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월호] 독일의 우승으로 마무리된 농구 축제 2023 FIBA 월드컵
필리핀과 일본, 인도네시아 3개국에서 개최한 2023 FIBA 농구 월드컵이 독일의 우승으로 마무리됐다. 미국, 프랑스 등이 이변의 희생양이 된 가운데 대회 내내 흥미로운 볼거리를 낳았던 농구 월드컵에서 무슨 일이 있었을까?
*본 기사는 루키 2023년 10월호에 게재됐습니다.
시작부터 탄생한 이변
모든 스포츠에서 대회가 열리기 전 예상됐던 전력 차이를 뒤집고 이변이 일어나는 것은 흥미로운 일이다. 이번 월드컵 또한 첫날부터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오며 농구 팬들을 놀라게 했다.
지난 대회에서 미국을 꺾었던 강호 프랑스가 첫 경기부터 캐나다에 30점 차 대패를 당하며 충격을 안겼다. 월드컵을 앞두고 열린 평가전에서 캐나다가 심상치 않은 모습을 보인 것은 사실이지만, 프랑스가 이렇게 무기력하게 추락하리라 예상한 이는 많지 않았다.
NBA 퍼스트-팀 가드 샤이 길저스-알렉산더를 앞세운 캐나다는 2쿼터부터 프랑스를 압도하기 시작했다. 캐나다의 맹공에 전의를 상실한 프랑스는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고 적수가 되지 못했다.
프랑스의 굴욕은 이어진 경기에도 계속됐다. 캐나다엔 패했지만 그래도 남은 두 경기를 잡으면 2라운드 진출이 가능했던 프랑스. 하지만 첫 출전국인 라트비아에 패하며 조기에 퇴장하고 말았다. NBA에서 엄청난 연봉을 받는 장신 센터 루디 고베어는 이름값을 해내지 못했고, 프랑스는 주전 포인트가드 난도 데 콜로의 퇴장 후 와르르 무너졌다.
크리스탑스 포르징기스가 빠진 라트비아는 에이스의 공백에도 강했다. 프랑스를 격파하고 2라운드에 오른 라트비아는 디펜딩 챔피언 스페인까지 무너트리며 돌풍을 이어갔다. 8강에서 독일을 끝까지 물고 늘어졌지만 아쉬운 패배를 당한 라트비아. 하지만 그들이 이번 대회에서 보여준 저력은 충분히 많은 팬들의 머리에 각인될만했다.
반면 가솔 형제의 뒤를 이을 에르난고메즈 형제를 앞세워 백투백 우승을 노렸던 스페인은 라트비아의 돌풍 희생양이 되며 조기에 짐을 쌌다. 천재 가드 리키 루비오가 대회 전 예상치 못하게 멘탈 이슈로 빠졌지만 그래도 강력한 전력을 과시했던 스페인이기에 그들의 8강 진출 실패는 꽤 충격적이었다.
엇갈린 아시아 국가들의 희비
한국이 코로나19 이슈로 인한 불참 징계로 월드컵에 나서지 못하는 사이에 일본이 예선에서 보인 경기력 또한 상당히 인상적이었다. 개최국인 일본은 독일, 호주의 벽을 넘지 못하며 비록 2라운드 진출에는 실패했지만 NBA 유타의 에이스 라우리 마카넨이 버티는 장신 군단 핀란드를 상대로 인상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핀란드를 상대로 4쿼터 한때 큰 격차로 뒤지며 패배에 가까워졌던 일본은 지난 시즌 B.리그 MVP 카와무라 유키가 신들린 득점포를 가동하며 극적인 역전승을 거뒀다. 순위결정전에서 베네수엘라를 상대로 또 한 번의 뒤집기에 성공한 일본은 아시아에 한 장만 주어졌던 파리 올림픽 직행 티켓을 확보했다.
이미 월드컵 전부터 프랑스, 슬로베니아라는 강팀과 평가전을 펼쳤던 일본이다. 꾸준히 가져갔던 대대적인 투자가 서서히 효과를 보기 시작하고 있다.
일본의 선전이 이어지는 사이 과거 아시아의 맹주로 군림했던 중국은 지난해 아시아컵에 이어 이번 대회에서도 자존심을 구겼다. 대회 시작 전 현역 NBA 리거인 카일 앤더슨을 귀화 선수로 영입하며 기대감을 높였던 중국이다.
