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동환 기자] 스포츠 역사상 가장 유명한 저주는 무엇일까? 아마도 메이저리그 보스턴 레드삭스와 시카고 컵스가 겪었던 ‘밤비노의 저주’와 ‘염소의 저주’가 아닐까 싶다.

다행히(?) NBA에는 ‘저주’라는 표현을 들을 정도로 오랜 우승 갈증에 시달리는 팀은 없다. 우승을 못한 기간이 아무리 길어도 레드삭스나 컵스처럼 한 세기에 육박하지는 않는다. 이는 아마도 NBA가 메이저리그에 비해 상대적으로 역사가 짧은 편이기 때문일 것이다.(메이저리그 출범 1903년, NBA 출범 1946년)

정작 NBA에서 우승 갈증으로 더 많은 스트레스를 받는 존재는 구단보다는 선수다. 선수의 커리어를 평가할 때 우승 반지의 가치를 유독 높게 매기는 특유의 문화 때문이다.

실제로 미국 현지 미디어들도 우승을 못하는 NBA 팀보다는 우승을 못하는 NBA 선수에 초점을 맞춰서 보도를 쏟아내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인지 시대를 풍미한 웬만한 NBA 스타들은 모두 첫 우승을 경험하기까지 ‘우승 스트레스’에 시달렸다. 마이클 조던도, 샤킬 오닐도, 코비 브라이언트도, 르브론 제임스도 예외가 아니었다.

사실 조던처럼 결국엔 여러 차례 우승을 차지하며 시대의 지배자로 인정받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우승 문턱을 결국 넘지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도 수두룩하다.

1960년대를 풍미한 최고의 스타 엘진 베일러는 NBA 역사상 ‘우승을 못한 것으로 가장 유명한 선수’가 아닐까 싶다.

현역 시절 올스타에 11번, 올-NBA 퍼스트 팀에만 10번 선정됐던 베일러는 14년의 선수 생활 동안 단 한 번도 우승을 경험하지 못하고 결국 무릎 부상으로 커리어를 마감했다.(공교롭게도 베일러가 9경기만 뛰고 은퇴한 1971-72 시즌에 레이커스는 정규시즌 역대 최다 연승인 33연승을 달성하는 등 완벽한 시즌을 보내며 마침내 NBA 파이널 우승을 차지한다.)

1990년대에는 유타 재즈의 칼 말론-존 스탁턴 콤비, 뉴욕의 패트릭 유잉, 피닉스의 찰스 바클리 등이 우승 문턱에서 좌절한 대표적인 ‘무관의 제왕’들이었다. ‘그분’ 마이클 조던 때문이었다. 이들은 동시대에 무려 6번의 우승을 독식한 시카고 불스의 벽에 막혀 우승을 맛보지 못한 채 커리어를 마감했다

2000년대에도 앨런 아이버슨, 스티브 내쉬, 트레이시 맥그레이디, 크리스 웨버 등이 그 명맥(?)을 이었다. 샌안토니오, LA 레이커스 등이 리그의 지배자로 군림한 결과였다.

그렇다면 현역 선수 중 우승 갈증에 가장 심하게 시달리고 있는 선수 스타는 누구일까? 많은 선수들이 언급될 수 있겠지만 이 선수의 이름은 절대 빼놓을 수 없을 것 같다. 아니, 가장 먼저 나와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로 ‘천재 포인트가드’ 크리스 폴(휴스턴)이다.

 

▶ 크리스 폴이 위대한 이유

2005년 드래프트 1라운드 전체 4순위로 뉴올리언스에 지명된 크리스 폴은 데뷔와 함께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폴은 데뷔 시즌에 평균 16.1점 5.1리바운드 7.8어시스트 2.2스틸을 기록했다. 이는 모두 루키 전체 1위에 해당하는 기록이었다. 두 자릿수 어시스트 이상을 어렵지 않게 하다 보니 더블-더블 횟수도 루키 중에서 가장 많았다. 심지어 총 스틸 개수는 NBA 전체 1위를 기록하는 대형 사고를 치기도 했다.(175개) 루키가 데뷔 시즌에 총 스틸 개수 1위를 차지한 것은 NBA 역사상 두 번째 있는 일이었다.

