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동환 기자] 조엘 엠비드는 신경전을 위해서만 코트에 서지 않는다. 그에겐 누구 앞에서도 당당할 수 있는 실력이 있다. 그래서 엠비드는 누군가에는 ‘밉상’이지만 누군가에겐 최고의 스타 플레이어다. 아프리카 농구 유망주들에겐 최고의 우상이다. 조엘 엠비드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자.

 

#1 성실한 배구 소년

조엘 엠비드는 1994년 3월 아프리카 카메룬의 수도 야운데(Yaoundé)에서 태어났다. 유복한 중산층 가정의 소년이었다. 아버지는 군부대 공무원이었다. 덕분에 엠비드는 가난을 겪지 않고 성장할 수 있었다.

“조엘은 부족한 것 없이 자란 아이였어요

“조엘의 책상엔 언제나 음식이 있었고 방엔 옷도 여러 벌 있었죠. 조엘이 다니던 학교도 시스템이 훌륭했어요. 어떤 트러블도 없었죠. 좋은 환경에서 자랐다고 봐도 될 것 같네요.” 엠비드의 아버지 토마스의 말이다.

가난은 없었지만 지루함은 있었다. 엠비드의 일상은 오로지 학업과 운동으로만 채워졌다. 아버지 토마스와 어머니 크리스틴은 엠비드를 엄격하게 키웠다. 엠비드는 착하고 순한 아이였다. 하루 종일 학업과 운동만 병행하는 환경에서도 별다른 투정 없이 부모님의 뜻에 따랐다. 학업이 워낙 어려워 애초에 다른 곳에 눈을 돌릴 여유가 없기도 했다. 엠비드는 “카메룬의 초등학교는 미국의 대학교 같다”며 당시를 돌이켜봤다.

“매일 일과가 이랬어요. 일단 아침에 일어납니다.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갑니다. 학교에서 아침 7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시간을 보내요. 수업이 모두 끝나면 집으로 뛰어 옵니다. 잠시 낮잠을 자고 저녁을 먹죠. 그 다음엔 다시 자정까지 공부만 하는 거예요.”

“솔직히 미국의 초등학교는 졸업하기 쉽잖아요. 카메룬은 말도 안 되게 어려워요. 초등학교가 무슨 미국의 대학교 같았다니까요. 어렸을 때 저는 친구가 한 명도 없었어요. 왜 그랬냐고요? 그때 제가 한 거라고는 자는 것과 숙제밖에 없었거든요.”

어린 엠비드가 처음 빠진 스포츠는 농구가 아니었다. 당시에도 카메룬은 축구 인기가 한창이었다. 엠비드는 미드필더를 맡았다. 어린 시절 축구를 통해 익힌 신체 균형 감각은 훗날 농구선수로서 성장하는 자양분이 된다.

초등학교 졸업 후 상황이 달라졌다. 키가 빠르게 자라버린 것. 또래에 비해 한 뼘 이상 컸다. 결국 엠비드는 종목을 바꿨다. 축구공을 차는 대신 배구공을 잡았다. 큰 키와 운동능력을 겸비한 엠비드는 재능 있는 배구 유망주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엠비드 본인도, 엠비드의 부모님도 배구 선수로서의 미래를 기대했다. 엠비드의 부모님은 아들이 성인이 되면 프랑스 같은 유럽 리그에서 프로 배구선수로 뛸 것이라 생각했다. 그때 엠비드의 나이 14살. 농구공을 만져본 적조차 없는 성실한 배구 소년의 삶이었다.

 

#2 슈팅 라이크 코비

삶은 한치 앞도 알 수 없다. 우연한 인연으로, 우연한 사건으로 방향이 송두리째 바뀌기도 한다. 조엘 엠비드도 그랬다.

만 15살이 되던 2009년, 엠비드의 미래를 완전히 바꾸는 사건이 일어난다. 사실 ‘사건’이라고 하기 민망할 정도로 별것 아닌 일상적인 일이었다.

그해 5월, 엠비드는 우연히 TV로 NBA 파이널 경기를 시청하게 됐다. LA 레이커스와 올랜도 매직의 경기였다. 유심히 경기를 지켜보던 엠비드는 레이커스의 한 선수에 푹 빠졌다. 코비 브라이언트였다.

