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긍정적. 자존감. 그리고 강이슬

2022-11-03     박진호 기자

“인터뷰 요청 올 거 같아서 미리 선수 칠 게요. 저 방출됐어요.”

2022년 4월 29일 새벽 4시. 유럽 축구 시청으로 잠을 자고 있지 않다가 뜬금없는 메시지 한 통을 받았다. WKBL에서 누구보다 긍정적이지만, 그러면서 자존감 역시 누구에게 뒤지지 않는 선수. 현역 여자농구 최고의 슈터 강이슬에게 미국에서 온 메시지였다. 삼천포여고 출신의 올라운드 플레이어로 각광을 받던 그가 프로 데뷔 후, 최고의 슈터로 거듭나고, 리그에서 ‘가장 어린 에이스’로 성장한 이야기는 이미 수차례 다룬 바 있다. 이제 그 후의 이야기를 풀어보고자 한다.

#1
2020년 4월 13일. 인천 송도에서 강이슬을 만났다. 마침 그 해의 FA(자유계약선수) 시장이 진행되던 시점이었다. 족쇄와도 같았던 WKBL의 FA 제도가 일부 변경됐고, 이로 인해 2차 FA 자격을 획득한 선수는 원소속 구단과의 우선 협상 없이 타 구단과 이적을 논의할 수 있게 됐다.

우선 협상이 없다는 것은 기존에 존재했던 원 소속 구단의 제시액보다 높은 금액을 받아야만 한다는, 쉽게 말해 팀의 에이스급 선수에게 연봉 상한선(3억원)만 제시하면 어느 팀도 못 가게 막을 수 있었던 터무니없는 제도의 변화를 말하는 것이다. 그리고 하필 그 시즌에 개인 통산 5번째 정규리그 MVP를 수상한 박혜진(우리은행)이 FA 시장에 나오게 됐다. 박혜진의 거취를 놓고 무조건 잔류를 시키려는 우리은행과 반드시 영입하려는 KB의 치열한 경쟁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 FA 시장의 흐름은 강이슬에게도 중요했다. 진행 중인 FA시장의 주인공은 박혜진이었지만, 그 다음 해는 강이슬이 FA 최대어였기 때문이다.

“선수가 직접 결정할 수 있는 상황이 된 거니까, 이게 맞다고 생각해요. (박)혜진 언니가 어떤 결정을 할지도 기대가 되고요. 언니한테 ‘존경하는 선배님의 결정을 보고, 저도 내년에 참고하겠습니다’라고 했더니 ‘양아치’라고 욕하던 대요.”

강이슬은 박혜진의 삼천포여고 4년 후배다. 그리고 박혜진 이후 삼천포여고가 배출한 WKBL 1순위 신인이기도 했다. 현재까지는 강이슬이 삼천포여고가 배출한 마지막 1순위 신인이다.

박혜진의 행보는 다음 시즌 강이슬에게 참고가 되는 것 이상이었다. 박지수라는 절대적인 센터를 앞세워 V1을 달성했지만, 타이틀을 지키는데 실패했던 KB는 본격적인 전력 강화를 노리고 있었다. 만약 박혜진을 놓친다면 다음 타겟은 강이슬이 될 거라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다.

당시 KB의 감독이었던 안덕수 KBS N 해설위원은 “선수들을 성장시키는 것도 중요하지만, 강팀의 가장 핵심적인 요소는 좋은 선수들을 많이 보유하는 것”이라며, 전력 강화를 위해 매년 영입하고자 하는 선수들을 마음에 품고 있었다. 다만 박혜진을 영입한다면 샐러리캡으로 인해 이듬해 강이슬의 영입은 힘들지 않겠냐는 게 현장의 평가. 그러나 박혜진 영입에 실패하면 강이슬에게 적극적으로 다가설 것이라는 예상이 가능했다.

“저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3점슛은 내가 리그에서 최고라고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는데, 더 잘해서 우리 팀 외에 다른 팀들도 모두 탐내는 선수가 되고 싶어요. 진짜 잘해서 ‘여자농구에도 FA로이드가 있다’는 말이 나오게 하고 싶거든요. 아직은 팀의 에이스로서는 무게감이 부족한 거 같아요.”

