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 둥지를 떠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김단비에게 신한은행은 15년을 함께 한 역사 그 자체였다. 인생의 절반 가까이를 신한은행에서만 보냈다. 그래서 그의 이적은 갑작스러웠던 만큼 충격적이었다.

'우리은행 김단비'. 이 글을 쓰는 순간에도 필자는 이 말이 아직 입에 붙지 않는다. 오랫동안 김단비를 지켜봐온 팬들 역시 마찬가지이리라. 하지만 이제는 냉정하게 이 변화를 받아들여야 할 때다. 김단비 스스로가 내린, 농구인생의 중대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할 만큼 했다는 알을 깬 순간

김단비는 2007년 드래프트에서 전체 2순위로 지명되며 신한은행 유니폼을 입었다. 처음에는 존재감 약한 유망주에 불과했다. 당시 신한은행엔 전주원, 정선민 등 대단한 선배들이 가득했다. 만 20살도 되지 않은 어린 선수에겐 낯설고 어려운 환경이었다. 하지만 김단비는 꾸준한 성장을 일궈냈다. 퓨처스 리그를 지배하고, 팀 내 핵심 식스맨이 되고, 어엿한 주전 포워드가 됐다. 그동안 신한은행은 리그 5연패에 성공했다. 김단비는 여자농구 역사에 남을 왕조의 일원이었다.

김단비는 농구 팬들 사이에서 '여자 르브론'으로 통한다. 그만큼 다재다능해서다. 득점, 패스, 볼 운반, 수비까지 못하는 게 없다. 처음에는 출전 기회를 얻기 위해,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 '내 몫'을 찾기 위해 수비부터 집중했던 것이 그를 리그를 대표하는 '공수 겸장'으로 만들었다. 그는 이제 신한은행을 넘어 한국을 대표하는 포워드가 됐다.

15년. 강산이 한 번 하고도 반이나 변하는 세월이다. 아니, 요즘 같은 세상이라면 세 번쯤 변한다고 표현해도 될 것 같다. 김단비는 그 세월을 신한은행에서 보냈다. 김단비하면 신한은행이었고, 신한은행하면 김단비였다. 위대한 선배들을 뒤이은 신한은행의 상징 그 자체였다.

그런 김단비에게 올해 FA 선언은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만들었다. 농구 인생을 살면서 단 한 번도 해보지 못했던 일. 이적이었다.

고민은 행동으로 이어졌다. 생각을 많이 곱씹었고 주변의 조언도 들었다. 순식간에 결정한, 충동적인 선택은 결코 아니었다.

4년에 연봉 총액 4억 5천. 김단비의 이적은 여자농구 판도 변화를 예고하는 신호탄이었다. 그 신호탄과 함께 김단비는 생애 처음으로 유니폼을 갈아 입었다.

"고민이 많았어요. 아직도 내 선택이 옳았는지를 되돌아보게 돼요." 김단비가 입을 열었다.

"그래도 제가 직접 한 선택이잖아요.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그리고 워낙 위성우 감독님과 전주원 코치님을 믿고 있기 때문에, 지난 시즌보다 더 나은 시즌을 보낼 거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위성우 감독님이 직접 전화를 주셨어요. '내가 너랑은 다시 만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번에 FA 규정이 바뀌면서 기회가 다시 생긴 것 같다'고 하셨어요. '어릴 때도 함께 했지만 마지막도 꼭 함께 하고 싶다'는 얘기도 해주셨죠."

위성우 감독의 연락은 곧 번민으로 이어졌다. 우승. 김단비에겐 이미 숱하게 경험해본 영광이었다. 동시에 오랫동안 맛보지 못했던 일이기도 했다.

'우승은 해볼만큼 해봤다'는 생각이 '이젠 플레이오프에만 만족할 수 없겠다'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마침 우리은행엔 김단비의 프로 초년생 시절을 함께 한 위성우 감독과 전주원 코치가 있었다. 김단비의 마음이 움직이는 순간이었다.

"우승에 좀 더 도전해볼 수 있는 팀에서 뛰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했어요. 이미 우리은행에 워낙 좋은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그 선수들의 버프를 받으면 제가 더 잘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도 했고요. 감독님, 코치님 모두 제 프로 생활을 처음부터 같이 한 분들이셨어요. 그만큼 제 마무리도 잘 도와주실 거라는 생각을 했어요."