“그해 파이널을 보면서 저는 코비의 빅 팬이 됐어요. 코비를 보면서 미국에 가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농구 선수로 꿈을 이루고 싶다는 생각을 했죠. 매일 밤마다 그 생각만 했던 것 같아요.”

결국 엠비드는 농구를 시작했다. 처음엔 아는 게 거의 없었다. 골대에 공을 넣으면 된다는 것만 아는 수준이었다. 규칙도 잘 몰랐고, 주변에 농구를 해본 친구도 없었다. 농구공조차 곧바로 구하기 어려웠다.

매일 배구 연습이 끝나면 엠비드는 혼자 학교 코트로 달려갔다. 몰래 가져온 배구공 하나를 꺼내 농구 골대에 던지며 코비를 따라했다. ‘농구 독학’이었다. 그물도 없고 림은 녹슬어 있었다. 허름한 림에 배구공을 던질 때마다 엠비드는 이렇게 외쳤다.

“코비!”

그러나 아버지 토마스는 엠비드가 농구를 하는 걸 반기지 않았다. 학업과 배구에 집중하길 바랐다. 무엇보다 농구가 엠비드에게 맞지 않는 운동이라 생각했다. 당시만 해도 엠비드는 키는 크지만 무척 마른 아이였다. 토마스는 농구가 아들에게 너무 격렬한 운동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엠비드는 이미 농구에 푹 빠져 있었다. 마치 ‘주경야독(晝耕夜讀)’을 하듯, 학교 수업과 배구 연습이 끝나면 코트로 달려가 농구만 했다. 당연히 아버지에겐 비밀이었다. 

“배구 연습이 끝나면 조엘은 혼자서 농구를 하곤 했어요.”

“농구 골대가 있는 곳에 가서 온종일 슛을 던져대다가 집에 왔죠. 그리고 저한테 이렇게 얘기했어요. ‘엄마, 제가 농구하는 거 아버지한테는 비밀이에요.’” 어머니 크리스틴의 회상이다.

시간이 흐르며 아버지 토마스의 마음도 결국 열렸다. 젊은 시절 농구를 했던 삼촌과 지인들의 조언이 결정적이었다. 엠비드의 삼촌은 토마스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우리 집안에 반드시 농구를 해야만 하는 아이가 있다. 그건 당연히 조엘이다.”

“농구 코치를 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몇 명 있었어요.” 토마스가 당시를 회상하며 입을 열었다.

“그 친구들이 조엘이 농구하는 걸 보더니 저한테 이렇게 말하더라고요. ‘네 아들은 정말 재능이 있어. 여기선 보기 드문 재능을 가진 아이 같아.’”

“결국 농구를 해도 좋다고 조엘에게 얘기했습니다. 네가 그렇게 농구가 하고 싶다면 농구를 제대로 시작해봐도 된다고 얘기했죠.”

엠비드가 비로소 농구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는 순간이었다.

 

#3 더 프로세스(The Process)

이 엠비드의 삶을 바꾼 결정적인 사건이 한 번 더 일어난다. 당시 카메룬 출신의 NBA 현역 선수였던 루크 음바무테가 자신의 이름으로 여는 여름 농구 캠프에 초대받은 것이다.

“어느날 저희 캠프 코치가 물어보더라고요. 조엘 엠비드라는 아이를 아냐고요. 그래서 이름은 알고 있다고 했죠. 코치가 이렇게 얘기했어요. ‘그 친구가 요즘 농구를 하고 있는데, 진짜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을 것 같아.’ 그 얘기를 듣자마자 엠비드를 우리 캠프에 초청하기로 했어요.” 음바무테의 말이다.

하지만 당시만 해도 엠비드는 농구에 자신이 없었다. 제대로 5대5 농구를 해본 적도, 제대로 된 코칭도 받아본 적이 없는 상태였다. 규칙도 완벽히 숙지하지 못했다.