어차피 아직 일어나지 않은 미래의 일. 혹시 “가고 싶은 팀이 있냐”고 물어봤다.

“혹시, 우리 팀에서 나 필요 없대요? 내가 팀이랑 사이 안 좋다고 소문이라도 났어요? 저, 하나은행(당시는 ‘하나원큐’라고 팀명이 바뀌기 전) 좋아해요! 우리 팀에 남을 거라는 생각은 왜 안하시는 거죠?”

FA가 이날의 주제는 아니었기에, 이 이야기는 더 깊게 진행하지 않았다. 하지만 미래의 행보에 열쇠가 될 법한 이야기가 없지는 않았다.

“만약에 (박)지수한테 연락이 온다면 당연히 흔들리겠죠. 우리 팀 동생들도 다 친하고 애틋하지만, 솔직히 지수가 같이 뛰자고 하는데 흔들리지 않을 선수가 있을까요? 아! 지수가 (박)혜진 언니한테는 연락 안했대요?”

그러더니 문득 “내가 만약 KB로 가게 되면, 박지수가 2차 FA 자격을 가질 때까지는 시간이 얼마나 남냐”고 물었다. 4년. 설마 KB와 4년 계약할 거냐고, 그럴 거라면 미리 하나은행에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농담을 했다.

“에이~ 왜 이래요, 프로끼리... 2년씩 끊어서 두 번에 가야죠.”

강이슬도 유쾌하게 웃어 넘겼다. 그런데, 그게 현실이 됐다.

#2
“맞아. 그랬었어. 와... 그러고 보니 진짜 그렇게 됐네요. KB로 이적했고, 2년 계약이었고... 지수 연락도 받았어.”

지난 10월 12일. 시즌 시작을 앞두고 프로 4개 구단의 연습경기가 한창이던 부산에서 다시 강이슬을 만났다. 다시 FA를 앞두고 있는 강이슬이다. 어쩌면 2년 전 봄과 같은 마음일 수도 있다. 강이슬은 당시 ‘FA로이드’도 언급했지만 그에 앞서 플레이오프 진출의 중요성을 더 강조했다. 2019-2020시즌, 하나원큐는 정규리그 3위에 올라있었지만, 코로나19로 리그가 조기 중단되며 플레이오프를 치르지 못했다. 분전을 했음에도 새롭게 맞이하는 2020-2021시즌, 하나원큐 전력에 대한 주변의 평가는 높지 않았다. 강이슬은 플레이오프 진출이 우선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현재 강이슬과 KB의 입장은 그 당시 강이슬-하나원큐와 아주 같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아주 다르지도 않다.

지난 시즌 KB는 정상에 올랐다. 강이슬은 꿈에 그리던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았고 KB의 V2 통합 우승의 중심에 섰다. 강이슬이 KB로 이적했을 당시, 하나원큐에서 에이스 롤을 맡았던 강이슬이 기존의 박지수와의 역할 분담에서 충돌할 수 있다는 지적도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우려는 나타나지 않았다.

2020-2021시즌 26경기에서 평균 37분 6초를 뛰며 18.2점 7.2리바운드 2.4어시스트를 기록했던 강이슬은 KB로 이적 첫 시즌에 28경기 평균 33분 7초 출전에 18.0점 5.3리바운드 2.9어시스트를 기록했다. 2점슛과 3점슛 성공률은 4.5~5.0% 정도 상승했다. 박지수도 마찬가지. 이전 시즌보다 평균 출전시간이 5분이나 줄어들며 체력 안배에 성공하면서도 각종 기록은 이전과 비슷한 수준을 유지했고, 야투율은 더 좋아졌다.

강이슬은 박지수와 자연스럽게 연동했고, 리그 최고의 원투펀치로 자리 잡았다. 우려했던 잡음은 없었고, 기대했던 효과는 그대로 나타났다. 강이슬 스스로 “우리 팀의 1옵션은 박지수”라며, 팀의 필요에 맞는 모습으로 자신의 장점을 극대화했다. 그렇게 챔피언이 됐다.

