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9년 창단한 올랜도는 샤킬 오닐, 드와이트 하워드라는 1순위 빅맨과 함께 했다. 그리고 1순위 빅맨들이 활약하던 시기의 올랜도는 강력한 전력을 구축함과 동시에 파이널에 진출했다. 둘 외에도 ’화려한 비행‘ 페니 하더웨이, 득점 머신 트레이시 맥그레이디도 올랜도 팬들의 마음을 녹였던 슈퍼스타들이다. 창단 후 33년이 지난 가운데 올랜도에서는 어떤 슈퍼스타들이 족적을 남겼을까?

첫 번째 1순위 샤킬 오닐, 그리고 페니 하더웨이 

1989-1990년부터 리그에 뛰어든 올랜도 매직은 여타 신입 팀들이 그렇듯 창단 초기에는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첫 3시즌 동안 도합 70승에 그쳤던 올랜도다. 

올랜도가 위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팀을 끌어줄 수 있는 수준급 선수가 필요했다. 그리고 올랜도는 1992년 드래프트에서 그러한 기둥을 얻었다. 당시 구단 역사상 최초로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한 올랜도는 루이지애나 대학의 특급 센터 샤킬 오닐을 지명했다. 

훗날 자신을 MDE(Most Dominant Ever)라 칭할 정도로 압도적인 괴력을 과시한 오닐의 가세는 올랜도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오닐이 합류한 첫 해인 1992-1993시즌, 올랜도는 41승 41패를 올리며 처음으로 5할 승률을 기록한 채 시즌을 마무리했다. 비록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는 못했지만, 미래에 대한 가능성을 확인한 시즌이었다. 

젊고 활기 넘쳤던 오닐은 데뷔 시즌 평균 23.4점 13.9리바운드를 기록하며 기대치에 제대로 부응했다. 팀의 전술은 그를 중심으로 변했고, 골밑을 지배한 오닐은 신인왕을 거머쥐었음은 물론, MVP 투표에서 7위에 오를 정도로 존재감을 드러냈다.

오닐을 얻은 올랜도는 이어진 1993년 드래프트에서도 행운이 이어졌다. 2년 연속 1순위 지명권을 확보하게 된 것이다. 올랜도는 1순위로 미시간 대학 출신 파워포워드 크리스 웨버를 뽑았는데, 웨버는 드래프트가 끝난 후 3순위로 지명된 가드 페니 하더웨이와 트레이드됐다. 오닐과의 조합을 고려한 선택이었다.

201cm의 장신 가드였던 페니는 큰 키에 탁월한 득점력을 보유했고, 동료를 살려주는 어시스트 능력도 준수했다. 데뷔 시즌 초반에는 슈팅 가드로 출발했지만, 스캇 스카일스로부터 포인트가드 자리를 넘겨받고 팀의 야전사령관으로 활약했다.

페니와 오닐이 뭉친 1993-1994시즌, 올랜도는 제대로 날아올랐다. NBA 상륙을 마친 오닐은 본격적으로 리그를 폭격하기 시작했고, 평균 29.3점 13.2리바운드를 쏟아내며 역대급 2년 차 시즌을 보냈다. 게다가 평균 39.8분을 뛰면서도 81경기에 출전했으니 내구성까지도 완벽했던 오닐이다. 

오닐을 앞세운 올랜도는 정규시즌 50승을 수확하며 창단 첫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다. 1라운드에서 만난 상대는 레지 밀러가 버티는 인디애나. 올랜도는 젊음의 패기로 인디애나에 맞섰으나 1차전에서 1점 차, 2차전에서 2점 차로 패하는 등 아쉬움을 남긴 끝에 3연패로 첫 플레이오프를 마무리했다.

플레이오프에서 실패를 맛본 올랜도는 이어진 1994-1995시즌에 더 강해졌다. 시카고의 쓰리핏 멤버였던 호레이스 그랜트를 FA로 영입했고, 페니에게 주전 포인트가드 자리를 내준 스카일스를 정리했다. 샤크-페니라는 두 코어와 더불어 그랜트, 닉 앤더슨, 데니스 스캇까지 화려한 주전 라인업이 구성됐다.