"그동안 우승을 꼭 해야겠다는 생각이 딱히 없었던 것이 사실이에요. 우승을 많이 해봤었으니까요. '우승은 해볼 만큼 해봤다'라는 생각을 많이 했었는데 어느새 은퇴를 앞두는 나이가 됐더라고요. 은퇴가 점점 다가 오는 상황에서 스스로 생각했을 때 '플레이오프에만 만족할 수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어요. 우리은행은 은퇴하는 날까지 제 기량이 떨어지고 어떻게 되든 책임져줄 거라고 생각하면서 이적을 결심했죠."

 

우리는 아직도 네가 낯설다

장위동 체육관에서 소속 팀 훈련. 김단비에겐 단 한 번도 없었던 일이었다. 그 일이 6월 14일부터 비로소 시작됐다. 우리은행 선수들도 김단비의 합류가 아직 낯설기는 마찬가지였다.

"감독님도 '훈련장에 네가 있는 게 어색하다'고 하시더라고요.(웃음) 저나 다른 선수들도 지금 대표팀에서 같이 운동하는 기분이고 서로 이게 대표팀 운동인지 프로 팀인지 모르겠다면서 헷갈려하고 있어요. 그 정도로 아직은 우리은행 선수들과 같이 운동하는 게 낯설어요. 다만 감독님, 코치님 모두 오랫동안 봐왔던 분들이고 함께 했던 시간들이 있어서 어색하거나 그런 건 없고요."

김단비를 품은 우리은행은 순식간에 우승에 도전할 수 있는 전력을 구축했다. 물론 그동안에도 우리은행은 꾸준히 우승에 도전해온 강팀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서서히 전력이 불안해졌고, 한계도 마주했던 것이 사실. 국가대표 포워드 김단비의 합류는 만족스럽지 않았던 그 흐름을 단숨에 바꿔 놓았다. 박혜진, 박지현, 김정은, 그리고 김단비. 이제 우리은행은 다시 한 번 우승을 정조준하는 팀이 됐다.

"(박)혜진이는 대표팀에서 같이 뛰었을 때도 여러모로 워낙 많은 도움을 줬던 선수예요." 박혜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김단비가 기다렸다는 듯이 입을 열었다.

"수비도 좋고 공격도 워낙 좋은 선수이기 때문에 혜진이와 뛰면 저한테 도움 수비가 좀 적게 오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어요. 제가 거기서 파생되는 걸 받아먹을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요. 혜진이가 소집되고 나서 저한테 묻더라고요. '나도 이제 받아먹어도 되는 거야?'라고요. 그래서 저도 '아니, 나도 너한테 받아 먹으러 왔어'라고 했어요.(웃음) 장난식으로 서로 그런 얘기를 많이 해요. 아직 다 같이 농구 훈련을 제대로 하진 않았지만 우리은행에 왔기 때문에 분명 기대되는 부분이 있어요.  어떻게 될지 기대가 많이 돼요."

박혜진이 새로운 원투 펀치 파트너라면, 김정은은 든든한 기둥 같은 존재다. 이적을 고민하던 김단비에게 김정은은 농구 인생의 선배로서 따뜻한 조언을 건넸다. 김정은의 조언에 김단비는 더 과감하게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김)정은 언니도 워낙 오랜 시간 동안 다른 팀에서 뛰다가 우리은행에 왔었잖아요. 그래서인지 저한테 도움을 많이 주셨어요. 저 스스로도 팀을 옮기는 것에 대해 부담감이 있었는데, 정은 언니가 조언을 많이 해준 덕분에 결정을 내릴 수 있었어요. 언니가 우리가 같이 뛰면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라는 얘기도 해줬었고요."

우리은행이 우승에 도전한다는 것은, 곧 디펜딩 챔피언 KB에 도전장을 내밀었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한다. 국가대표 박지수, 강이슬이 버티는 KB는 지난 시즌을 압도적인 페이스로 지배했다. KB의 아성은 곧 우리은행이 넘어야 할 가장 큰 벽이다.

강이슬은 김단비의 우리은행 이적이 발표된 후 "우리 팀이 조금 곤란해지게 됐다. 저 역시 언니한테 절대 지지 않겠다"는 반응을 보였다.

"저도 그 인터뷰를 봤어요." 김단비가 웃으며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서 저도 (강)이슬이한테는 내가 간다고 해서 KB를 어떻게 이기겠냐 이런 식으로 농담을 많이 했었어요. 일단 저도 제가 왔다고 해서 우리은행이 무조건 우승한다고 장담할 수는 없어요. 하지만 도전은 해보고 싶어요. 저 역시 우승에 도전해보고 싶다는 생각, KB에 도전하고 싶은 마음으로 왔으니까요."