올시즌 우리가 벤 시몬스를 목격하며 느끼는 충격과 경이로움을 정확히 12년 전에 크리스 폴이 보여줬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데뷔 시즌부터 폴은 범상치 않은 포인트가드였다. 결국 폴은 만장일치 신인왕에 단 1표가 모자란 압도적인 지지를 받으며 신인왕 트로피를 거머쥐었다.

그러나 이후 크리스 폴의 커리어가 순탄하게 흘러갔던 것은 아니다. 두 번째 시즌인 2006-07 시즌부터 부상으로 18경기를 결장한 폴은 이후 고질적인 무릎 부상 때문에 커리어에 여러 번 위기가 찾아왔다. 나중에는 아예 무릎 연골을 제거하는 수술까지 받기도 했다. 사실 조금만 좌절하거나 더 큰 부상이 찾아왔다면 언제든지 추락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폴은 위기를 맞이한 뒤에도 늘 화려하게 부활하곤 했다. 그는 2007-08 시즌에 평균 20.2점 11.1어시스트 2.6스틸을 기록하는 MVP급 시즌을 보냈다. 2008-09 시즌에도 폴은 평균 21.4점 5.2리바운드 10.3어시스트 2.6스틸 야투율 50.3%라는 무결점에 가까운 시즌을 보내며 자타공인 리그 최고 포인트가드로 자리 잡았다.

2009-10 시즌 폴은 45경기 출전에 그쳤고, 2010-11 시즌에는 경기력 하락을 겪었다. 또 부상 때문이었다. 사실 이때가 폴의 커리어에 찾아온 가장 큰 위기였다. 계속된 부상으로 경기 장악력이 하락했고, 소속팀 뉴올리언스는 전력 보강에 계속 실패하며 동기 부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심지어 드래프트 동기였던 데런 윌리엄스를 비롯해 데릭 로즈, 라존 론도, 토니 파커 등 뛰어난 포인트가드들이 리그에 쏟아지면서 포인트가드 포지션에서 그가 차지하는 입지가 갑자기 좁아지기도 했다. 

부상으로 위기를 맞이한 폴이 선택한 방법은 ‘정면 돌파’보다는 ‘변화’였다.

폴은 데뷔 첫 4년 동안 폴은 전체 슈팅의 27.7% 가량을 골밑에서 시도하는 선수였다. 워낙 화려하고 완벽한 볼 핸들링을 지닌 덕분에 동료의 스크린을 받으면 골밑까지 돌파하는 것이 그리 어렵지 않았다.

하지만 무릎 부상에 시달린 뒤로 폴은 점점 골밑에서 슈팅을 던지는 빈도를 줄여나갔다. 무릎의 부담을 줄이기 위해서였다. 대신 그는 점프슛을 주무기로 삼기 시작했다. 실제로 클리퍼스에서의 마지막 4년 동안 폴은 전체 슈팅의 단 10.4%만을 골밑에서 시도했다. 반면 미드레인지 구역과 3점슛 라인 밖에서 던진 슈팅의 비율은 56.1%에 육박했다. 자신의 주요 슈팅 구역을 완전히 변경한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슈팅 구역을 바꾸는 것은 선수에게 정말 큰 변화다. 공격을 전개하고 득점을 올리는 방식을 전면 수정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같은 대대적인 변화에도 폴은 공격력을 뛰어난 수준으로 유지하는 데 성공했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던 클리퍼스의 마지막 4년 동안에도 폴은 평균 19.0점 4.5리바운드 10.0어시스트 2.1스틸 야투율 47.3% 3점슛 성공률 38.8%라는 훌륭한 개인 기록을 남겼다. 놀랍게도 데뷔 첫 4년 동안의 평균 기록(19.3점 4.7리바운드 10.0어시스트 2.4스틸 야투율 47.3% 3점슛 성공률 35.3%)과 거의 흡사한 기록이었다. 폴의 슈팅 구역 변화를 확인하지 않은 사람이라면 폴이 예전과 거의 똑같은 방식으로 플레이하고 있다고 오해할 수 있을 정도다.

그리고 부상으로 고생하고 공격 방식을 바꾸는 와중에도 폴은 변함없이 리그 최고 수준의 수비력을 꾸준히 유지했다. 폴은 2008년부터 2017년까지 한 차례(2010년)를 제외하고 모두 올-NBA 디펜시브 팀에 선정됐다. 그 중 7번은 퍼스트 팀이었고, 2번은 세컨드 팀이었다.