포인트가드로 시즌을 시작한 페니는 2년 차에 절정의 기량을 과시했다. 평균 20.9점 7.2어시스트 4.4리바운드를 기록한 페니는 폭발적인 인기를 끌기 시작했고, 올스타 스타터로 선발되는 기쁨까지 더했다. 여기에 올랜도의 승승장구를 이끌면서 올-NBA 퍼스트 팀까지 그의 손에 들어왔다. 

오닐의 위력 또한 여전히 건재했다. 변함없이 골밑을 폭격한 오닐은 이전과 같은 득점력을 이어갔고, 직전 시즌에 아쉽게 놓쳤던 득점왕 타이틀을 따냈다. 1995년과 2000년에 득점왕을 따낸 오닐 이후 득점 선두에 오른 것은 2022년의 조엘 엠비드가 유일할 정도로 센터 득점왕은 흔치 않은 일이다.

페니와 오닐이 중심을 잡은 올랜도는 1번 시드를 따내며 기대감을 높였다. 이후 1라운드에서 보스턴을 격파한 올랜도의 2라운드 상대는 마이클 조던이 복귀한 시카고. 야구를 하다가 시즌 도중에 돌아온 농구 황제는 아직 본 모습을 찾기 전이었고, 올랜도가 5차전과 6차전을 내리 따내며 컨퍼런스 파이널 티켓을 가져왔다. 

컨퍼런스 파이널에 오른 올랜도는 직전 해 쓰라린 패배를 안겼던 인디애나와 재회했다. 올랜도가 첫 2경기를 잡아내며 무난하게 설욕하는 듯했으나, 인디애나도 쉽게 물러나지 않았다. 7차전까지 가는 혈전을 치른 올랜도는 7차전에서 예상외의 낙승을 거두며 파이널 진출에 성공했다. 

파이널에서 올랜도가 격돌한 상대는 하킴 올라주원이 버티는 디펜딩 챔피언 휴스턴. 정규시즌 동안 삐걱거렸던 휴스턴은 2라운드에서 찰스 바클리의 피닉스에 1승 3패로 몰리며 탈락 위기에 빠졌으나, 기적적으로 부활하며 여세를 몰아 파이널까지 올랐다. 양 팀의 파이널 매치는 오닐과 하킴 올라주원의 정상급 센터 매치로 많은 관심을 끌었다.

젊음의 오닐과 관록의 올라주원의 만남에서 웃은 쪽은 올라주원이었다. 오닐(시리즈 평균 28.0점 12.5리바운드)도 물론 좋은 활약을 펼쳤으나, 올라주원(시리즈 평균 32.8점 11.5리바운드)의 미친 퍼포먼스를 따라가기엔 역부족이었다. 

오닐이 올라주원에게 밀린 올랜도는 허무하게 4경기를 모두 패하며 스윕을 당하고 말았다. 1차전 승부처에서 믿었던 앤더슨이 자유투 4개를 연속으로 놓친 것이 뼈아팠다.

이어진 1995-1996시즌, 절치부심한 올랜도는 더 강해졌다. 오닐이 부상으로 고생하긴 했지만, 비시즌의 알찬 영입과 하더웨이 등의 맹활약으로 메웠다. 막강한 전력을 과시한 올랜도는 60승 22패를 올리며 플레이오프를 밟았다. 60승은 지금도 깨지지 않고 있는 올랜도의 정규시즌 최다승 기록이다.

하지만 해당 시즌 동부 컨퍼런스에는 올랜도보다 더 무서웠던 팀이 있었다. 바로 복귀 후 첫 시즌에서 올랜도에 막히며 복수를 다짐했던 마이클 조던의 시카고. 제대로 칼을 간 시카고는 72승을 쏟아내며 NBA 최다승 기록을 갈아치웠다.

올랜도는 순조롭게 컨퍼런스 파이널 무대에 오르며 시카고와 맞붙었지만, 힘의 차이를 극복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압도적이었던 시카고는 올랜도를 4전 전승으로 잠재운 뒤 파이널까지 승리하며 왕좌에 복귀했다. 휴스턴과 시카고에 2년 연속 스윕패를 당한 것은 오닐의 커리어에서 큰 오점으로 남게 됐다. 

절정의 시기에 번번이 우승에 실패하던 올랜도는 1996년 여름에 큰 변화를 맞았다. 프랜차이즈의 중심으로 활약하던 오닐이 팀을 떠난 것. 오닐이 할리우드가 있는 레이커스로 이적하면서 팀은 페니를 중심으로 전력을 다시 구성하게 됐다.

