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동환 기자] 픽앤롤(pick and roll)은 현대 농구에서 가장 자주 볼 수 있는 전술적 움직임이다.

미 대학 농구에서 이미 사용되고 있던 픽앤롤이 NBA에서 본격적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것은 80년대 후반과 90년대를 통해서다. 유타 재즈의 존 스탁털-칼말론 콤비가 리그를 장악하면서 픽앤롤은 NBA의 새로운 전술 트렌드로 올라섰다. 그리고 다시 20여년이 지난 지금, 픽앤롤은 대부분의 NBA 팀들이 가장 선호하고 빈번하게 사용하는 공격 전술로 자리잡고 있다.

픽앤롤, 3점슛, 속도전으로 대표되는 현대 농구의 트렌드를 리그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추종하는 팀은 마이크 댄토니 감독의 휴스턴 로케츠다. Synergy Sports Tech에 따르면 2016-17 시즌 휴스턴 로케츠는 전체 하프코트 공격의 44%를 픽앤롤 공격으로 시작했다. 휴스턴에게 픽앤롤은 곧 자신들의 정체성과 같다.

픽앤롤을 전술에 포함시키지 않으면 살아남기 힘든 시대가 됐다. 지난 시즌 토론토는 전체 공격의 24.2%를 픽앤롤 상황을 통해 가드가 만들어냈다. 카일 라우리, 더마 데로잔이라는 동부지구 최고 수준의 백코트 콤비를 보유한 탓이었다. 샬럿(22.9%), 피닉스(22.6%), 레이커스(20.9%) 등 픽앤롤에서 가드가 공격을 만들어내는 빈도가 20%가 넘는 팀만 7개 팀에 달했다. 15%로 기준을 낮추면 23개 팀이었으며, 최하위 골든스테이트조차도 10%가 넘었다.

픽앤롤에서 롤맨(스크린을 걸고 림으로 돌진하는 빅맨)이 만들어내는 공격 비중까지 포함하면, 각 팀의 평균적인 픽앤롤의 구사 빈도는 20% 중반대에서 후반대까지 육박한다. 픽앤롤이 현대 농구의 진정한 ‘대세’ 전술이 됐음을 새삼 확인할 수 있는 대목이다.

(한편 아이러니하게도 지난 3년 동안 리그에서 가장 강력한 팀이었던 골든스테이트는 스티브 커 감독 부임 이후 픽앤롤 공격 빈도에서 늘 리그 최하위권을 차지하고 있다. 지난 시즌도 픽앤롤을 통해 가드와 롤맨이 시도한 공격 빈도의 합이 14.9%로 유일하게 15%도 안 되는 팀이었다. ‘픽앤롤=효율적인 공격’이라는 공식에 반기를 들고 있고 있는 것이다. 골든스테이트의 시대를 거스르는 이 선택에 대해서는 추후에 이야기해보도록 하자.)

하지만 지난 30여년 동안 픽앤롤 전술이 정체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면, 지금 픽앤롤의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른 전술이었을지도 모른다.

수많은 감독들이 픽앤롤을 더 효과적으로 사용하는 방법을 연구하고 코트에서 실현했으며, 이를 막으려는 수많은 감독들이 픽앤롤의 수비법을 개발하고 활용했다.(시카고 불스의 아이스 전술, 마이애미 히트의 블리츠 전술 등) 지도자들의 이 같은 경쟁과 상호작용을 통해 픽앤롤은 더 위력적인 전술로 발전하고 진화했다.

 

현대 농구에서 진화한 픽앤롤의 모습은 여러가지 형태로 드러나고 있는데, 최근 주목받고 있는 것 중 하나는 바로 ‘스페인 픽앤롤’이다.

이 전술의 이름이 ‘스페인 픽앤롤’이 된 이유는 이름만큼 단순하다. 2016년 리우 올림픽에서 스페인 농구 대표팀이 많이 활용하면서 유명해진 전술이기 때문이다. 최근 NBA에서도 스페인 픽앤롤을 활용해 픽앤롤 공격의 효율을 높이려는 시도가 나타나고 있다. 마이크 댄토니 감독의 휴스턴, 스캇 브룩스 감독의 워싱턴이 스페인 픽앤롤을 공격에 적극 활용하는 대표적인 팀이다.

스페인 픽앤롤의 가장 큰 특징은 ‘3대3 게임’이라는 점이다.