하지만 이번 시즌은 이전과 조금 다르다. 박지수가 팀에 합류하지 못한 상황에 시즌을 시작해야 하는 KB에 대해 매우 다양한 의견이 존재한다.

‘박지수가 없는 KB는 리그 최약체’라는 주장도 있다. 우리은행과 삼성생명의 전력 강화로 인해, 박지수라는 절대전력이 함께하지 못하는 KB는 우승권은 커녕 플레이오프 진출도 장담하기 힘들다는 의견이 속속 등장한다. 디펜딩 챔피언에게 무척이나 자존심 상하는 평가다.

“괜찮아요. 저 말고 다른 선수들은 기분 나쁠 수도 있겠죠. 그런데, 저는 익숙해요. 프로에 들어오고 나서, 작년 말고는 한 번도 좋은 평가를 받은 적이 없었거든요. 그래서 아무렇지 않아요. 그렇게 안 되면 되는 거니까요.”

강이슬도 박지수의 빈 자리를 인정했다.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는 큰 공백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강조했다. 자신은 물론 팀에 대한 믿음이 확고했다.

“이전에 하나원큐에서 치고 올라가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은 저한테 있었죠. 에이스라고 하지만 너무 어렸어요. 그때 기사에도 ‘가장 어린 에이스’라고 하셨잖아요. 그게 맞아요. 물론 그때의 지수도 어렸지만, 지수는 좀 달라요. 걔는 그냥 에이스로 태어난 애고, 저는 너무 어렸던 거 같아요. 그리고 선수들도 어렸죠. 그런데 지금은 달라요. 저도 그때보다는 어느 정도 성장했다고 생각해요. 그리고 제가 의지할 수 있는 언니들도 있고요.”

강이슬은 팀 전체의 힘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강팀이 강함을 유지하는 비결이 이런 거구나’라고 느낀 게 있어요. 작년 플레이오프 1차전 때, 저 솔직히 정말 긴장했거든요. 진짜 긴장 안하는 스타일인데 그때는 얼었어요. 그런데 다른 선수들은 전혀 그런 게 없더라고요. 늘 플레이오프에 올라가던 선수들이라 그냥 정규리그 치르듯이 경기를 하더라고요. 승부처나 고비에서도 저만 잘하면 되는 상황이었죠. 이런 차이점들이 분명 이번 시즌에도 리그를 치르는 데 큰 힘이 될 거에요.”

꾸준히 우승후보로 평가받고, 항상 상위권에서 순위 경쟁을 치르며 쌓인 경쟁력과 내공은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와 함께 강이슬은 동료들에게도 확실한 메시지를 던졌다. 그는 자신이 늘 강조한다는 세 가지를 말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KB에서 뛴 1년 동안 자신이 느낀 점을 가감 없이 전달했다.

“제가 늘 팀에서 하는 말이 있어요. 우선 이런 조건에서 농구하는 걸 감사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거죠. 저나 (염)윤아 언니가 이런 말을 하면, 하나원큐 팬들이 안 좋은 이야기를 하셔서 조심스럽기도 한데, 사실 하나원큐도 선수들한테 정말 잘해주세요. 시설만 봐도 아시잖아요? 정말 선수들한테 신경을 많이 써주고, 저도 그 팀에서 데뷔하고 많이 성장해서 지금까지 올 수 있었어요. 그런데 KB는 지원 부분에서 더 적극적이라는 거죠. 농담처럼 ‘아.. 우리 이런 게 지금 있으면 좋겠다’라고 하면, 다음 날 그게 숙소에 와 있다고 할 만큼요. 지원 스태프도 많잖아요. 남자팀까지 다 해도 우리가 가장 많다면서요? 이런 부분에 늘 자부심을 가져야 하고, 또 감사하면서, 거기에 어울리는 모습을 보여야 하는 게 책임이고 의무죠.”