레이커스로 이적한 오닐은 이미 잘 알려진 대로 코비 브라이언트와 합을 이뤄 쓰리핏을 달성했다. 오닐과 코비는 리그 역사에 남을만한 최고의 원투펀치. 오닐과 함께 레이커스는 리그 최고 명문의 위상을 되찾으며 장기 집권에 성공했다.

레이커스를 떠난 뒤 마이애미로 팀을 옮긴 오닐은 신성 드웨인 웨이드와 함께 또 하나의 우승을 이뤄냈다. 이후 여러 팀을 옮겨 다닌 뒤 은퇴한 오닐은 해설위원으로 활약하며 만능 엔터테이너로서의 매력을 발산하고 있다.

오닐과 결별한 페니는 1996-1997시즌, 부상으로 많은 경기에 빠졌으나 팀을 진두지휘하며 4년 연속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다. 강호 마이애미와 만난 1라운드에서는 평균 31.0점을 몰아치며 상대 감독도 감탄할 퍼포먼스를 펼쳤으나, 전력 차를 극복하지 못하고 아쉽게 2승 3패로 시즌을 마쳤다.

플레이오프에서의 엄청난 활약과 더불어 페니는 미래가 더 기대되는 선수로 관심을 모았지만, 몰락의 길이 시작됐다. 많은 선수의 농구 인생을 무너뜨렸던 부상이 페니의 발목도 잡았다. 1997-1998시즌 무릎 부상으로 15경기 출전에 그친 페니는 운동능력 등에서 급격한 기량 저하를 경험하며 이전의 퍼포먼스를 재현하지 못했다.

결국 올랜도는 부상으로 내리막을 걷는 페니를 포기하기로 결정했다. 피닉스로 팀을 옮긴 페니는 이적 첫 시즌 나쁘지 않은 활약을 펼쳤지만, 그것이 마지막 불꽃이었다. 무릎 상태가 심각해진 페니는 2번째 수술을 받았고, 고연봉 저효율 선수가 되고 말았다. 부상으로 인해 전성기가 너무 빨리 끝난 페니는 불운했던 재능의 대표적인 예시로 자주 소개되는 선수다.

‘동티맥 서코비’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페니와 샤크가 떠난 후 올랜도는 간신히 5할 승률을 유지하며 중위권 팀으로 남아 있었다. 새로운 스타를 갈망하던 올랜도 팬들에게 새롭게 떠오른 별은 ‘티맥’ 트레이시 맥그레이디였다. 

1997년 드래프트 전체 9순위로 토론토에 지명된 맥그레이디는 잠재력은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았지만, 데뷔 초에는 그다지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첫 두 시즌은 모두 벤치 멤버로 뛰었고, 3년 차 시즌이 돼서야 주전으로 출전하는 빈도가 늘어났다.

서서히 올라오기 시작한 맥그레이디는 빈스 카터가 있었던 토론토를 떠나기로 결정했고, 올랜도에 새롭게 둥지를 틀었다. 당시 올랜도는 맥그레이디와 더불어 그랜트 힐, 팀 던컨의 영입까지 노렸으나 던컨이 샌안토니오에 잔류하며 맥그레이디-힐 듀오를 구축한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럼에도 올랜도 팬들은 맥그레이디와 힐의 조합에 대해 많은 기대를 보냈다.

올랜도에서 확실한 에이스 롤을 부여받은 맥그레이디는 날개를 단 듯 순항했다. 77경기를 모두 선발로 뛴 맥그레이디는 평균 26.8점 7.5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첫 시즌 만에 올랜도의 간판스타로 자리매김했다. 올스타 선발과 올-NBA 세컨드 팀 선정, 기량 발전상 수상까지 맥그레이디를 따라왔다.

커리어의 새로운 문을 연 맥그레이디는 2001-2002시즌에는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며 맹활약을 이어갔다. 폭발적인 운동능력은 물론, 올랜도 이적 후 3점 성공률까지 큰 발전을 이룬 맥그레이디를 막는 것은 힘든 미션이었다. 서부의 코비와 라이벌 슈팅 가드 구도를 형성하며 ‘동티맥 서코비’라는 말이 나오기도 했다.