세르비아, 남수단, 푸에르토리코와 같은 조에 편성된 중국. 절대 1강인 세르비아에 완패를 당하며 출발한 중국은 두 번째 경기에서 FIBA 랭킹 62위 남수단에 무기력한 대패를 떠안았다. 푸에르토리코에도 큰 힘을 쓰지 못한 중국은 순위결정전에서 만난 필리핀의 조던 클락슨에게 한 쿼터에만 24점을 헌납하며 굴욕을 당했다.
마지막 경기에서 중국을 잡았지만 안방에서 올림픽 본선 티켓까지 노렸던 필리핀 또한 그다지 만족스럽지 못한 성적표를 받아들였다. 대회 내내 필리핀 언론과 팬들의 집중 포화를 받은 초트 레예스 감독은 중국전을 마친 뒤 인터뷰에서 곧바로 사퇴 의사를 밝혔다. 필리핀은 변화된 코칭스태프와 함께 항저우 아시안게임에 나선다.
한편, 오랜 시간 이란을 지켜왔던 ‘통곡의 벽’ 하메드 하다디는 이번 대회를 끝으로 국가대표 은퇴를 선언했다. 아킬레스건 파열 부상을 딛고 극적으로 복귀한 하다디는 불혹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여전한 경쟁력을 발휘하며 유종의 미를 거뒀다.
무너진 드림팀의 자존심
미국은 월드컵 개막 전 우승 후보 예측에서 단연 압도적인 표를 받은 팀이었다. 여러 팀들 가운데 우승 후보를 꼽는 고민을 하는 것이 아니라 “과연 미국을 막을 팀이 나올 수 있을까?”라는 질문을 던지는 수준이었다.
도쿄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던 미국은 이번 대회에서 지난 2019 월드컵 7위의 부진을 씻어내려고 했다. 월드컵을 앞두고 슬로베니아, 스페인, 독일 등 만만치 않은 팀들을 상대로 펼친 평가전에서 모두 승리를 거뒀던 미국이다.
이번 미국 대표팀 명단은 그야말로 파격적이었다. 케빈 듀란트를 비롯해 데미안 릴라드 등 도쿄 올림픽에 나섰던 선수가 한 명도 엔트리에 포함되지 않았다. 20대 초중반의 젊은 선수들 위주로 로스터를 꾸렸다.
이름값은 이전의 드림팀들보다 약할 수 있어도 전력상 충분히 우승은 가능할 것으로 보였다. 명단에 이름을 올린 선수들 모두 NBA 팀의 에이스이거나 핵심 자원이었다.
로스터 밸런스 또한 공격에 치우치지 않고 훌륭한 것처럼 보였다. 공격과 수비 능력을 겸비한 선수들이 다수 포진했고, 미국의 유일한 약점으로 꼽혔던 빅맨진에 수비왕 자렌 잭슨 주니어와 유타의 새로운 성벽 워커 케슬러가 가세했다.
하지만 필리핀으로 향한 미국은 시작부터 뭔가 어긋난 듯 삐걱거렸다. 뉴질랜드와의 첫 경기부터 승리는 했지만 초반 리드를 내주는 등 경기력이 매끄럽지 않았던 미국은 예상보다도 일찍 무너졌다.
2라운드에서 리투아니아를 만난 미국은 수비 약점을 철저히 공략하는 상대를 이겨내지 못하고 104-110으로 패배를 당했다. 미국에 기죽지 않은 리투아니아는 완벽한 공략 대상이 된 오스틴 리브스에게 포스트업을 시도해 득점한 뒤 혀를 내미는 세리머니까지 펼치며 신바람을 냈다.
자존심은 구겼지만 그래도 이미 벌어진 승점이 많았기에 8강 진출에는 큰 차질이 없었던 미국. 8강에서 만만치 않은 이탈리아를 상대로 37점 차 대승을 거두며 불을 끄는 듯했다.
그러나 4강에서 만난 독일은 잘 다져진 조직력을 앞세워 미국 수비를 또 한 번 무너트렸다. 다시 110점 이상을 헌납한 미국은 3-4위전에서 만난 캐나다를 상대로도 딜런 브룩스를 전혀 제어하지 못하며 노메달에 그치는 수모를 겪었다.
미국이 월드컵에서 2개 대회 연속 메달 획득에 실패하자 압도적인 세계 최고로 불리던 그들의 위상이 흔들렸다. 세계 농구의 수준이 상승한 것도 미국의 실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사령탑 또한 이를 인정했다. 스티브 커 감독은 “이제는 더 이상 바르셀로나 올림픽이 열리던 1992년이 아니다. 세계적으로 좋은 선수들과 좋은 팀이 많아졌고 월드컵과 올림픽에서 우승하는 일은 쉬운 일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했다.