실제로 KB는 KBL과 WKBL을 통틀어 가장 많은 스태프를 보유하고 있다. 코칭스태프와 지원스태프 인원이 총 14명으로 다른 WKBL 구단들에 비해 최소 4명에서 6명까지 많은 수다. 현장에 직접 나서는 프런트도 타 구단보다 많다. 멘탈 코치가 존재하는 유일한 WKBL 팀이기도 하다. ‘지도자가 가르치고, 선수는 잘하면 된다’는 단순한 명제가 만연한 현장에서 이토록 시스템을 정비 해놓고 있는 팀은 찾기가 드물다.

금융그룹들이 중심을 잡고 있는 만큼, 여자농구 구단들은 필요의 확실성이 있는 부분에 대해서는 아낌없는 지원에 나선다. 다만, 보수적인 색채도 강한만큼 아무도 하지 않는 지원을 선제적으로 집행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다.

이런 가운데 KB는 가장 적극적으로 다양한 지원과 변화를 모색하는 구단이다. 타 구단 감독들도 많은 트레이너들을 비롯한 KB의 지원 스태프 구성에는 부러움을 나타낸다. 김완수 KB 감독은 지난 시즌 우승 이후 선수들은 물론 지원 스태프들의 헌신과 이러한 지원을 해준 구단이 우승의 숨은 힘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지수랑 같이 농구할 수 있다는 것도 감사해야 돼요. 지수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소리를 듣는 것도 사실이지만, 지수로 인해 가능한 게 더 많거든요. 다른 팀에서는 시도도 못할 것들을 지수가 있어서 해 볼 수 있는 게 정말 많아요. 그 정도 기량의 선수와 함께 뛰면서 나도 모르게 성장하고, 그리고 노력한 만큼, 때로는 그 이상의 성과도 받을 수 있다는 거에 늘 감사해야 해요.”

“저는 프로에 데뷔한 후, 언제나 목표가 플레이오프였어요. 플레이오프에 뛰고 싶다는 간절함과 절박함, 그리고 그게 안 될 때마다 정말 크게 좌절하기도 했고요. 그런데 우리 팀 선수들은 그런 마음을 몰라요. 이제 팀에 막 들어와서 경기를 많이 안 뛴 선수들도 목표가 우승이에요. 플레이오프는 당연히 가는 거고요. 그런 절박함과 아픈 마음을 느끼지 않고, 자신감만 갖고 농구를 할 수 있다는 건 정말 큰 축복이에요. 전 우리 팀 선수들이 이 세 가지에는 늘 감사함을 갖고, 그리고 지금 누리는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고, 항상 이렇게 농구 할 수 있도록 더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본인이 느낀 이러한 변화 때문일까? 그래서 강이슬은 똑같이 FA를 앞둔 시즌이지만 2년 전과는 상황이 많이 다르다고 말한다.

“팀이 도전하는 목표에 실패하다 보면 정말 많은 말들이 안팎에서 나오잖아요. 그때는 ‘강이슬 때문에 안 된다’, ‘강이슬이 없어야 한다’라는 말도 들으면서 생각이 많았어요. 부족한 것도 알고, 내가 더 성장해야 한다는 것도 알지만, ‘정말 내가 우리 팀의 걸림돌인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팀에 대한 애정? 그건 분명했죠. 데뷔해서 몇 년을 있었던 팀인데요. 그건 갖지 말라고 해도 생길 수밖에 없어요. 그런데도 생각이 많아질 수밖에 없던 거죠. 지금은 적어도 그런 건 없어요. 편해요. 농구만 하면 되고, ‘이번 시즌 끝나고 내가 어떻게 해야 하나’에 대한 고민도 없어요. 그게 개인적으로는 2년 전과 지금의 다른 점인 것 같아요.”

이쯤 되면 강이슬의 다음 FA는 별 의미가 없을 것도 같다.

“아니.. 잠깐만! 구단에서 나오셨어요?(웃음) 그건 아니죠! 어쨌든 제 가치를 높일 수 있도록 더 노력할 거고요, 일단 시즌을 목표대로 치르는 게 우선이죠. 그리고 나서 좋은 조건들을 따져봐야죠!”(웃음)

시즌의 목표에 대해 강이슬은 “자신있다”는 말을 남겼다. 개인적인 목표에 대해서는 “딱히 없다”고 해, 3점슛 기록을 말하자 “그건 그냥 늘 가져가는 거라 새로울 게 없는 목표”라며, 다른 이야기를 더 하지는 않았다. 3점슛과 관련한 기록은 더 이상 강이슬에게 새로울 게 없는 것. 어쩌면 목표라기보다 본인이 가는 농구인생에서 당연히, 그리고 반드시 수확해야 하는 성과가 되어버린 것 같다.

