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귀환, 부천의 여왕이 돌아왔다②
①편에 이어...
#3
철저한 오판이었다. 김정은이 시장에 나오자 모든 구단이 움직였다. 하나원큐가 예정했던 ‘프랜차이즈 스타에 대한 배려’는 굳이 고민할 이유도 없었다.
당시 여자농구 FA 제도에서 김정은 급의 선수가 시장에 나온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부상과 나이 등의 변수에 대해 모든 구단들은 “김정은 정도의 선수면 일단 영입하고, 그런 부분은 후에 판단해도 늦지 않다”고 입을 모았다.
농구단의 정상적인 운영을 이미 포기했던 KDB생명만 윗선이 움직이지 않았다. 당시 KDB생명의 김영주 감독은 “김정은이 나왔는데도 영입에 나서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냐”며 무능한 수뇌부를 성토하기도 했다. KDB생명을 제외한 4개 구단이 모두 김정은을 잡기 위해 달려들었고, 치열한 영입전 끝에 우리은행이 김정은의 새로운 행선지로 결정됐다.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된 김정은의 마음은 착잡했다. 새로운 팀에 대한 기대도 있었지만, 평생 머물 것 같았던 하나원큐를 떠난다는 것이 쉽게 와 닿지 않았다. 결국 본인의 선택이었지만, 그런 결정을 하도록 내몰린 것도 속상했다.
입단 후 플레이오프 한 번 제대로 치르지 못했지만 애틋함이 컸다. 많은 일을 겪었다. 신세계 해체 후 하나원큐의 인수 재창단, 그리고 첼시 리 사태로 인한 위기를 오롯이 지켜봤다.
신세계 해체 당시 WKBL과 다른 선수들은 위기였지만 김정은에게는 선택지가 있었다. 중국 리그도 아시아쿼터제를 운영하고 있어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는 데에는 문제가 없었다. 설령 5개 구단 체제가 된다 해도, 국가대표인 김정은이 무적선수가 되도록 두지는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김정은은 팀에 머무는 것을 선택하고 선수들과 함께 훈련하며 견뎠다. 그는 “주전급 선수들이 흩어지면 팀 인수가 더 어려워질 것”이라며 주축이던 김지윤, 허윤자와 함께 잔류를 택했다. 그리고 하나원큐 인수 창단의 기쁨을 누릴 수 있었다. 팀의 초대 주장이기도 했다.
2015-16시즌에는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했고 챔피언결정전까지 올랐다. 데뷔 12년 만에 처음 경험하는 플레이오프에 김정은은 어린 아이처럼 펑펑 울었다.
하지만 시즌이 끝난 후 한국계라던 첼시 리의 혈통사기가 밝혀졌고 팀의 자랑스러웠던 첫 봄 농구는 WKBL의 치욕적인 역사가 되며 기록에서 삭제됐다. 이때에도 김정은은 자신보다 팀 운영에 심각한 변수가 생기지 않을까를 먼저 걱정했다.
그렇게 산전수전을 겪은 팀이 하나원큐였다. 주한 브루나이대사관 뒤편, 서울시 종로구 청운동에 위치했던 하나원큐 체육관은 김정은의 그런 일대기가 모두 묻어있던 곳이다.
“나 거기 세 번 가봤어. 일부러 간 건 아니고 근처에 갔는데 그냥 걸음이 거기로 가게 되더라고요. 지금도 공사중이죠? 문 밖에서 들여다봤는데 내가 갔을 때도 건물은 다 철거했더라고요. 언니들, 동생들이랑 같이 했던 시간들이 거기 다 있는데... 좋았던 기억이든 나쁜 기억이든 거기에 두고 온 게 가장 많을 수밖에 없잖아요. 그런데... 이제 아무것도 없어요.”
김정은이 우리은행으로 떠난 후 하나원큐도 숙소를 용인에 위치한 하나은행 연수원으로 옮겼다. 지금의 인천 청라로 옮기기 전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김정은은 2017년 여름 인터뷰 당시 그 모든 기억이 머물렀던 체육관이 사라진 것에도 마음 아파했다.
“솔직히 속상하기도 하고 미운 마음도 있죠. 그래도 고마워요. 신세계가 해체하고 막막했을 때, 우리 손을 잡아준 곳이 하나은행이잖아요? 첼시 리 사건이 터졌을 때도 끝까지 우리를 지켜줬고요. 그래서 고마워요.”
김정은은 하나원큐와 이렇게 이별했다.
#4
이별의 결과는 극명하게 갈렸다. 하나원큐는 당시의 FA 시장을 읽는 데도 실패했고, 에이스였던 김정은에 대해서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다.
김정은은 이적과 동시에 화려하게 부활했다. 위성우 감독의 조련을 거치며 장점이던 공격력에 수비력까지 갖춘 공수겸장으로 우뚝 섰다. 팀을 통합우승으로 이끌며 요원하기만 했던 챔프전 MVP를 수상했다.
김정은은 우리은행에 있던 6시즌 중 5시즌 동안 평균 10+ 득점을 올렸고, 출전시간과 득점이 줄어든 지난 시즌에도 플레이오프와 챔프전에서는 11.4점 4.0리바운드, 경기당 3개의 3점슛을 50% 확률로 적중시키며, 자신의 가치를 입증했다.