실제로 캠프 첫 날 엠비드는 겁에 질린 나머지 아예 모습도 드러내지 않았다는 후문이다. 그러나 둘째 날 캠프에 등장한 엠비드의 플레이를 지켜본 음바무테는 금세 엠비드가 특별한 재능을 가졌다는 걸 알아챘다.

당시 16살이었던 엠비드의 키는 이미 207cm까지 자라 있었다. 배구 연습을 하며 익힌 탄력 덕분에 리바운드와 블록슛의 타점도 엄청났다.

캠프 마지막 날, 힘겹게 캠프 일정을 마친 엠비드에게 음바무테게 다가가 어깨를 두들겼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다.

“너는 이번 캠프 탑5 선수야.”

이후 엠비드는 NBA가 전세계 유망주 발굴을 위해 운영하는 ‘국경 없는 농구 캠프(Basketball Without Borders Camp)’에 초청됐다. 이 캠프에서도 두각을 드러낸 엠비드는 음바무테의 도움을 받아 미국 고등학교 진학을 결정했다. 음바무테의 모교였던 미국 플로리다주 몬트버테 아카데미였다.

미국에 건너간 후 엠비드에게 큰 고난이 찾아왔다. 당시 엠비드에겐 영어도, 농구도 너무 낯설었다. 그때 엠비드가 할 줄 아는 영어는 ‘굿 모닝(good moring)’이 전부였다. 농구도 시작한지 3개월 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모든 게 어렵고 생소했다. 16살 소년이 감당하기엔 너무 큰 벽이었다.

몬트버테 아카데미에서 보낸 첫 날, 엠비드는 아예 팀 훈련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학교에 간 첫 날부터 팀 훈련에 참가했는데 제가 농구를 너무 못해서 코치님이 체육관에서 절 내쫓았었어요.” 엠비드가 말했다.

“그때 저는 제가 도대체 뭘하고 있는지도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시키는 걸 따라하는 데 급급했죠. 그때 저는 정말 마르고 약했어요.”

“하지만 더 끔찍했던 건 따로 있었어요. 또래 아이들의 행동이었죠. 같이 훈련하던 친구들이 저한테 손가락질을 하며 제가 뭔가를 할 때마다 비웃었어요. 미국 하이틴 영화에 나오는 악역들 있잖아요? 걔들이 저한테 딱 그렇게 행동했어요. 계속 놀리고 웃었어요. 정말 미칠 지경이었죠.”

엠비드는 순박하고 착한 아이였지만, 승부욕이 넘치는 아이이기도 했다. 그는 매일 같이 방에 혼자 앉아 릴 웨인(Lil Wayne) 같은 미국 래퍼들의 노래를 들으며 ‘복수’를 다짐했다.

“힙합을 들으면서 저를 비웃는 놈들의 모습을 계속 떠올렸어요. 어느 순간 승부욕이 마구 솟아나더라고요. 엄청난 동기부여가 됐어요. 그래서 지금도 저는 사람들이 저한테 뭔가를 못한다고 말하는 걸 듣는 게 좋아요. 그 사람들이 틀렸다는 걸 증명할 기회가 생기거든요.”

“그놈들이 뭐라고 하는지 그땐 다 이해하지는 못했어요. 영어를 몰랐으니까요. 하지만 저를 놀리고 비웃는 게 분명했죠. 혼자 그 모습을 떠올리면서 이렇게 다짐했어요. ‘그래, 두고 보자. 나는 과정을 믿을 거야.(Let’s just Trust The Process.) 농구를 잘할 때까지 체육관에서 미친 듯이 훈련할 거야. 코비.(KOBE).’”

 

#4 하킴, 그리고 아써

험난했던 고교 생활 동안 엠비드에게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선수가 있었다. 하킴 올라주원이었다.

엠비드가 올라주원과 개인적으로 연락을 주고 받았던 것은 아니다. 엠비드는 카메룬에서 코치들이 보내온 올라주원 비디오 테이프를 매일 같이 돌려봤다. 자신이 태어날 때쯤 NBA를 지배하던 올라주원의 모습을 몇 번씩 반복해 돌려보면서 엠비드는 그를 자신의 롤 모델로 삼았다. 올라주원의 모든 플레이를 분석하고 연구했다. 코트에서는 자신이 올라주원이 됐다고 믿으며 플레이를 따라했다.