2002-2003시즌은 완벽한 맥그레이디의 커리어-하이 시즌이었다. 생애 최초로 평균 30점 고지를 돌파한 맥그레이디(32.3점)는 당시 기준 NBA 최연소 득점왕에 올랐다. 

하지만 맥그레이디의 고군분투가 팀의 성적으로 직결되지는 못했다. 맥그레이디와 함께 올랜도 유니폼을 입은 힐이 지독한 부상 잔혹사에 시달리며 제 기량을 펼치지 못한 것이 뼈아팠다. 7년 9,300만 달러에 올랜도와 계약한 힐은 올랜도 유니폼을 입은 첫 3시즌에 47경기 출전에 그쳤다. 올랜도가 3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힐은 한 경기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지원군이 부족했던 맥그레이디는 플레이오프에서 2라운드 무대를 밟지 못하는 불운을 겪었다. 첫 2시즌에는 밀워키와 샬럿에 무릎을 꿇었고, 최전성기였던 2002-2003시즌에는 디트로이트를 상대로 아쉽게 패했다. 3승 1패를 기록하며 이번에는 마침내 1라운드를 뚫는 듯했지만, 체력이 떨어진 맥그레이디가 천시 빌럽스에게 밀리면서 거짓말같이 3연패를 당했다.

이어진 시즌은 올랜도와 맥그레이디가 함께 한 마지막 시즌이었다. 여전한 득점력을 과시한 맥그레이디는 한 경기에 62점을 기록하기도 하면서 2년 연속 득점왕을 차지했지만, 팀의 추락을 막지 못했다. 올랜도는 맥그레이디의 존재에도 21승 61패에 머물며 최악의 시즌을 보냈다.

정상급 스타였던 맥그레이디는 약체가 된 올랜도에 더 머물고 싶지 않았다. 이미 시즌 도중에 팀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며 이적에 대한 뉘앙스를 풍겼던 맥그레이디다. 우승에 대한 갈망이 컸던 맥그레이디는 2004년 휴스턴으로 이적하며 올랜도를 떠났다.

휴스턴으로 이적한 맥그레이디는 장신 센터 야오밍과 호흡을 맞추며 정상에 도전했다. 이적 첫 시즌에는 33초 동안 13점을 넣는 믿기 힘든 활약으로 ‘티맥 타임’을 연출하기도 했다. 

하지만 맥그레이디에게 플레이오프의 벽은 여전히 높았다. 야오밍과 힘을 합쳤음에도 맥그레이디는 2라운드의 맛을 보지 못했다. 내구성에 문제가 생긴 두 선수는 부상으로 코트를 비우는 시간이 적지 않았고, 결국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한 채 헤어졌다. 맥그레이디가 뛰던 시절 휴스턴이 유일하게 2라운드에 진출했던 2008-2009시즌에는 맥그레이디가 부상으로 플레이오프에 출전하지 못했다.

부상으로 내리막에 돌입한 맥그레이디는 이후 뉴욕, 디트로이트 등을 거친 뒤 중국리그까지 경험했다. 소속팀 없이 오랜 시간을 보내다가 2012-2013시즌 막판 샌안토니오에 합류하며 우승 반지를 노렸으나 그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부상 탓에 아쉬운 말년을 보낸 맥그레이디는 샌안토니오 생활을 마지막으로 현역 은퇴를 선언했다. 

‘슈퍼맨‘ 드와이트 하워드, 그 후...

맥그레이디의 마지막 시즌이었던 2003-2004시즌, 하위권으로 추락한 올랜도는 로터리 추첨에서 1순위 지명권을 얻었다. 1순위를 두고 2명의 빅맨이 물망에 올랐는데, NCAA 무대를 제패한 코네티컷 대학 출신의 에메카 오카포, 고졸 유망주 드와이트 하워드였다.

맥그레이디는 대학 무대를 거치면서 더 많은 경험을 쌓은 오카포를 지명하길 원했지만, 잠재력을 더 우선시한 올랜도 구단은 하워드를 선택했다. 맥그레이디의 시대가 끝나고 올랜도가 새로운 닻을 올리는 순간이었다.

신인왕은 오카포에게 넘어갔지만, 하워드는 데뷔 시즌 전 경기 출전에 평균 더블-더블을 기록하며 자신의 잠재력을 입증했다. 성장세를 이어간 하워드는 3년 차 시즌부터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으며 프랜차이즈를 다시 일으켰다.