적어도 3점슛과 관련해서, 강이슬이 갖는 그러한 자신감은 교만이 아니다. WKBL 출범 이후, 강이슬은 3점 득점상(최다 3점슛)과 3점 야투상(최고 3점 야투율)을 가장 많이 수상한 선수다. 2014-2015시즌에 처음으로 3점 득점상을 수상한 강이슬은 2017-2018시즌부터는 5년 연속 이 부문 정상을 지키고 있다. 6회 수상자다. 3점 야투상 역시 2014-2015시즌에 처음 수상한 후, 총 5번을 차지했다. 이 두 부문을 함께 수상한 것도 무려 5번. 강이슬은 WKBL에서 가장 많은 3점슛을 가장 정확하게 성공하는 선수다.

현재 강이슬의 커리어 통산 3점슛 성공률은 39.4%. 무려 40%에 육박한다. WKBL 역사를 통틀어 강이슬보다 높은 개인 통산 3점슛 성공률을 기록한 것은 왕수진(전 금호생명, 41.9%)과 밀라(40.3%) 뿐이다. 그러나 3점슛 성공 개수에서 엄청난 차이가 난다. 왕수진은 317개, 밀라는 77개의 3점슛을 시도해 현재의 기록을 만들었다. 반면 강이슬은 지난 시즌까지 무려 1608개의 3점슛을 던졌고 그중 633개를 성공했다. 양과 질에서 독보적이다.

#3
강이슬은 박지수 없이 시작하는 시즌에 대해서도 팀 KB가 분명 무언가를 보여줄 거라고 강조했다.

“지수가 돌아오기 전까지 잘 버티면, 그 다음에 더 큰 결과로 향해 갈 거라고들 하시더라고요. 물론 그렇겠죠. 지수가 오면 분명히 저희는 더 강한 팀이 될 테니까요. 그런데 저는 지수가 오기 전에도 우리가 어느 정도의 경쟁력을 보여주면서 순위 안에 있을 수 있다고 믿어요.”

이는 강이슬 뿐 아니라 KB의 선수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다. 지난 10월, 부산에서 진행된 4팀 간의 연습경기에서 KB의 결과가 좋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선수들은 모두 박지수의 복귀 전에도 순위권에서 경쟁을 펼치겠다고, 충분히 그럴 수 있다고 자신했다. 이들의 이러한 모습이 ‘근거 없는 자신감’일지, ‘챔피언의 자존감’일지는 시즌이 시작해봐야 할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지수는 돌아옵니다. 누구보다 강한 아이에요. 아시잖아요? 지금 지수가 놓인 상황을 보고 ‘멘탈이 약하다’고 하는 분들도 있던데, 말도 안 되는 얘기죠. 옆에서 보면 정말 감탄할 정도로 강해요. 지수는 당연히 돌아올 거고, 그리고 건강하게 다 나아서 돌아와야 하는 만큼 저희들 중 누구도 조바심을 내지 않아요. 빨리 오라는 말도 안하고요. 다 나으면, 뛸 수 있으면 알아서 올 거예요. 다만 우리가 제대로 못해서 지수가 다 낫기 전에 복귀를 서두르면 안 되니까, 충분히 여유를 가질 수 있도록, 그런 모습을 보일 겁니다.”

#4
이제는 강이슬이 별로 돌아보고 싶지 않은 이야기. 올해 4월의 짧았던 미국 생활이다. 선수생활을 하며 막연하게 꿈꾸던 WNBA 진출이 가시권에 들어온 건 3년 전 하나원큐 시절이었다. 강이슬은 시즌 중 당시 WNBA의 디펜딩 챔피언이었던 워싱턴 미스틱스와 트레이닝 캠프 계약을 맺었다. 하지만 코로나19로 인해 미국행이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 2022년 4월, 드디어 미국행에 올랐다.