“그때 제 상황이 정말 거지 같았거든요. 그래서 저는 제 자신이 하킴 올라주원 같은 선수라고 스스로를 계속 세뇌했어요. 매일 그렇게 생각하며 훈련하고 경기했죠. 그러다 보니 실력이 계속 늘더라고요.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는 만나는 선수마다 그냥 짓밟고 다녔어요.”

“마음가짐의 힘(the power of mind)이란 거, 정말 대단하지 않나요?” 엠비드가 웃으며 말했다.

엠비드는 고교 마지막 시즌에 평균 13.0점 9.7리바운드 1.9블록슛을 기록했다. ESPN, 라이벌스닷컴 같은 매체들은 엠비드를 고교 최고 수준 유망주로 평가했다. 별점 5개 짜리 유망주가 된 엠비드는 결국 전미 센터 랭킹 1위에 올랐다. 명문 대학들도 엠비드에게 관심을 보였다. 엠비드가 택한 학교는 캔자스 대학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엠비드의 대부였던 루크 음바무테가 캔자스 대학을 추천했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그때 저는 3월의 광란(March Madness)이란 게 뭔지도 몰랐어요. 어떤 대학이 농구를 잘하는지도 몰랐죠. 제가 캔자스에 간 이유는 딱 하나에요. 루크(Luc)가 저한테 이렇게 말했거든요. ‘캔자스가 최고야. 넌 캔자스에 가야 해.’”

대학 무대에서도 엠비드의 성장은 계속됐다. 엠비드는 최고의 빅맨이었다. 신입생 시즌에 28경기에 나서 평균 11.2점 8.1리바운드 2.6블록슛을 기록했다. 평균 23.1분이라는 짧은 출전 시간에도 엄청난 임팩트를 남겼다. 엠비드는 곧바로 2014년 신인 드래프트 1순위 후보로 부상했다. 하지만 이번엔 부상이 엠비드의 발목을 잡았다.

2014년 3월, 엠비드는 등에 피로 골절 증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는다. NCAA 정규시즌이 채 끝나기도 전에 벌어진 일이었다. 결국 엠비드는 빅12 컨퍼런스 토너먼트는 물론 NCAA 토너먼트도 아예 뛰지 못하고 시즌을 마감했다.

그해 4월, 엠비드는 NBA 드래프트 진출을 선언하지만 드래프트를 앞두고는 오른발 주상골이 골절됐다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다. 계속되는 부상으로 인해 엠비드의 드래프트 주가는 하락했다. 건강했다면 얼마든지 1순위 지명이 가능했지만, 부상의 위험이 NBA 팀들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당시 서부지구의 한 관계자는 드래프트를 앞두고 엠비드 지명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리스크가 정말 큰 선택이다. 커도 너무 크다. 등 부상보다도 발 부상이 문제다. 빅맨에게 발 부상은 치명적이다. 정말 나쁜 조합이다.(a bad combination) 그리고 등 부상과 발 부상을 함께 가지고 있다면 그건 더 나쁜 조합이다(a worse combination). 1순위 지명권을 가진 클리블랜드가 엠비드를 뽑을 일은 절대 없을 것이다. 아픈 선수를 뽑는 건 구단 입장에서 돈과 사람을 더 쓰게 만드는 일이기도 하다.”

결국 엠비드의 지명 순위는 미끄러졌다. 그는 앤드류 위긴스(1순위, 클리블랜드 지명), 자바리 파커(2순위, 밀워키 지명)에 밀려 3순위로 필라델피아에 뽑혔다.

필라델피아를 만난 건 엠비드에게 어쩌면 행운이었다. 당시 노골적 탱킹을 시작한 필라델피아는 그 어떤 팀보다도 엠비드에게 충분한 회복 시간을 줄 수 있는 팀이었다. 그 후 엠비드는 무려 2년을 코트에 서지 않고 회복과 재활에 집중했다. 당초 1년만 쉬고 NBA에 데뷔할 계획이었지만 재검진 과정에서 오른발에 문제가 있다는 게 다시 확인되며 2차 수술을 받았다. 그렇게 엠비드는 소중한 2년을 날렸다.