긴 팔과 단단한 체격, 압도적인 힘과 더불어 빅맨치고는 놀라울 정도로 빨랐던 하워드는 공격보다는 수비에서 존재감이 더 컸던 선수다. 그는 리그 최고의 리바운더 중 하나였고, 미스매치를 두려워하지 않는 빅맨이었다. 슈팅 능력을 끝내 장착하지 못한 것이 아쉬웠지만, 그래도 가지고 있는 재능이 너무나 훌륭했다. 

하워드를 확실한 코어로 결정한 올랜도는 그를 중심으로 팀을 구축했다. 브라이언 힐 감독이 물러나고 스탠 밴 건디가 사령탑에 선임됐고, 라인업에는 하워드의 장점을 최대한 살릴 수 있는 슈팅력 좋은 선수들이 대거 포진했다. 히도 터클루, 라샤드 루이스, 자미어 넬슨, J.J. 레딕이 올랜도 양궁 부대의 일원이었다.

양궁 부대의 허점이 클 수도 있었지만, 하워드의 넓은 수비 범위와 리바운드 장악력, 왕성한 활동량으로 올랜도는 단단한 수비팀이 됐다. 전성기의 하워드는 ‘킹’ 르브론 제임스와 유일하게 1대1 트레이드가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을 정도로 뛰어난 선수였다.

양궁 부대와 최고의 방패인 하워드를 조합한 올랜도는 밴 건디 감독의 첫해였던 2007-2008시즌, 52승을 기록하며 강호로 도약했다. 직전 시즌 3점 라인에서 리그 최악의 생산력을 보였던 올랜도는 3점 성공 1위, 성공률 3위를 기록하며 최고의 외곽포를 장착했다.

기세를 탄 올랜도는 플레이오프에서 맥그레이디의 시대에 지독하게 넘지 못했던 1라운드의 벽을 넘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2라운드에서는 디트로이트에 패하며 시즌을 끝냈다.

차근차근 단계를 밟은 올랜도는 이어진 시즌에 더욱 강해져서 돌아왔다. 양궁 부대의 위력은 여전했고, 수비는 더 견고해지면서 디펜시브 레이팅 리그 1위에 올랐다. 2년 연속 올-NBA 팀에 오른 하워드는 생애 첫 올해의 수비수까지 차지하며 잊을 수 없는 시간을 보냈다.

플레이오프의 여정은 쉽지 않았다. 1라운드에서 필라델피아를 6차전 만에 잡아낸 올랜도는 2라운드에서 디펜딩 챔피언 보스턴을 만났다. 케빈 가넷이 부상으로 빠졌지만, 보스턴의 저력은 강했다. 7차전까지 가는 대혈투를 벌인 하워드의 올랜도는 힘겹게 컨퍼런스 파이널 티켓을 쟁취했다.

보스턴을 넘은 뒤로는 르브론의 클리블랜드가 올랜도를 기다리고 있었다. 올랜도는 1차전에서 라샤드 루이스의 결정적인 3점슛으로 신승을 거뒀으나, 2차전에 터진 르브론의 끝내기 버저비터로 동점을 허용했다. 하지만 홈에서 열린 3, 4차전을 내리 따내며 승기를 가져온 올랜도는 6차전에서 하워드가 40점을 몰아치는 대활약을 펼친 끝에 르브론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쉽지 않은 길을 걸은 올랜도가 파이널에서 만난 팀은 코비와 파우 가솔이 버티는 레이커스. 이번에야말로 창단 첫 우승을 차지하겠다는 결의로 파이널에 나선 올랜도였지만, 힘이 부족했다. 빈공에 시달린 끝에 1차전에 완패한 올랜도는 2차전 들어 라샤드 루이스가 분전했으나 연장 접전 끝에 경기를 내주고 말았다.

파이널은 이름값 대비 득점 기술이 부족했던 하워드에 대한 아쉬움이 드러난 무대이기도 했다. 상대 에이스 코비는 시리즈 내내 득점쇼를 펼치며 올랜도를 폭격했고, 한계를 보인 올랜도는 1승 4패에 머물며 또다시 우승 도전에 실패했다.