그렇다면 미국이 이번 대회에서 철저하게 실패한 원인은 무엇일까? 가장 큰 문제점은 조직력이었다. 캐나다 정도를 제외하면 이번 대회에서 상위권에 오른 대부분 팀은 선수들이 오랜 시간 국가대표팀의 시스템에서 호흡을 맞춰왔다. 결승 진출에 빛나는 독일과 세르비아와 월드컵만을 위해 급조된 미국과는 조직력에서 큰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다.
스티브 커 감독 또한 "미국 팀에서 연속성을 구축하는 것이 어렵다. 단순히 우리가 해마다 많은 변화가 있기 때문이다. FIBA 팀들은 정말 탄탄하고 잘 조련됐으며 연속성을 가진 팀들이다. 그들은 오랜 시간 함께 경기를 치러온 팀들이기에 상대하는 일은 어려웠다"고 조직력 문제를 언급했다.
조직력 문제는 수비에서 여실히 드러났다. 미국 선수들은 다른 팀에 비해 수비에 대한 열정도 크게 나타나지 않았고, 손발을 맞춰온 시간이 적었기 때문에 상대 공격에 대한 대처가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았다. 제일런 브런슨과 오스틴 리브스를 공략하는 상대 득점 루트도 계속해서 나오는 등 벤치에서도 쉽게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팀을 이끌어갈 리더도 없었다. 영건 위주로 짠 로스터이기 때문에 코트 안에서 팀이 흔들릴 때 중심을 잡아줄 베테랑이 없었다. 바비 포티스와 조쉬 하트가 팀 내 최고참이지만 그간 미국 대표팀에서 활약했던 베테랑들에 비해서는 확실히 무게감이 떨어진다. 보컬 리더가 없었던 미국은 침몰 위기를 막아내지 못하고 와르르 무너졌다.
노비츠키도 이루지 못한 업적, 슈로더가 해냈다
아메리카와 유럽 팀들의 맞대결(미국-독일, 캐나다-세르비아)이 이어진 4강에서 모두 유럽이 웃으면서 결승 대진은 독일과 세르비아로 완성됐다. 첫판부터 프랑스를 대파하며 많은 이목을 끌었던 캐나다는 내친김에 우승까지 노렸지만 세르비아의 잘 정돈된 조직력 중심 농구를 극복하지 못하며 결승 진출에 실패했다.
독일과 세르비아가 월드컵 결승에서 만나게 되리라고 예상한 전문가는 많지 않았다. 대회 전 우승 후보 예상에서 두 팀 모두 5위 이내에 들지 못했던 바 있다.
독일은 직전 대회에서 18위에 그쳤던 팀이지만 세대교체 성과를 내며 점점 팀이 올라오는 단계에 있었다. 지난해 열린 유로바스켓 3위를 차지한 독일은 이번 월드컵에서도 강력한 저력을 과시했다. 데니스 슈로더, 프란츠 바그너가 확실한 핵심으로 활약하고 있다.
전통의 강호 세르비아는 현존 세계 최고의 농구 선수 중 한 명으로 불리는 에이스 니콜라 요키치가 이번 대회 불참하는 악재에도 끈끈한 모습을 보였다. 보그단 보그다노비치가 빛났고, 요키치와 이름이 비슷한 유망주 니콜라 요비치가 신성다운 면모를 뽐내는 등 주축 선수들이 골고루 좋은 활약을 펼쳤다.
전반이 동점으로 끝나면서 치열함이 이어졌던 결승에서 먼저 치고 나간 팀은 독일이었다. 세르비아의 공격이 주춤한 틈을 타 독일은 격차를 두 자릿수로 벌리며 주도권을 확실하게 가져갔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특히 알렉사 아브라모비치가 4쿼터 내내 믿을 수 없는 투지와 함께 원맨쇼를 펼치며 경기 양상을 미궁 속으로 몰고 갔다. 독일은 3점슛으로 상황 수습에 나섰지만 아브라모비치를 쉽게 막아내지 못하며 턱밑까지 쫓겼다.
그렇지만 대회 내내 독일을 이끌었던 야전사령관 슈로더가 결정적인 순간에 나섰다. 슈로더는 4쿼터 막판 폭발적인 스피드를 앞세운 림어택으로 위닝샷이나 다름없는 천금 같은 득점에 성공했다. 다 따라왔음에도 슈로더의 한 방에 힘이 빠진 세르비아는 이어진 포제션에서 턴오버가 나오며 좌절했다.
