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석연의 더 멘트] 유승희와 작전명 인천상륙작전

2023-08-28     청주, 원석연 객원기자

지금으로부터 2년여 전인 2021년 1월, 인천 도원체육관에는 있는 관중들은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었다. 신한은행과 우리은행의 피를 말리는 시소 게임 혈투. 경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4.8초 73-71 신한은행의 리드. 우리은행 선수단이 마지막 작전타임을 위해 모였다.

“(홍)보람이 지금 누가 막고 있어?” 위성우 감독이 작전판을 들며 말했다.

유승희요.

홍보람의 대답을 들은 위 감독이 덤덤히 말을 이어갔다. “보람이가 잡아 줘야 돼. 소니아는 (반대쪽으로) 가. 왜냐면 (김)단비가 (공을) 못 잡게 할 수 있으니까... 그러고 나서 (박혜진이) 3점 쏴 버려. 어쨌든... 연장 가면 못 이겨.”

 

선수들의 마크맨을 체크한 위 감독의 선택. 사이드라인의 박혜진이 숏 코너의 홍보람에게 패스, 곧바로 박지현의 스크린을 받아 코너로 이동하고 다시 홍보람의 패스를 받아 슈팅. 2점 차였지만 동점이 아닌 3점 한 방으로 역전을 노리는 과감한 수.

그리고 이 과정에서 신한은행에서 가장 수비 센스가 좋은 김단비의 매치업인 김소니아를 공에서 가장 먼 쪽으로 보내면서 제거하고, 상대적으로 경험이 약한 유승희의 매치업인 홍보람을 패서로 활용하는 위성우 감독의 디테일.

“패스 받았습니다. 외곽 빼 주고요... 박혜진의 석 점은...... 림을 통과!!! 아! 대단한 감독이고, 대단한 선수입니다!”

작전타임 몇 초 뒤, 강성철 캐스터의 샤우팅이 도원체육관에 울려 퍼졌고 경기는 그렇게 우리은행의 승리로 끝났다. 유튜브에서 하이라이트 조회수 430만 회를 기록한 흥행 대작이자 대한민국 여자농구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패턴일 바로 그 장면. 인천 도원체육관에서 펼쳐진 우리은행의 ‘인천상륙작전’.

‘제발 팀에 민폐만 되지 말자… 제발 팀에 민폐만 되지 말자… 제발…’

그리고 이 패턴이 세상에 나온 뒤 꼭 944일이 되는 날, 유승희는 2023 박신자컵 개막전이 열리는 청주체육관으로 가는 버스에 앉아 주문을 걸고 있었다.

신한은행에서 우리은행으로 트레이드되어 치르는 첫 공식전. 그러나 이번 여름 비시즌 훈련의 스스로에게 만족스럽지 못했던 성과와 지난 시즌 부진, 그리고 그를 괴롭혔던 여러 루머들... 우리은행 데뷔전을 치러야 하는 유승희의 머리 속은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로 가득 차 울렁거렸다.

“코트에 들어갔는데 제가 팀에 도움이 되는 게 하나도 없었어요” 유승희가 이날 경기를 회상했다. “3점슛도 찬스가 나서 던진 게 아니라 ‘뭐라도 제발 돼라’는 마음으로 기계적으로 던지고 있더라고요.” 

구기 종목 중 가장 큰 공을 가장 작은 골대에 집어넣는 스포츠인 농구에서 슈팅은 가장 어려운 영역이다. 최고의 컨디션으로 확신에 차서 던져도 10개 중 6개가 빗나가는 게 슈팅인데, 움츠러든 어깨로 던진 유승희의 슛은 하염없이 림을 외면했다. 

0/1, 0/2, 0/3, 1/6... 지난 시즌 일본 W리그 준우승을 차지한 강호 도요타 안텔롭스를 상대로 한 우리은행 데뷔전에서 4쿼터까지 유승희의 야투율은 팀 내 최악인 23%.

유승희의 부진에도 우리은행은 에이스 김단비의 분전으로 경기를 연장전까지 끌고 갔지만, 4쿼터 6.5초를 남기고 75-78로 뒤지며 이제는 정말 끝이 보이는 상황. 위성우 감독이 타임아웃을 불러 마지막 작전을 그렸다.

사이드라인의 유승희가 숏 코너의 박지현에게 패스, 곧바로 김단비의 스크린을 받아 코너로 이동하고 다시 박지현의 패스를 받아 슈팅... 어딘가 익숙한 그 패턴. 900일 전 도원체육관에서 나왔던 ‘인천상륙작전’. 당시 패턴에 희생양이었던 유승희가 이제는 돌고 돌아 이 패턴의 주인공이 된 것이다.

“넘겨주고, 오른쪽입니다! 유승희 석 점...... 들어갑니다! 유승희의 쓰리 포인트! 78대78입니다!” 

유승희의 손을 떠난 공의 상륙 지점은 2차 연장이었고, 2차 연장이 끝난 뒤 전광판의 최종 스코어는 93-90, 우리은행은 극적인 승리를 거뒀다. 4쿼터까지 40분 동안 8점에 그쳤던 유승희가 연장전 10분 동안 넣은 득점은 12점.

“그냥 하는 말이 아니고요.” 위성우 감독이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유승희를 보며 말했다. “제 옆에 이 선수가 오늘 수훈 선수로 인터뷰실에 들어와 기분이 참 좋습니다. 팀에 오고 운동을 하루도 안 빠지고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끝난 것 같았던 유승희의 농구 시계가 다시 돌아간다. 우리은행의 돌고 도는 패턴처럼, 가을이 되면 언제나 찾아오는 농구처럼.

 

사진 = 이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