반면 하나원큐에는 시련의 계절이 찾아왔다.
김정은을 시작으로 염윤아, 강이슬이 팀을 떠났다. 김정은 이후 팀을 떠난 주요 선수들은 이적과 동시에 우승을 차지하며 기쁨을 누린 반면, 하나원큐는 돌고 돌아 10년째 리빌딩이라는 달갑지 않은 결과를 마주하고 있다. 김정은이 우리은행에서 133승 36패를 기록하는 동안 하나원큐가 거둔 성적은 57승 108패다.
#5
“솔직히 미웠죠. 좋게 나온 건 아니었으니까... 그런데 하나원큐가 계속 안 풀리고 못하니까 그건 또 속상하더라고요. 처음에는 나 없이 잘되면 더 미울 것 같았는데, 안 되는 모습을 보면 답답하고 짜증도 났어요. 나도 이게 무슨 마음인지 잘 모르겠는데 아무튼 그랬어요.”
김정은이 팀을 떠나던 당시에도 진행 중이던 하나원큐의 리빌딩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리빌딩에는 두 가지 큰 축이 필요하다. 하나는 차세대 주역으로 떠오를 재원들이고, 다른 하나는 그들이 정상적으로 올라설 때까지 이끌고 희생하며 길잡이 역할을 해줄 구심점이다. 6년간의 화려한 외출을 마치고 돌아온 ‘큰 언니’ 김정은이 이 후자의 임무를 맡는다.
“정상급 팀에서 6년간 뛰면서 저도 배우고 성장한 게 있다고 생각해요. 그런 것들을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게 가장 중요할 것 같아요. 같은 프로 선수지만 우리보다 더 잘하고 나은 팀들을 보면서 배울 점은 배워야 해요. 우리은행도 그런 팀 중 하나잖아요. 하지만 시합을 하면서 배우는 것과 겁먹고 피하는 건 달라요. 그런 모습은 절대 없어야 해요.”
시간이 마냥 길지는 않다. 김정은은 하나원큐와 2년 계약을 맺었다. 사실상 그의 마지막 선수 생활을 2년으로 설정한 것이다. 이 기간 동안 김정은은 하나원큐 변화의 초석을 놓고자 한다.
“제가 건강하던 전성기였던 시절에도 이 팀에서 성적을 내지는 못했어요. 올해 제가 왔다고 해서 우리 팀의 전력이 갑자기 반등하는 것도 아니고요. 객관적으로 전력이 떨어지는 게 맞아요. 그래도 10승 이상은 하고 싶어요. 지금은 제가 돌아온 걸 ‘낭만’이라고 말씀해주시지만, 결국 시즌 시작해서 성적이 따르지 않으면 욕도 먹고 비난도 받을 거예요. 나이 먹고 안 좋은 소리 들으면 서러운 게 사실이지만 그것도 각오가 되어 있어요. 당장의 성적보다는 하나원큐가 점점 더 비전 있는 팀으로 발전할 수 있도록 제 모든 힘을 쏟을 생각이에요. 나중에는 선수들이 정말 오고 싶은 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수뇌부와 프런트가 바뀌면서 하나원큐는 이적 시장과 FA 시장에서의 악연을 끊고자 최근 몇 년간 숱한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누적된 고정관념은 쉽게 바뀌지 않았다. 노력에 비해 성과가 빠르게 나타나지 않았다.
그래서 김정은의 복귀는 더 의미가 있다. 젊고 패기 있는 구단으로 야심차게 WKBL에 도전했지만 선수 관리에서의 미숙함이 나타난 시발점이었던 사건의 주인공이 돌아온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스스로 쇄신의 중심에 서고자 한다.
김정은은 “이제 이 팀을 떠날 일은 없을 것 같다”고 웃으며, “제 발로 나갔다가 제 발로 들어왔는데도 많이 환영해주셔서 감사하다”고 복귀 인사를 전했다. 나간 것도 돌아온 것도 분명 김정은의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하나원큐를 먼저 놓은 적이 없다. 아직까지 ‘하나원큐’라는 이름이 입에 붙지 않아 ‘하나은행’이라고 말하는 것만 빼면, 그는 이미 이 익숙한 공간에 충분히 적응을 마쳤다.
일단 준비된 시간은 2년이다. 김정은이 WKBL 역대 최다 득점 신기록을 작성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하나의 역사로 자리를 굳힌 김정은은 ‘역대 최고의 신인’이라는 신화를 만들었던 친정에서 ‘역대 최고의 스코어러’로 자신의 커리어를 완성할 것이다. 그리고 김도완 감독이 이끄는 ‘하나원큐의 변화와 비전’에도 선두에 선다.
김정은은 어디에 서있든, 스스로 빛이 나는 선수다. “1위 팀에서 꼴찌 팀을 선택했다”고 하지만 유니폼이 달라졌다고 그의 가치가 퇴색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이 김정은의 존재감이고 클래스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 스퍼트. 그는 혼자가 아닌 ‘팀과 함께’를 선택했다. 다시 입은 유니폼과 함께 찬란하게 빛날 김정은의 무게감 있는 질주를 응원한다.
해당 기사는 <루키> 2023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사진 = 박진호 기자, 이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