물론 핵심 전력이 건재했기에 올랜도는 이어진 시즌에도 강했다. 금강불괴 하워드 또한 꾸준히 코트를 밟으며 2년 연속 올해의 수비수를 차지했다. 골밑의 수호신 하워드가 든든하게 버틴 올랜도는 샬럿과 애틀랜타를 가볍게 누르고 컨퍼런스 파이널에 진출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보스턴이 올랜도보다 더 매서웠다. 설욕전에 나선 보스턴은 시리즈 초반부터 올랜도를 몰아쳤고, 올랜도는 첫 3경기를 모두 내주며 그로기 상태에 몰렸다. 이후 2연승을 거두긴 했지만 기울었던 전세를 뒤집기엔 역부족이었다.

올랜도 시절 하워드가 쌓은 수상 실적은 대단했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올해의 수비수를 싹쓸이했고, 2008년부터 5년 연속 올-NBA 퍼스트팀 센터 자리를 차지했다. 슈퍼맨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은 활약이었다.

그러나 하워드의 뒤를 받치는 양궁 부대의 전투력이 약해지면서 올랜도는 점점 힘이 빠졌다. 데뷔 첫 7시즌 동안 도합 7경기에만 결장하며 철인과 같은 모습을 보인 하워드도 2011-2012시즌에는 처음으로 10경기 이상 빠지면서 삐끗했다. 그 결과 올랜도는 2년 연속 1라운드 탈락으로 리그 정상과 거리가 멀어지고 말았다.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한 하워드는 2011-2012시즌이 시작되기 전부터 구단에 전력 보강을 해달라는 압박을 넣기 시작했다. 어쩌면 2011-2012시즌의 실패는 당연했다. 시즌 내내 팀이 하워드의 트레이드 소문 속에 어수선한 시간을 보냈기 때문이다. 하워드는 팀이 무기력하게 패배하자 포스트게임 인터뷰에서 동료들을 향해 비판의 시선을 보내기도 했다.

장기 드라마로 방영된 ‘하워드라마’는 1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올랜도 팬들을 괴롭혔고, 결국 2012년 여름, 하워드의 행선지가 레이커스로 결정됐다. 4개 팀이 포함된 다각 트레이드로 하워드가 떠났고, 올랜도는 지명권과 유망주들을 확보하며 개편에 돌입했다. 또다시 올랜도 출신 1순위 선수가 레이커스로 이적하게 된 것이다. 

올랜도를 떠난 하워드는 레이커스에서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낸 끝에 1년 만에 팀을 떠났다. 하지만 휴스턴에서도 하워드는 원만하지 못한 행보를 보였고, 점점 리그 내에서 입지가 줄어들었다. 휴스턴을 떠난 이후에는 시즌이 바뀔 때마다 팀을 옮기는 저니맨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리그에서 밀려날 위기에 처한 하워드는 2019-2020시즌을 앞두고 레이커스로 복귀, 팀에 헌신적인 스타일의 선수로 완벽하게 탈바꿈했다. 골밑에서는 허슬 플레이와 거친 몸싸움을 꺼리지 않았고, 코트 밖에서는 응원 단장 역할을 자처했다. 그 결과 생애 첫 파이널 우승 반지를 획득했다.

하워드가 떠난 후 올랜도는 구단 역사상 가장 긴 암흑기를 보냈다. 암흑기를 끝낸 주역은 하워드라마의 유산이었던 빅맨 니콜라 부세비치. 유럽 출신의 빅맨 부세비치는 이전의 오닐, 하워드와는 달리 슈팅력을 갖춘 스타일이었고, 팀이 7년 만에 다시 플레이오프에 오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부세비치의 올랜도는 플레이오프에서 높게 날아오르지 못했다. 2년 연속 1라운드에 진출했지만, 상위 시드 팀과 현격한 격차를 보이며 탈락한 올랜도는 2020-2021시즌 주축 선수들의 부상이 속출하며 다시 추락했다. 

결국 올랜도는 부세비치를 비롯해 애런 고든, 에반 포니에 등을 내보내며 빠르게 리빌딩에 돌입하는 결단을 내렸다. 시카고로 트레이드된 부세비치는 웬델 카터 주니어와 2장의 1라운드 지명권을 남겼다. 어두운 시기를 보내고 있지만, 뛰어난 잠재력을 보유한 유망주들을 다수 수집하며 미래에 대한 희망을 이어가고 있는 올랜도다. 

사진 = 로이터/뉴스1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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