적지 않은 나이에 나서는 도전이었지만 크게 무리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강이슬의 미국행과 관련해서는 국내에서도 여러 이야기가 돌았다. 정식 계약이나 다름없기에 최종 엔트리에 드는 것에는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말도 있었다. 하지만 결과는 뜻밖이었다. 출국한지 얼마 지나지 않은 4월 말의 새벽. 강이슬에게 메시지가 왔다.

“안 주무실지 몰랐어요.(웃음) 뭐랄까... 되게 답답하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보면 뭔가 하소연하고 싶었던 것 같아요. 한국 시간이 새벽이라 누구한테 연락하기가 애매하잖아요. 어쨌든 소식이 전해지면 기사가 나올 거고 인터뷰도 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미국으로 온 과정이나 그런 것들... 그리고 상황도 제일 잘 알고, 정확하게 써 주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때 정말 오래 얘기했잖아요. 많이 답답했어요. 선수 생활의 꿈이... 3년의 준비가... 2주 만에 끝나버렸으니까요.”

출국 전, 강이슬은 미국 무대에, 그리고 아직 유니폼을 입지도 않았던 워싱턴 미스틱스에 대해 상당한 기대와 애정을 나타내기도 했다. 그는 “미국을 잘 몰라서, 워싱턴이 동부에 있는지 서부에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워싱턴은 왠지 이름부터 멋있다. 수도이기도 하고 그냥 멋진 것 같다”는 말도 했다.

짧았던 2주간의 시간이 끝난 후, 강이슬은 미국 기준으로 워싱턴의 반대편인 LA로 이동해 휴식을 취했다. “미국은 역시 서부죠”라고 다시 연락이 왔다.

“솔직히 정말 힘들었어요. 이것도 제가 부족했던 게 이유겠죠. 불과 며칠 전까지만 해도 에이전트랑 저를 불러서 계속 같이 가고 싶다고 했던 구단이 갑자기 그렇게 결정을 내린 게 이해가 안 갔지만, 통보받기 전 날 연습경기에서 제가 정말 안 좋았거든요. 정말 많이 상처받고 상심했어요. 이제 와서 얘기지만 정말 심하게 그랬어요. 그런데 그런 거에 비해서는 또 정말 빨리 회복했어요. 지금은 정말 괜찮습니다!”

강이슬은 지난 9월에 열린 FIBA 여자농구 월드컵 A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와의 경기에서 37점을 폭발시켰다. 8리바운드 5어시스트를 더한 강이슬은 효율지수(EFF) 44점을 기록해 역대 여자농구 월드컵 한 경기 최고 기록을 달성했다.

그는 “그런 게 있는 줄도 몰랐다. 국제 대회에서 매번 한 경기씩만 터지는 것 같다. 그래도 중요한 경기에서 터져서 다행이긴 한데, 앞으로는 더 자주 터져야 한다”고 말했다.

강이슬의 활약을 앞세워 99-66으로 대승을 거둔 한국 대표팀은 다음 경기에서 미국을 만나 69-145로 패했다. 이 경기에는 강이슬이 미국 트레이닝 캠프에서 만났던 선수들도 경기에 나섰다.

“미국 대표팀에 워싱턴 선수들이 있었어요. 끝나고 나서 샤키라 (오스틴)가 되게 반가워하더라고요. 엄청 반가워하는데, 저도 웃으면서 ‘니가 아까 내 슛 블록했잖아’라고 우리말로 인사해줬어요. 제가 뭐라고 했는지는 모르겠죠.(웃음) 어쨌든 빨리 회복하긴 했는데 혼자 꽁한 건 있어서 전 미국 선수들이랑 사진도 안 찍었어요. 그냥 AT(엘리사 토마스)하고만 쿨하게 옛 친구 만난 것처럼 한 장만 찍고 왔어요.”(웃음)

#5
선수로서의 꿈이었던 WNBA가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이제 강이슬에게 새로운 동기부여는 무엇일까?