잠시 폴을 밀어내는 듯 했던 데런 윌리엄스, 라존 론도, 데릭 로즈 등이 모두 부상과 기량 하락으로 내리막길을 걷자 결국 폴만 그 자리에 남았다. 그리고 지금 크리스 폴은 스테픈 커리, 제임스 하든, 러셀 웨스트브룩, 존 월 등의 후배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있다. 기어코 살아남은 것이다.

 

▶ ‘그래서 그분 컨퍼런스 파이널은요?’ 폴을 괴롭게 하는 질문 한 마디

사실 데뷔 이래 보여준 기량과 쌓아온 커리어를 보면 크리스 폴은 2000년대를 풍미한 최고의 포인트가드다.

ESPN은 지난해 1월 역대 포인트가드 랭킹을 다룬 칼럼을 발표했는데, 이 칼럼에서 크리스 폴을 역대 6위에 올려놓기도 했다.(7위 제이슨 키드, 8위 스티브 내쉬)

당시 ESPN 칼럼니스트들이 크리스 폴에 대해 남긴 평가는 다음과 같았다.

- 팀 공격을 조율하고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슛을 던지는, 포인트가드의 전통적인 정의 그 자체인 선수. NBA 역사상 앨리웁 패스를 가장 올리는 선수 중 한 명.

- 키가 작은 역대 NBA 선수 중 가장 완벽한 공수 겸장. 크리스 폴이 픽앤롤을 하는 모습은 한 시대의 상징과 같다.

그리고 폴이 보면 속이 쓰릴 코멘트들도 있었다.

- 만약 크리스 폴이 메일맨(칼 말론)과 함께 뛰거나 과거 디트로이트처럼 거친 팀에서 뛰었다면 아마 그는 벌써 2번 정도는 NBA 파이널 무대를 밟았을 것이다.

- 언젠가 크리스 폴이 컨퍼런스 파이널 무대를 밟는 날이 온다면, 그때서야 우리는 비로소 크리스 폴이 속한 팀이 플레이오프에서 보여주는 약한 모습보다는 폴이 농구라는 경기에서 보여준 득점원, 공헌자, 수비수로서의 모습에 더 집중하며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 크리스 폴의 커리어에는 치명적인 약점이 하나 있다. 바로 플레이오프 성적이다.

지난 몇 년 간 국내 NBA 팬들 사이에서는 ‘그그컨’이라는 표현이 유행처럼 쓰여 왔다.  ‘그래서 그분 컨퍼런스 파이널은요?’라는 문장의 줄임말인 이 표현은, 데뷔 후 13년 동안 우승은커녕 컨퍼런스 파이널 경기조차 뛰어보지 못한 크리스 폴의 처지를 조롱하는 표현이다.

폴은 꾸준히 리그 정상급 포인트가드로 군림했지만, 정작 플레이오프 성적과는 인연이 없었다.

1라운드는 그래도 어렵지 않게 통과해 왔다. 문제는 2라운드, 즉 컨퍼런스 준결승 무대였다. 여기서 폴은 늘 고비를 넘기지 못하고 무너졌다. 2008년 서부지구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뉴올리언스가 7차전 혈투 끝에 샌안토니오에 무릎을 꿇었을 때만 해도, 이게 폴의 플레이오프 한계점이 될 거라고 생각한 이는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후 10년 가까이 폴은 플레이오프에서 그보다 나은 결과물을 얻지 못하고 있다.

2015년 플레이오프에서는 휴스턴과의 서부지구 준결승에서 3승 1패로 앞서며 데뷔 첫 컨퍼런스 파이널 무대를 다시 눈앞에 두기도 했다. 하지만 이후 내리 3연패를 당하면서 폴은 또 다시 충격적인 플레이오프 탈락을 경험했다. 2016년과 2017년 플레이오프에서는 1라운드부터 자신과 동료들의 부상 문제가 터지며 조기 탈락했다. 클리퍼스 이적 후 첫 시즌이었던 2012년에도, 이후 3년 동안에도 폴은 늘 플레이오프에서 일찍 고배를 마셨다. 절친 르브론 제임스와 드웨인 웨이드가 꾸준히 파이널 무대를 밟으며 마음껏 우승에 도전하는 동안, 폴은 ‘컨퍼런스 파이널도 가지 못하는 패배자’라는 조롱에 시달려야 했다.