온갖 조롱이 쏟아졌다. 필라델피아 팬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했다. 누군가는 ‘과정을 믿자(Trust The Process)’고 외쳤지만, 드래프트와 동시에 2년을 부상으로 날린 유망주를 곱게 바라보기란 힘든 일이었다.

이 2년은 엠비드 개인적으로도 무척 힘든 시간이었다. 동생 아써가 드래프트 후 불과 4달 만에 교통사고로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당시 엠비드는 4년 넘게 동생을 아예 만나지도 못했던 상황. 아써는 평소에 농구선수였던 형을 누구보다도 자랑스러워했고, 미국에 형의 NBA 경기를 보러 갈 거라고 이야기하곤 했다. 그런 아써의 갑작스러운 죽음은 엠비드뿐만 아니라 가족 전체에게 큰 상처였다.

당시를 회상하며 엠비드는 “아써가 죽은 후에 모든 걸 다 포기하고 카메룬으로 돌아가고 싶었다”고 말했다. 데뷔도 못한 채 회복과 재활만 하며 보내야 했던 2년을 엠비드는 아써를 생각하며 버텼다. 동생의 너무 이른 죽음은 엠비드에게 새로운 동기부여가 됐다. 동생에게 자랑스러운 형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다. 웨이트 트레이닝으로 몸을 꾸준히 만들었고 다양한 기술을 연마했다. 슈팅력도 갈고 닦았다.

 

그리고 2016년 10월 4일, 엠비드는 필라델피아와 보스턴의 프리시즌 경기에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다. 공식 데뷔전이었다. 13분 동안 6점 4리바운드 2블록슛을 기록하며 필라델피아 팬들을 들뜨게 했다. 그리고 10월 26일, 필라델피아와 오클라호마시티의 정규시즌 개막전에 엠비드는 선발 출전했다. 웰스파고 센터에 모인 필라델피아 팬들은 엠비드가 중거리 슛으로 데뷔 득점을 올리자 뜨거운 환호를 보냈다. 엠비드의 NBA 커리어가 마침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데뷔전에서 엠비드는 22분 25초 동안 20점 7리바운드 2블록슛 3점슛 1개를 기록했다. 성공적인 데뷔전이었다. 루키 시즌이었던 2016-2017시즌, 엠비드는 평균 20.2점 7.8리바운드 2.1어시스트 2.5블록슛이라는 훌륭한 기록을 남겼지만 부상 관리를 위해 31경기만 출전했다. 후반기에는 왼쪽 무릎 반월판이 찢어지는 부상을 입어 시즌아웃되기도 했다. 결국 엠비드는 밀워키의 말콤 브록던에 밀려 신인상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이후 엠비드의 존재감은 더 커졌다. 2017-2018시즌 엠비드는 63경기에서 평균 22.9점 11.0리바운드 3.2어시스트 1.8블록슛 야투율 48.3%를 기록하며 생애 첫 올스타에 뽑혔고 올-NBA 세컨드 팀에도 입성했다. 엄청난 페인트존 수비력을 앞세워 올-NBA 디펜시브 팀에도 이름을 올렸다. 데뷔 두 시즌만에 리그를 대표하는 센터로 자리잡은 것이다.

이 시즌 엠비드는 1순위 루키 벤 시몬스와 호흡을 맞추며 필라델피아를 6년 만에 플레이오프에 진출시켰다. 2012년 이후 오랫동안 진행됐던 필라델피아의 탱킹이 마침내 막을 내린 시즌이었다. 이후 필라델피아는 동부지구의 대표 강호로 거듭났고, 이번 시즌 다시 우승에 도전하고 있다.

 

#5 조엘, 엠비피(MVP)?

2020-2021시즌을 앞두고 필라델피아는 변화가 많았다. 2013년부터 지휘봉을 잡아왔던 브렛 브라운 감독이 경질됐고, 닥 리버스가 신임 감독으로 부임했다. 그에 앞서 대릴 모리가 휴스턴을 떠나 필라델피아 신임 사장으로 부임했다. 프런트와 코칭스태프의 수장이 모두 뒤바뀐 것이다.

