무리 잠재력이 풍부한 선수도 흑인이라면 철저히 외면당하는 경우가 다반사였다. 그런데 이러한 흐름을 깨고 처음으로 신인 드래프트에서 흑인 선수를 지명한 사람이 바로 아워백이었다. 1950년 보스턴의 감독으로 부임해 선수 스카우팅까지 직접 도맡았던 아워백은 그해 신인 드래프트에서 NBA 최초의 흑인 선수인 척 쿠퍼를 지명해 많은 사람을 놀라게 했다. 0%가 지금의 73.2%로 변하는 여정의 첫 발걸음이었다. 

기본을 향해 나아가는 아워백의 혁신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이후에도 능력 있는 흑인 선수들을 적극적으로 코트에 투입했다. 앞서 언급된 빌 러셀이나 K.C. 존스, 새치 샌더스, 샘 존스 모두 아워백이 발굴한 인재들이었다. 1964년에는 빌 러셀-K.C. 존스-샘 존스-새치 샌더스-윌리 널스의 선발 명단으로 경기를 시작해 NBA 역사상 처음으로 흑인 선수로만 이뤄진 선발 라인업을 탄생시켰고 1965-1966시즌이 끝난 후에는 러셀을 자신의 뒤를 이어 보스턴의 사령탑으로 지목해 그에게 NBA 최초의 흑인 감독 타이틀을 선사했다. 

그래서인지 아워백과 러셀은 생각의 결이 비슷했다. 두 사람 모두 자기 가치관이 옳은 방향으로 나아갈 나침반이라고 여겼다. 1964년 아워백이 오로지 흑인 선수로만 구성된 선발 라인업을 들고나온 경기가 끝난 후 기자들이 이에 관해 묻자 그는 “이런 일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나중에야 알게 됐습니다. 개인적으로 제가 감독이거나 혹은 다른 누군가가 이 팀의 감독일 때 저희가 항상 코트 위에서 해야 할 일은 승리를 가져올 수 있는 선수를 경기에 투입하는 겁니다. 그게 전부입니다”라고 당연하다는 듯이 답했다. 러셀 역시 아워백의 후계자로서 보스턴의 감독 자리에 올랐을 때 “저는 제가 흑인이라서 감독직을 제안받은 것이 아닙니다. 그저 아워백 감독님이 제가 그럴만한 능력이 있다고 생각하셔서 기회를 주신 겁니다”라고 이야기했다. 

 

선한 영향력

러셀은 농구 코트 못지않게 흑인 인권 운동 현장에도 꾸준히 나갔다. ‘나는 꿈이 있습니다(I Have A Dream)’라는 말로 유명한 마틴 루터 킹의 워싱턴 연설 현장에도 있었고, 1967년에는 베트남 전쟁 징병을 거부한 세계적인 복싱 선수 무하마드 알리를 만나기 위해 클리블랜드로 향해 전쟁터에 나가는 대신 옥살이를 하기로 선택한 알리의 결정에 지지를 보내기도 했다. 

이러한 일들 말고도 러셀은 자신만 할 수 있는 방식으로 선한 영향력을 행사한 적이 있다. 1963년 인권운동가 메드가 에버스(Medgar Evers)가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해 암살당했을 때 그의 형인 찰스 에버스에게 전화를 걸어 그를 도와주고 싶다는 뜻을 밝힌 러셀은 곧장 미시시피로 날아가 동네 운동장에서 백인과 흑인 아이들이 함께 뛰노는 농구 캠프를 열었다. 자신이 사랑하는 스포츠로 다리를 놓아 인종 간의 거리를 잠시나마 좁히기 위해서였다. 당시 농구 캠프에는 러셀의 뜻에 동감하는 몇몇 백인 가족의 자녀들도 참가해 피부색이 다른 아이들과 농구공을 주고받으며 교감했다. 

당시 러셀이 얼마나 큰 위험을 무릅쓰고 미시시피에 내려왔는지는 러셀과 찰스 에버스가 어떻게 그날 밤을 보냈는지에서 알 수 있다. 사실 러셀처럼 유명한 사람이 메드가 에버스의 죽음 이후 얼마 되지 않아 미시시피를 찾은 행동은 또 다른 백인 우월주의자를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그래서 앙심을 품은 백인 우월주의자가 메드가 에버스의 목숨을 앗아간 것처럼 언제 러셀을 공격할지 몰랐기 때문에 찰스 에버스가 밤새 러셀의 곁을 지켰는데, 인근 모텔에서 자신의 키보다 짧은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한 러셀과 같은 방에서 찰스 에버스는 의자에 앉아 소총을 무릎에 올려놓은 채 방문을 바라보며 쪽잠을 잤다. 