 

우리은행의 단비

우리은행하면 팬들, 관계자들 사이에서 공통적으로 떠오르는 이미지가 있다. 훈련량이 많은 팀이라는 이미지다.

김단비의 이적이 처음 알려지자 적지 않은 이들이 우려 섞인 목소리를 먼저 꺼냈다. 우리은행의 훈련을 김단비 같은 베테랑이 따라갈 수 있느냐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김단비는 "운동선수라면 당연히 훈련을 해야 한다"며 자신감을 보였다. 동시에 "감독님을 믿는다"며 웃어보였다.

"우리은행의 훈련량에 베테랑인 제가 힘들어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는 건 이해해요. 우리은행은 실제로 훈련랑이 많은 팀인 건 맞으니까요. 그런데 저는 운동선수라면 어느 정도의 훈련량을 가져가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감독님이 저한테 약속도 했어요. 옛날만큼 운동 많이 안 시키겠다고요.(웃음) 믿고 따라가봐야죠."

우리은행하면 떠오르는 또 다른 이미지는 수비 농구다. 지난 시즌에도 우리은행은 강력한 수비 조직력을 앞세운 농구를 펼쳤다. 위성우 감독 부임 이후 우리은행이 구축해온 꾸준한 농구 색깔이었다.

김단비는 신인 시절 '수비 잘하는 선수'로 먼저 이름을 날리며 자신의 입지를 키웠다. 그렇게 베테랑이 됐고 공격에서 역할이 점점 커져갔다. 김단비는 우리은행에서 "수비에 더 무게를 둘 것"이라며 색깔 변화를 예고했다.

"제가 어릴 때는 팀에 워낙 잘하는 언니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제가 공격만 할 수도 없었고, 일단 수비를 해야 뛸 수 있다는 이야기도 들었기 때문에 수비 생각만 하고 뛰었어요. 이제는 공수의 밸런스를 다시 맞추는 거죠. 너무 공격만 봐서는 안 될 거고 이제는 공수를 5대5 비율로 무게를 두고 해야 할 것 같아요."

"우리은행은 일단 수비를 우선으로 하는 팀이잖아요. 저도 상대해봤던 입장에서 우리은행의 수비는 되게 빡빡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게 있어요. 워낙 수비 조직력이 좋고 몸싸움도 강해요. 이 선수를 뚫어도 다음 선수가 또 튀어 나오죠. 그래서 저도 수비에 초점을 맞춰야 하지 않을까 싶어요. 제가 그동안은 공격을 좀 더 우선 순위에 뒀다면, 이제는 수비에 더 무게를 두고 농구를 해야 할 것 같아요."

이적 첫 시즌에 어떤 목표가 있는지 물어봤다. 질문이 나오자 김단비가 망설임 없이 답을 꺼냈다. '김단비가 와서 별로다'라는 말은 절대 듣고 싶지 않다고 했다.

"팀을 옮겨온 첫 시즌에 '팀이 약해졌다', '김단비 별로다' 이런 얘기는 듣고 싶지 않아요. 그것보다는 '잘 선택했다', '역시 가서 잘할 줄 알았다' 이런 말을 듣고 싶어요. 아까도 얘기했지만 우리은행이 훈련량이 많고 운동이 힘든 걸 알면서 왜 우리은행으로 갔냐고 말하는 분들이 계세요. 그런데 막상 우리은행에 와보면 밖에서 보는 것보다 선수들이 많이 밝고 그렇거든요. 우리은행이 그저 운동이 힘든 팀이 아니고 굉장히 농구하기에 재밌는 팀이라는 걸 제가 보여드리고 싶어요."

"제 가치를 FA가 돼서 인정받으면서 팀을 옮기게 된 거잖아요. 우리은행 구단에 우선 너무 감사한 부분이 있죠. 제 가치를 확실히 인정해주신 거니까요. 그래서 저도 그만큼 코트에서 실력으로 보여드리는 게 확실한 보답이라고 생각해요."

"제가 온 이후로 우리은행 팬분들이 많이 반겨주셨어요.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했어요. 작년에는 상대로 만났지만 이제 우리은행 팬 분들과 한 팀이 된 거잖아요. 우리은행의 농구에 최대한 녹아들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테니까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셨으면 좋겠어요. 우리은행에 빨리 적응해서 지난 시즌보다 더 재밌는 농구를 팬 여러분께 보여드리고 싶습니다."

 

사진 = 이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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