강이슬은 주저 없이 “올림픽”이라고 답했다. 지난 도쿄 올림픽에서의 기억이 워낙 강렬했기에, 그리고 마지막 세르비아와의 경기가 너무나 아쉬웠기에, 그는 다음 파리 올림픽을 새로운 목표로 잡았다.

“올림픽 본선에 다시 한 번 가고 싶어요. 그때는 저도 노장 소리를 듣겠죠. 진짜 후배들을 이끌고 더 좋은 성적을 내고 싶고, 후배들이 그런 큰 대회를 경험할 수 있도록 돕고도 싶어요. 개인적으로 올림픽을 한 번 더 뛰고 싶다는 욕심도 크고요.”

그래서 그는 이번 시즌 WKBL에 1순위로 선발된 키아나 스미스(삼성생명)에게도 관심을 보였다.

“귀화한다면서요? 다음 올림픽은 같이 뛸 수 있는 거 아니에요? 좋은 선수가 한 명이라도 대표팀에 합류한다는 건 정말 좋은 일이죠. WKBL에서 서로 다른 팀 소속으로 경쟁해야 하지만, 상대로 맞서는 것도, 같은 팀으로 뛰는 것도, 둘 다 기대가 되는 일이죠. 키아나 스미스가 정말 잘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팬들이 WKBL에도 더 관심을 가질 거고, 대표팀에도 훨씬 큰 힘이 되지 않겠어요?”

키아나 스미스는 미국에서 가드로 활약했다. 하지만 워낙 뛰어난 슈팅력을 갖춘 만큼 삼성생명은 3번까지 활용할 계획이다. 몇몇 지도자는 그의 슈팅력이 국내 최고의 슈터인 강이슬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한다. 리그에서 그 누구보다 긍정적이고 자존감이 강한 선수. 그리고 그 눈높이로 성장하기 위해 진화를 거듭해 온 강이슬은 그러나 키아나 스미스에 대한 그러한 평가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변함없는 자신감으로 새 시즌에 대한 기대를 전했다.

“걱정 안 해요. 키아나 스미스는 저보다 가진 게 훨씬 많은 선수라고 생각해요. 앞으로 저보다 잘 할 거라고도 생각하고요. 하지만 3점슛에 대해서는 적어도 이번 시즌은 제가 낫지 않겠어요?(웃음) 아무리 좋은 선수라도 리그에 대한 적응이라는 게 필요하잖아요. 그리고 저도 제가 제일 잘하는 부분에 있어서는 지면 안 되죠. 저도 더 좋은 모습 보여줄 수 있도록 계속 노력해야죠. 재미있을 것 같네요.”

KB는 시즌 첫 경기에서 신한은행에게 2차 연장 끝에 패했다. 강이슬은 이 경기에서 존재감과 숙제를 모두 남겼다. 1쿼터에 슛을 2개 밖에 시도 못하며 무득점에 묶였던 강이슬은 부진한 전반을 보냈다. 하지만 3쿼터 시작과 동시에 강이슬이 폭발했고, KB는 단번에 흐름을 탔다. 승부를 뒤집은 것은 순간이었다. 10점차 이상까지 도망갔다. 하지만 강이슬이 4쿼터 막판 5반칙으로 물러나자, KB의 공수 안정감이 현격하게 떨어졌다.

36분 8초를 뛰며 19점 3어시스트. 3점슛은 8개를 던져 4개를 성공했다. 개인 능력은 증명했지만, 팀을 승리로 이끌지 못한 부분의 숙제가 남았다. 자신이 파울 아웃으로 떠난 코트에서 끝내 리드를 따라 잡힌 동료들이 2차 연장까지 사투를 벌이는 모습을, 강이슬은 벤치에서 지켜봤다. 강이슬 스스로도 또 한 번, 많은 것을 느꼈을 개막전이었을 것이다.

박지수의 복귀 전까지 KB가 어떤 모습을 그려낼 지에 대해서는 코칭스태프와 선수단 모두의 노력과 고민이 필요하다. 하지만 그 핵심은 여지없이 강이슬이다. 이번 시즌, 다시 한 번 새로운 증명의 문제를 끌어안은 강이슬의 답안이 기대된다.

사진 = 이현수, 박진호, FIBA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