상당히 아찔한 밤이었지만, 찰스 에버스는 여전히 러셀과의 추억을 잊지 못하고 있다. 그는 2011년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다. 

“우리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식수대에서 물을 마실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화장실을 이용할 수 없었습니다. 우리는 흑인이라는 이유로 투표할 권리조차 가지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러셀과 같은 사람이 와서 우리와 어깨를 나란히 한 덕분에 우리는 이 멍청한 법이 언젠가는 바뀔 수 있다는 희망을 품을 수 있었습니다. 러셀은 우리의 곁에서 작은 변화를 직접 만들어낸 인물입니다. 러셀의 용기 덕분에 지금의 미시시피는 그가 왔던 1963년과는 완전히 다른 곳으로 변했습니다.”

지금 NBA에서 뛰고 있는 러셀의 후배들도 그의 선한 영향력을 보고 자란 덕분인지 흑인과 관련된 사회 문제에 대해서는 서슴없이 목소리를 낸다. 러셀도 이와 같은 행동에 박수를 보냈다. 2020년 조지 플로이드 사망 사건 이후 올랜도 버블에서 선수들과 코칭스태프가 경기 전 ‘Black Lives Matter’ 티셔츠를 입고 무릎을 꿇는 행동으로 자신들의 뜻을 전하자 러셀은 그의 SNS에 이런 글을 남겼다.

“1961년이었다면 나 역시 NBA 선수들이 어제 그랬던 것처럼 목소리를 냈을 겁니다. 이렇게 중요한 결정을 내리는 게 어떤 기분인지는 잘 압니다. 이 어린 친구들이 정말 자랑스럽네요. 옛날 생각이 많이 나는 하루입니다.”

 

자유의 메달

2011년 2월, 러셀은 백악관에 초청받아 당시 미국 대통령이었던 버락 오바마로부터 스포츠 문화 발전에 기여한 공로를 인정받아 대통령 훈장(Medal of Freedom)을 받았다. 미국 프로 스포츠 최초의 흑인 감독이 미국의 첫 유색인종 대통령으로부터 훈장을 받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다음은 오바마 전 대통령이 러셀에게 메달을 건네기 전에 사람들 앞에서 그를 설명한 내용이다. 

“빌 러셀은 샌프란시스코 대학에서 팀을 두 번이나 우승으로 이끌었고, 보스턴 셀틱스에서 13시즌 동안 뛰면서 11번이나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그 어떤 스포츠에서도 필적할 상대가 없는, 그야말로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기록이죠. 심지어 그중 두 번은 선수와 감독직을 병행하면서도 일궈냈어요. 공교롭게도 그는 처음으로 메이저 프로 스포츠 리그 구단의 감독을 지낸 첫 아프리카계 미국인이었습니다. 또한, 동시대의 다른 어떤 운동선수들보다도 ‘승자(Winner)’라는 단어가 가장 잘 어울리는 선수였습니다. 그렇다 하더라도 누군가 6피트 9인치의 러셀을 올려다보며 ‘당신은 농구선수인가요?’라고 물어보면 러셀은 그때마다 아니라고 대답했습니다. 대신 그는 자신을 이렇게 설명했죠. ‘농구 선수’가 아니라, ‘농구를 하는 한 인간’으로요. 빌 러셀은 인종에 상관없이 모두의 인권과 존엄성을 지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마틴 루터 킹과 함께 행진했고, 무하마드 알리의 곁을 지키며 그와 뜻을 공유했습니다. 한 식당이 보스턴의 흑인 선수들에게는 서빙할 수 없다며 그들을 거절했을 때, 러셀은 예정된 경기에 출전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습니다. 그는 선수 생활 내내 각종 모욕과 반달리즘을 견뎌내면서도 항상 자신이 사랑하는 팀 동료들을 위해 집중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모두가 우러러볼 눈부신 커리어를 완성했습니다. 러셀이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가 달성한 업적을 따라오기는커녕 그전에 모두 나가떨어졌을 것입니다. 훗날 보스턴 거리를 걷는 아이들이 러셀의 동상을 보면 그를 단순히 선수로만 기억하는 게 아니라 그를 한 인간으로 떠올렸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러셀은 많은 이들의 박수 속에 메달을 목에 걸었다. 메달을 직접 수여하기 위해 나선 오바마 전 대통령을 위해 키를 낮춰주는 사소한 배려만 봐도 그가 얼마나 따뜻한 사람인지를 알 수 있다. 

 

사진 = 로이터/뉴스1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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