결승에 모든 걸 쏟아낸 독일의 헨릭 뢰들 감독이 감동에 젖어 털썩 경기장 구석에서 주저앉아 숨을 가쁘게 몰아쉬는 장면은 대회 최고의 순간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얼마나 독일이 간절하게 월드컵 우승을 원했는지 압축적으로 알 수 있었다.
월드컵 우승은 독일 역대 최고의 농구 스타 덕 노비츠키도 해내지 못한 업적이었다. 월드컵 3위가 최고 성적이었던 노비츠키는 독일의 우승이 확정되자 개인 SNS를 통해 바로 기쁨을 드러냈다.
독일이 이번 대회 내내 보여준 경기력과 발자취는 인상적이었다. 예선부터 쉽지 않은 조에 편성된 독일은 2라운드에서 슬로베니아, 호주와 죽음의 조에 편성되는 불운이 겹쳤지만 한 번도 패하지 않으며 순항을 이어갔다. 라트비아의 돌풍을 잠재운 독일은 우승 후보 1순위 미국마저 격파한 뒤 세르비아전 승리로 화룡점정을 찍었다.
중심에 있었던 선수가 새로운 독일의 심장 데니스 슈로더였다. NBA에서도 다소 기복은 있지만 몰아치는 능력만큼은 좋은 평가를 받아왔던 슈로더. 이번 대회 내내 독일의 앞선을 이끌며 존재감을 발휘한 슈로더는 결승에서 결정적인 득점으로 우승 트로피를 가져왔다. 당연히 대회 MVP 또한 슈로더의 몫이었다.
최고의 선수로 등극한 슈로더는 동료들과 코칭스태프에게 공을 돌렸다. 그는 “믿을 수 없는 팀이다. 우리는 7월 초에 시작했고, 감독님께서 팀을 하나로 묶어주는 일을 훌륭하게 해내셨다. 모두가 성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라커룸에 있는 모든 사람들, 독일에서 멀리 오신 가족과 팬들과 이걸 공유할 수 있다는 사실은 큰 축복이다. 우리가 팀이 아니었다면 이 일을 해내지 못했을 것"이라고 우승 소감을 밝혔다.
그러면서 ”결승 전까지 우리의 경기가 독일에서 생중계되지 못했는데 다음 대회는 모든 경기가 생중계되길 바란다. 10년 전에는 팀에 노비츠키가 있었지만 그 외에는 사람들이 아무도 독일에 누가 있는지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제 독일인들도 우리가 국가를 대표하는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인식하기 시작했다. 우리도 존중을 원한다"고 뼈 있는 말을 남겼다.
독일의 우승으로 피날레를 장식한 2023 FIBA 월드컵. 다음 월드컵은 2027년에 개최되며 역대 최초로 중동 국가에서 열릴 예정이다. 카타르에서 열리는 2027 FIBA 농구 월드컵은 어떤 스토리와 함께 돌아올까?
EXTRA STORY
파리에 모이는 기대감
월드컵에서 제대로 자존심을 구긴 미국은 2024 파리 올림픽에서 명예 회복에 도전한다. ‘킹’ 르브론 제임스가 국가대표팀에서의 라스트 댄스를 위해 드림팀 구성을 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르브론이 리쿠르팅을 시도하고 있는 선수는 스테픈 커리, 케빈 듀란트, 앤써니 데이비스, 제이슨 테이텀 등이며 성사될 경우 역대급 초호화 드림팀이 탄생할 전망이다. NBA 스타들의 경우 휴식을 이유로 비시즌 국가대표팀 이벤트에 불참하는 일이 잦지만 최고의 슈퍼스타인 르브론의 설득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질 수 있다.
개최국 프랑스 또한 226cm의 전세계 최고 유망주 빅터 웸반야마가 일찌감치 파리 올림픽 참가를 선언하며 기대감을 키웠다. 프랑스의 실패를 TV로 지켜본 웸반야마는 파리 올림픽 우승을 겨냥하고 있다는 말을 남겼다.
2023 FIBA 농구 월드컵 결과 및 수상자
우승 : 독일
준우승 : 세르비아
3위 : 캐나다
4위 : 미국
MVP : 데니스 슈로더(독일)
베스트5 : 샤이 길저스-알렉산더(캐나다)-데니스 슈로더(독일)-보그단 보그다노비치(세르비아)-앤써니 에드워즈(미국)-루카 돈치치(슬로베니아)
라이징 스타 : 조쉬 기디(호주)
감독상 : 루카 반치(라트비아)
최우수 수비수 : 딜런 브룩스(캐나다)
사진 = 로이터/뉴스1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