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는 6월 2일(이하 한국시간), 개인 블로그인 TOUT(www.tout.com/u/shaq)에 올린 영상 메세지를 통해 현역 생활을 마감하겠다는 의사를 표현했다. 이로써 통산 4개의 우승 반지, MVP1회, 파이널 MVP 3회 등 NBA의 역사에 큰 족적을 남겼던 명 센터를 더 이상 코트 위에서 만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남긴 기록들과 수상 내역, 그리고 전반적인 커리어를 추억해보자.
1부에서는 커리어를 다룬다.
커리어
고교 시절
뉴저지 출신인 오닐은 학창 시절 농구선수로 활약했던 아버지의 피를 물려받아 어린 시절부터 두각을 나타냈다. 로버드 G.콜 고교 시절에는 소속 팀을 텍사스 주(州) 챔피언으로 이끌었고, 졸업반 시절에 잡아낸 791리바운드는 현재까지도 텍사스 주 기록으로 남아있다.
루이지애나 주립대학 시절
대학에서 보낸 3시즌 동안 평균 21.6득점 13.5리바운드 1.7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수상내역을 살펴보면 올-아메리칸 팀 2회, SEC 올해의 선수 2회, NCAA 올해의 선수 1회 등 대학 무대를 평정했다. LSU(루이지애나 주립대학의 약칭)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음을 물론이다.
비록 우승 기록은 없지만 대학 무대에서 그를 막을 수 있는 선수는 없었다. 216cm의 선수라고는 믿기지 않는 운동능력과 축복받은 거대한 신체조건, 압도적인 힘을 바탕으로 NCAA를 평정한 후 얼리 엔트리를 신청해 NBA의 문을 두드리게 된다.
1992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올랜도에 입단 (92-93시즌 ~ 95-96시즌)
당시 드래프트는 빅맨 풍년이었다. 조지타운 대학의 알란조 모닝(2순위), 초대 드림팀에도 선발되었던 듀크 대학의 크리스찬 레이트너(3순위), UNC의 톰 구글리오타(6순위), 서던 미시시피 대학의 클라렌스 웨더스푼(9순위) 등 만만찮은 선수들이 오닐과 1순위 지명을 놓고 경쟁을 했다.
사실 경쟁이란 단어가 무의미하긴 했다. 이미 그가 얼리 엔트리를 신청하자마자 1992년 드래프트는 '샤킬 오닐' 드래프트가 되었기 때문이다. 운 좋게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한 올랜도 매직은 주저없이 그의 이름을 호명했다. 그렇게 오닐은 '플로리다의 흑상어'라는 별명을 얻었다.
당시 올랜도는 구단 역사가 3년 밖에 되지 않았을 정도로 신생 팀에 불과했다. 그가 합류하기 전까지 3시즌 동안 18승 64패-31승 51패-21승 61패를 기록한 동네북이었다.
오닐의 위력을 상상을 초월했다. 데뷔 시즌 평균 23.4득점 13.9리바운드 3.5블록슛 야투성공률 56.2%를 기록한 그는 올랜도를 프랜차이즈 역사상 처음으로 5할 승률로 이끌었다. 시즌 중 덩크슛으로 백보드를 두 차례나 무너뜨리는 등 손쉽게 리그 인사이드를 접수한 그에게 신인왕 수상은 당연한 결과였다.
이듬해에는 단짝 페니 하더웨이가 새롭게 합류하며 팀은 더 강해졌다. 올랜도는 93-94시즌 플레이오프 무대 손님이 되었고, 다음 시즌에는 파이널까지 진출하는 기염을 토했다. 비록 하킴 올라주원이 버틴 디펜딩 챔피언 휴스턴에게 스윕패로 무릎 끓었지만 팀과 오닐의 미래는 여전히 밝았다. 그는 해당시즌 MVP 투표에서 2위를 차지하며 가치를 인정받았다.
레이커스로의 이적, 쓰리핏 (96-97시즌 ~ 03-04시즌)
95-96시즌 이후 오닐은 FA자격을 획득했다. 드림팀 3 멤버로 참가한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목에 걸며 그의 주가는 더욱 높아진 상태였다. 대다수의 팀들이 그에게 군침을 흘렸지만 정작 올랜도는 느긋했다. 오닐이 플로리다를 떠날 이유가 없다고 방심했기 때문이다.
이때 발 빠르게 움직인 팀이 레이커스였다. 매직 존슨 은퇴 후 고전을 면치 못했던 레이커스는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줄 대형스타가 필요했고, 마침 FA로 풀린 오닐은 욕구에 정확하게 부합했다. 더구나 평소 연예계에 흥미가 많았던 오닐은 할리우드를 동경하고 있던 터였다.