 

▶ 저주를 풀 기회가 찾아왔다

하지만 올시즌 드디어 크리스 폴에게도 절호의 기회가 찾아온 것 같다. 바로 플레이오프 조기 탈락이라는 저주를 풀 기회 말이다.

올시즌을 앞두고 크리스 폴은 8대1 트레이드를 통해 휴스턴으로 이적했다. 클리퍼스를 떠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 트레이드 당시만 해도 논란이 있었다. 폴과 제임스 하든의 공존 문제, LA 클리퍼스에 많은 선수를 넘겨준 휴스턴의 약해진 벤치 전력이 우려를 샀다.

그러나 시즌 개막 후 휴스턴은 보란듯이 순항을 이어가고 있다. P.J. 터커, 루크 음바무테가 합류하면서 로스터가 오히려 더욱 탄탄해졌고, 크리스 폴과 하든은 오랫동안 손발을 맞춰온 콤비처럼 안정적으로 공존 중이다. 한국시각으로 15일 현재 휴스턴은 리그 전체 1위에 올라 있다.

물론 시즌 개막 직후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트레이닝 캠프부터 다리 상태가 좋지 않았던 폴이 개막전부터 다리 부상이 악화돼 이후 한 달 가까이 결장한 것이다. 하지만 폴이 코트를 떠나 있는 동안에도 휴스턴은 제임스 하든의 대활약을 앞세워 꾸준히 승리를 쌓았고, 덕분에 폴은 최대한 건강하게 코트에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폴이 복귀한 지난 11월 17일 이후 휴스턴은 NBA에서 가장 공수 경기력이 완벽한 팀이다. 공격 효율 지수 1위(117.5), 수비 효율 지수 1위(100.5)를 동시에 차지하고 있고 공수 효율 마진(Net Rating)도 17.0으로 압도적인 1위다.

지난 시즌까지만 해도 공격은 강하고(공격 효율 지수 2위), 수비는 평균 이하였던(수비 효율 지수 18위) 휴스턴이다. 그런데 올시즌 갑자기 공수 균형이 완벽한 팀으로 변모한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크리스 폴의 존재 때문이다.

올시즌 폴은 하든의 백코트 파트너 역할과 에이스 스타퍼(stopper) 역할을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 폴이 팀 공격을 안정적으로 조율해주면서 수비에서는 상대의 핵심 가드 공격수를 괴롭히고 봉쇄해버리니 하든 입장에서는 이보다 든든할 수가 없다. 

또한 폴은 하든이 벤치에 있을 때 에릭 고든, P.J. 터커, 루크 음바무테, 네네 등과 함께 휴스턴의 공수를 효과적으로 이끌고 있기도 하다. 덕분에 하든은 지난 시즌에 비해 출전 시간을 안정적으로 관리받고 있다. 이는 결국 하든의 경기력이 좋아지는 선순환 효과를 낳는다. 폴의 합류가 휴스턴에 가져온 어마어마한 긍정적 효과다.

시즌 중반과 후반에도 지금의 페이스를 이어간다면 올시즌 휴스턴은 대권에 충분히 도전할 만하다. 디펜딩 챔피언이자 자타공인 리그 최강팀인 골든스테이트가 버티고 있지만, 결코 도전 불가능한 벽은 아니다. 휴스턴은 이미 개막전에서 100% 전력의 골든스테이트를 상대로 승리를 거둔 경험도 있다. 뚜껑을 열어봐야겠지만, 현재까지의 휴스턴이 7전 4승제 시리즈에서 골든스테이트를 위협할 만한 몇 안 되는 팀인 것만큼은 확실하다.

그리고 이는 곧 크리스 폴에게 ‘저주’를 풀 절화의 기회를 찾아왔다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만약 올시즌 휴스턴이 플레이오프에서도 좋은 성적을 낸다면, 폴은 생애 처음으로 컨퍼런스 파이널 무대를 밟는 것은 물론이고 그 이상의 성과를 얻을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토록 바라던 우승 반지 획득도 가능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은 앞으로 크리스 폴이 어떤 활약을 이어가느냐에 달렸다.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코리아, 나이키
 

저작권자 © ROOKI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