기존의 픽앤롤은 2명이 드리블러와 스크리너(스크린을 거는 선수를 일컫는 표현) 역할을 맡고 공격을 시도하는 전술이다. 픽앤롤이 ‘2대2 게임’ 혹은 ‘투맨 게임’으로 흔히 불리는 이유다.

하지만 스페인 픽앤롤은 기존의 픽앤롤에 3점슛 능력을 갖춘 1명의 슈터까지 추가적으로 전술에 참여한다. 이를 통해 보다 다양한 득점 기회를 노리는 것이 스페인 픽앤롤의 목적이다.

 

지난 시즌 어떤 팀보다도 스페인 픽앤롤을 적극적으로 활용한 휴스턴을 예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보자.

위의 그림은 스페인 픽앤롤의 기본 대형을 나타낸 것이다. 제임스 하든이 볼을 가진 가운데, 하든과 림 사이에 클린트 카펠라와 에릭 고든이 일렬로 서 있다.

이때 트레버 아리자와 라이언 앤더슨의 위치가 중요하다. 하든, 카펠라, 고든 3명이 스페인 픽앤롤을 시도할 공간을 충분히 확보하게 위해 아리자와 앤더슨은은 양 코너에 위치한다. 때로는 아리자와 앤더슨이 함께 한 쪽 사이드의 3점슛 라인의 45도와 코너에 서 있을 때도 있다.
하지만 기본적인 대형은 하든-카펠라-고든이 일렬로 선 가운데 아리자와 앤더슨은 코너에 자리잡고 최대한 공간을 넓혀주는 것이다.

 

이제 본격적인 스페인 픽앤롤이 시작됐다.

①클린트 카펠라가 먼저 제임스 하든을 위해 스크린을 걸어준다. 여기까지는 일반적인 픽앤롤과 다를 게 없다

흥미로운 것은 다음이다. 카펠라가 하든에게 스크린을 거는 타이밍에 ②에릭 고든은 카펠라의 수비수 B에게 스크린을 건다. 이때 고든의 스크린 방향은 하프라인을 향하는 업 스크린인 동시에, B의 등 뒤에서 스크린을 거는 백 스크린이다. 스페인 픽앤롤의 가장 전형적인 시작 방식이다.

사실 ①과 ②의 타이밍은 일치하지 않는다. ①보다는 ②가 아주 조금 늦게 이뤄지는 것이 스페인 픽앤롤에서는 이상적이다. 하지만 ①과 ②의 시간차가 너무 커서도 안 된다. 그래야만 스페인 픽앤롤의 최대 목적인 다양한 득점 기회 창출이 이뤄지기 때문이다.

 

카펠라의 스크린이 걸리면, 하든은 드리블을 통해 돌파를 시도한다. 그리고 카펠라는 곧바로 림으로 돌진한다.

한편 고든은 카펠라의 수비수 B에게 스크린을 걸고 있다. 불과 1-2초 남짓한 사이에 벌어지는 일이다. 이 과정에서 카펠라는 고든의 스크린 덕분에 보다 수월하게 림으로 돌진할 수 있다.

 

하든이 돌파를 시도한 후의 상황이다. 이때 수비수 B와 C는 고민에 빠지게 된다.

1)  B는 왼쪽으로 돌파하는 하든의 경로를 막을지, 자신의 본래 마크맨인 클린트 카펠라를 따라가야 할지 선택을 내려야 한다.

2)  C도 난감하긴 마찬가지다. B가 하든의 돌파 경로를 막기로 선택할 경우, C는 혼자서 카펠라와 에릭 고든을 마크해야 한다. 순간적으로 1대2 상황이 벌어지는 것이다.

혹시나 B가 자신의 본래 마크맨인 카펠라를 따라간다면, 이번엔 C가 하든의 돌파 경로와 에릭 고든의 움직임을 함께 체크해야 한다는 부담이 생긴다.

 

결국 B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C에겐 1대2의 상황이 필연적이다. 하든의 본래 마크맨인 A가 하든을 뒤따라 오면서 사실상 수비에서 존재감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렇게 B와 C가 선택의 기로에 놓였을 때, 에릭 고든이 취하는 움직임이 바로 스페인 픽앤롤의 백미다.