계약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졌다. 레이커스는 7년 1억 2,5000만 달러에 달하는 계약서를 제시했고, 오닐은 주저 없이 서명했다. "샤크가 1억 달러 이상을 받을 가치가 있느냐" 라고 여유만만했던 올랜도는 그렇게 위대한 레전드를 뺏겼다.
레이커스 시절의 오닐은 스스로를 'MDE' (most dominant ever)라고 부르며 리그를 접수했다. 페인트존에서 그와 대적할 수 있는 선수는 아무도 없었다. 오죽했으면 '핵어샥'이라는 노골적인 파울작전이 등장했을 정도였다. 당시 오닐의 유일한 약점은 저조한 자유투 성공률 밖에 없었다.
그는 필 잭슨 감독, 코비 브라이언트 등과 호흡을 맞추며 레이커스를 3년 연속 우승으로 이끌었다. 커리어 최고의 시기를 레이커스와 함께 한 것이다. 시즌 MVP, 파이널 MVP 수상 등도 모두 이 시기에 이루이전 것들이었다. (레이커스는 오닐의 활약을 기념하기 위해 그의 34번 백넘버를 영구결번 처리하기로 결정했다)
결별, 마이애미로의 이적 (04-05시즌 ~ 07-08시즌)
쓰리핏 이후 레이커스는 내리막길을 걸었다. 라이벌 샌안토니오가 무섭게 성장했고, '전당포 라인업'을 꾸려 우승에 도전했던 03-04시즌 파이널에서는 디트로이트에게 무릎을 끓었다.
게다가 브라이언트의 성장으로 인해 팀내 역학관계에도 변화가 발생했다. 자존심이 강했던 두 슈퍼스타는 사사건건 충동했다. 팀이 잘 나갈때는 우승이라는 단어 하에 갈등이 봉합되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둘의 사이는 서로를 못 잡아먹어 안달이 난 상태까지 불화가 심해졌다.
레이커스는 팀의 미래로 브라이언트를 낙점했다. 상대적으로 나이가 많고, 잦은 부상에 시달렸던 오닐은 그렇게 버림받았다.
시장에 나온 오닐은 여전히 인기가 좋았다. 그리고 가장 좋은 매물을 제시했던 마이애미가 그를 손에 넣는데 성공한다. 브라이언 그랜트-라마 오덤-캐런 버틀러와의 3:1 트레이드를 통해 '흑상어'는 다시 플로리다로 돌아왔다.
마이애미에서 오닐은 마지막 불꽃을 태운다. 자존심을 굽힌 그는 라이징 스타였던 드웨인 웨이드에게 스포라이트를 양보하는 성숙한 모습까지 선보였다. 베테랑들인 게리 페이튼, 알란조 모닝, 제이슨 윌리암스 등이 속속 합류하며 팀은 우승후보로 거듭났다.
05-06시즌 오닐은 통산 4번째 우승반지를 손에 넣었다. 비록 과거만큼의 압도적인 활약은 아니었지만 플레이오프 23경기에서 평균 18.4득점 9.8리바운드를 기록하며 제 몫을 해냈다. 그리고 해당 시즌은 그의 마지막 전성기로 남게 된다.
저니맨으로 전락한 노장 (07-08시즌 ~ 10-11시즌)
이후 오닐은 노쇠화와 부상이 겹치며 고전했다. '우승 청부업자'라는 타이틀을 목에 걸고 피닉스-클리브랜드-보스턴을 떠돌았지만 5번째 우승 반지를 손에 넣지 못했다. 말년에 스티브 내쉬, 르브론 제임스, 케빈 가넷 등의 스타들과 호흡을 맞춰본 것에 만족해야 했다.
보스턴 소속으로 마지막 우승에 도전했던 올해의 경우 정규 시즌 36경기, 플레이오프 2경기 출전에 그치며 체면을 구겼다. 특히 은퇴 경기가 된 친정 팀 마이애미와의 플레이오프 2라운드 4차전에서는 단 4분의 출전시간에 그치며 아쉬움을 남겼다.
이별, 그리고 새로운 인생
오닐은 역사상 가장 뛰어난 센터 중 한명이었다. 카림 압둘자바, 월트 챔벌레인, 빌 러셀 같은 전설의 센터들게에게 다소 못 미쳤다 할지라도 90년대를 수놓았던 4대 센터(하킴 올라주원, 페트릭 유잉, 데이비드 로빈슨) 중에서는 가장 뛰어난 커리어를 보낸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은퇴 후 마이애미에서 경찰 생활을 하겠다는 발언이나 이종 격투기로 진출한다는 소문 등 그의 미래를 예상하기 쉽지 않다. 그렇지만 타고난 언변과 끼를 바탕으로 무슨 일을 하든 팬들의 사랑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젠 코트 위에서 유니폼을 입은 모습 대신 멋진 슈트를 차려입은(말년에는 부상으로 인해 슈트를 입고 경기장에 자주 왔지만) 오닐의 모습을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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