수장이 바뀐 만큼 구성원의 변화도 상당히 많았다. 특히 코칭스태프는 완전히 물갈이됐다. 수비 시스템을 구축하는 능력이 뛰어난 댄 버크 인디애나 코치가 필라델피아로 왔다. 그는 과거 조엘 엠비드의 경기 중 과도한 셀레브레이션에 대해 분노를 표했던 지도자였다. 역시 수비 코칭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데이비드 예거 전 새크라멘토 감독도 코치로 왔다. 샘 카셀 역시 리버스와 함께 코치로 부임했다.

선수단도 바뀌었다. 알 호포드가 오클라호마시티로, 조쉬 리차드슨이 댈러스로 트레이드됐다. 대니 그린, 테렌스 퍼거슨, 세스 커리가 합류했다. FA 시장에서는 드와이트 하워드가 필라델피아행을 택했다.

최근 2년 동안 필라델피아는 플레이오프 성적이 기대에 크게 못 미쳤다. 2019년 플레이오프에서는 지미 버틀러, 조엘 엠비드, 벤 시몬스, 토바이어스 해리스를 모두 데리고도 2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지난해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에서 보스턴에 4전 전패로 무릎을 꿇었다. 지난해 오프시즌에 프런트, 코칭스태프, 선수단에 동시에 변화가 가해진 이유가 있었다.

그리고 올 시즌 필라델피아는 완전히 달라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2월 18일 기준으로 필라델피아는 19승 10패를 기록하며 브루클린, 밀워키를 밀어내고 동부지구 단독 1위를 질주 중이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그 중심에는 조엘 엠비드의 스텝 업이 있다. 올 시즌 엠비드는 평균 29.8점 11.3리바운드 3.1어시스트를 기록 중이다. 야투율은 52.7%에 육박한다. 들쑥날쑥했던 3점슛도 다시 안정을 찾았다. 올 시즌 엠비드는 경기당 1.2개의 3점슛을 터트리고 있고, 3점슛 성공률은 데뷔 후 처음으로 40%를 넘어서고 있다. 득점도 커리어 하이 시즌이다.

엠비드의 MVP 수상 가능성이 이미 거론되는 중이다. 엠비드는 르브론 제임스(LA 레이커스), 니콜라 요키치(덴버 너게츠)와 함께 전반기 MVP 레이스 3강 구도를 형성하고 있다. 미국 ‘폭스 스포츠’는 지난 16일 엠비드를 MVP 레이스 2위에 올려놓으며 “엠비드는 현재 PER 수치도 31.1로 리그 전체 1위를 달리고 있다. 최근 7경기 중 6경기에서 33점 이상을 기록했다”고 소개했다. 또한 기사 제목으로 “조엘 엠비드가 (MVP 레이스에서) 르브론 제임스를 추격하고 있다”고 쓰기도 했다.

‘더 링어’는 ‘조엘 엠비드가 가져갈 거대한 다음 족적(THE NEXT GIANT STEP FOR JOEL EMBIID)’라는 설명과 함께 “조엘 엠비드가 MVP 후보로 올라선 방법”이라는 영상을 제작하기도 했다. 미국 현지에서도 엠비드는 올 시즌 강력한 MVP 후보로 거론되는 중이다.

관건은 건강과 팀 성적이다.

올 시즌도 엠비드는 이미 6경기에 결장했다. 그렇게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MVP 레이스가 치열해질수록 르브론, 요키치에 비해 많은 결장 숫자가 변수가 될 가능성도 있다.

필라델피아가 동부 1위를 지켜내는 것도 중요하다. 제임스 하든을 영입한 브루클린이 최근 필라델피아를 매섭게 쫓아오고 있어 순위 싸움을 안심할 수 없다. 즈루 할러데이가 복귀할 밀워키도 다시 1위 싸움에 가담할 수 있다.

조엘 엠비드는 생애 첫 MVP를 차지할 수 있을까.

 

사진 = 로이터/뉴스1 제공, 조엘 엠비드 개인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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