B에게 스크린을 걸던 에릭 고든은 하든이 돌파를 하고, 카펠라가 림으로 돌진하는 타이밍에 맞춰 3점슛 라인 바깥쪽으로 빠져 나가 버린다.

 

고든이 3점슛 라인 바깥으로 빠져나온 뒤의 상황. B는 가장 위협적인 공격수인 하든의 돌파 경로를 따라가고 있고, C는 림에 너무 가까이 있는 카펠라를 신경쓰고 있다. A는 여전히 하든의 뒤를 따라오는 상황이다.

여기서 하든은 무려 3가지의 선택권을 가지게 된다.

1) 빠른 돌파로 B까지 제쳐버리고 직접 왼손 레이업으로 득점을 올리거나
2) 신장이 작은 C가 견제하고 있는 카펠라에게 앨리웁 패스를 하거나
3) 노마크 상태가 되어버린 에릭 고든에게 패스를 하는 것이다.

 

만약 위의 그림처럼 코너에 있던 라이언 앤더슨의 마크맨 E가 하든의 돌파 경로로 도움 수비를 간다면 어떻게 될까? 정답은 간단하다. 그렇게 되면 위의 그림처럼 라이언 앤더슨이 오픈 상황이 될 것이다.

 

만약 C가 하든의 돌파 경로를 막고, B가 외곽으로 빠져 나가는 에릭 고든을 쫓아가고 트레버 아리자의 마크맨인 D가 카펠라 쪽으로 도움 수비를 가게 된다면?

이번엔 반대편 코너에 있는 트레버 아리자가 오픈 상황이 된다.

이때 아리자는 하든이 자신에게 줄 패스 동선을 줄이고 가로채기 당할 위험을 줄이기 위해, 45도로 이동해 하든의 패스를 기다릴 것이다. 수비수들이 어떤 선택을 내려도 휴스턴은 좋은 득점 기회를 잡을 수 있다.

 

우리가 여기서 주목할 것은, 스페인 픽앤롤은 볼을 가진 가드의 판단력(decision making)이 전술의 완성도를 좌우한다는 점이다.

제임스 하든은 돌파를 시도하는 시점에 ①자신의 돌파 경로, ②림으로 돌진하는 카펠라의 위치와 상태, ③에릭 고든의 오픈 여부, ④코너에 있는 수비수들의 도움 수비 시도 여부를 1-2초에 불과한 짧은 시간 안에 모두 파악하고, 가장 효율적으로 득점을 올릴 수 있는 방향으로 공이 갈 수 있도록 결정해야 한다.

 

그리고 정말 놀랍게도, 2016-17 시즌에 처음 포인트가드로 뛰기 시작한 제임스 하든은 이 부분에서 천부적인 재능을 드러냈다.

스페인 픽앤롤이 펼쳐질 때마다 하든은 매순간 완벽에 가까운 상황 판단과 패스로 휴스턴의 득점에 기여했다. 다른 전술에서도 마찬가지였다. MVP 트로피는 러셀 웨스트브룩에게 돌아갔지만, 하든도 웨스트브룩에 결코 밀리지 않는 MVP급 시즌을 보냈다고 평가받아야 하는 이유다.

지난 시즌 워싱턴의 존 월, 마신 고탓, 브래들리 빌 3인방도 스페인 픽앤롤을 자주 활용했다. 최고의 돌파력과 어시스트 능력을 갖춘 존 월, 리그 최고의 스크리너 중 한 명인 마신 고탓, 폭발적인 외곽슛 생산력을 가진 브래들리 빌이 힘을 모으면서 휴스턴 못지않게 스페인 픽앤롤로 짭짤한 소득을 올렸다.

필라델피아, 보스턴 등도 스페인 픽앤롤을 전술 노트에 포함시키며 종종 활용했다. 이미 성공을 거두는 팀들이 나오고 있는 만큼, 다음 시즌엔 더 많은 팀들이 스페인 픽앤롤을 코트에서 활용할 것으로 예상된다.

 

농구의 역사가 계속되는 동안 전술은 선수들의 개인 역량만큼 꾸준히 진화해 왔다. 그리고 앞으로도 전술의 진화는 계속될 것이다. 스페인 픽앤롤이 그 사실을 증명한다. 당신이 전술에 관심이 많은 NBA 팬이라면, 오는 시즌 스페인 픽앤롤의 위력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사진 제공 = 게티이미지코리아, FIBA

이미지 = 이동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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