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환의 앤드원] NBA 역사상 최고의 스틸픽을 찾아라
오는 30일 미국 뉴욕 바클레이스 센터에서는 2021 NBA 드래프트가 열린다. 각 구단의 스카우팅 능력과 정보력이 빛을 발하는 시기가 또 다시 찾아온 것이다.
드래프트는 기본적으로 높은 순위에 지명된 선수들이 큰 관심을 받는 무대다. 하지만 시간이 흐른 뒤에는 상대적으로 낮은 순위에 지명된 선수들이 더 많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기도 한다. 매년 드래프트에서 '스틸픽'이라고 할 만한 선수들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올해 정규시즌 MVP를 수상한 덴버의 니콜라 요키치는 NBA 역사상 가장 낮은 순위에 지명된 MVP였다. 2014년 드래프트에서 요키치가 호명된 순번은 고작 41번째. 요키치는 NBA-ABA 합병(1976년) 이래 탄생한 최초의 2라운더 MVP로도 이름을 남겼다.
사실 요키치 이전에도 NBA에는 수많은 스틸픽이 등장했다. 지금부터 NBA를 대표하는 스틸픽 사례들을 함께 살펴보자.
탑10 밖에서도 슈퍼스타는 탄생한다
NBA 드래프트 지명 순위는 그 선수의 잠재력을 평가하는 잣대가 되곤 한다. 물론 드래프트에는 지명권을 가진 각 팀의 로스터와 운영 방향, 프런트와 코칭스태프의 선호도 등 외부 변수가 많다. 하지만 슈퍼스타급의 잠재력을 가졌다고 평가받는 유망주가 드래프트에서 탑10, 아니 탑3나 탑5 밖으로 밀리는 경우조차 거의 발생하지 않는다. 부상 변수가 아니라면 말이다.
그러나 막상 NBA 역사를 살펴보면 10순의 밖에서 지명된 선수가 리그, 시대를 대표하는 슈퍼스타로 성장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가장 대표적인 케이스로 거론되는 선수가 바로 코비 브라이언트다. 코비는 1996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13순위로 샬럿 호네츠에 지명됐다. 지명 직후 코비는 블라디 디바치와 맞트레이드돼 곧바로 레이커스 유니폼을 입었다.
당시 레이커스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고졸 유망주였던 코비를 택했다. 첫 번째는 샤킬 오닐 영입을 위한 샐러리캡 여유분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코비에 대한 지명 권리를 받고 디바치를 보내면서 당시 레이커스는 팀 샐러리를 꽤 절감할 수 있었고, 그렇게 확보한 여유분으로 FA가 된 오닐을 영입할 수 있었다.
또 다른 하나는 NBA 역사상 최초의 고졸 신인 가드였던 코비 브라이언트의 잠재력이었다. 후문에 따르면 당시 샬럿은 레이커스의 트레이드 제안을 받기 전까지만 해도 13순위 지명권으로 코비를 뽑을 생각을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다시 말해 레이커스가 트레이드를 시도하지 않았더라면 코비는 13순위보다 더 낮은 순위에서 드래프트에 뽑힐 수도 있었다.
하지만 만 17살에 불과했던 코비의 잠재력과 농구에 대한 열정을 높이 산 제리 웨스트 단장은 과감한 선택을 했고, 결국 이는 레이커스의 향후 20년을 결정짓는 ‘신의 한수’가 됐다.
당시만 해도 무모해보였던 블라디 디바치 트레이드, 고졸 신인 코비 브라이언트 지명을 통해 결국 레이커스는 로스터에 샤킬 오닐과 코비 브라이언트를 동시에 영입하게 됐다. 그리고 4년 후인 2000년부터 둘은 레이커스를 리그 3연패로 이끈다. 오닐-코비 원투 펀치의 레이커스 이후 NBA에는 20년 가까이 쓰리-핏(three-peat) 팀이 등장하지 않고 있다.
코비 브라이언트가 고졸 신인에 대한 저평가로 인해 탄생한 스틸픽이라면, 야니스 아데토쿤보는 상대적으로 부족한 정보력이 만든 스틸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아데토쿤보는 2013년 1라운드 15순위로 밀워키에 지명됐는데, 8년이 지난 지금 아데토쿤보는 이 드래프트가 낳은 최고의 선수로 평가받고 있다.
사실 2013년 드래프트는 꽤나 특이한 드래프트다.
일단 최상위 픽에서 실패한 유망주가 쏟아졌다. 앤써니 베넷(1순위), 오토 포터 주니어(3순위), 코디 젤러(4순위), 알렉스 렌(5순위), 널렌스 노엘(6순위), 벤 맥클레모어(7순위), 켄타비우스 칼드웰-포프(8순위), 트레이 버크(9순위)까지.
당시 탑10 지명자 성공적인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는 선수는 C.J. 맥컬럼(10순위)이 유일하다. 빅터 올라디포(2순위)는 돌고 돌아 인디애나에서 잠재력을 터트리는 듯 했지만, 이후 찾아온 잇따른 하체 부상으로 커리어가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런데 이 같은 탑10 지명의 ‘대참사’에도 불구하고 2013년 드래프트를 망한 드래프트라고 볼 수는 없다. 이후에 좋은 선수들이 쏟아졌기 때문이다.
스티븐 아담스(12순위)를 시작으로 켈리 올리닉(13순위), 야니스 아데토쿤보(15순위), 데니스 슈로더(17순위), 메이슨 플럼리(22순위), 팀 하더웨이 주니어(24순위), 레지 불록(25순위), 안드레 로버슨(26순위), 루디 고베어(27순위), 라울 네토(47순위)는 모두 지명 순위에 걸맞은 혹은 지명 순위 이상의 커리어를 NBA에서 만들어가고 있다. 향수병 때문에 결국 유럽으로 돌아가긴 했지만 2라운드 전체 32순위에 지명된 알렉스 아브리네스 역시 좋은 활약을 펼쳤던 스틸픽이다.
그리고 이 중에서도 최고의 스틸픽은 단연 15순위 지명자인 야니스 아데토쿤보다. 아데토쿤보는 2019년과 2020년에 2년 연속 정규시즌 MVP를 수상하며 리그 최고급 스타로 발돋움했고, 이미 이 선수에 대한 기준점은 ‘농구를 잘하냐’가 아니라 ‘우승을 할 수 있냐’로 바뀌어 있다.
이런 아데토쿤보를 드래프트에서 14개 팀이나 외면한 이유는 그에 대한 정보력이 상대적으로 부족했기 때문이다.
나이지리아 이민 가정의 셋째 아이였던 아데토쿤보는 18살까지 그리스 시민권이 없는 불법체류자였고 가난 때문에 형들과 함께 시계, 가방, 선글라스를 길거리에서 팔면서 가정의 생계를 도왔다.
아데토쿤보가 농구를 시작한 것은 2007년, 그의 나이 13살이었다.
농구를 늦게 시작한 만큼 스카우터들의 눈에 띄기도 어려웠다. 2011년 아데토쿤보가 처음 입단한 프로 팀은 그리스 세미프로 리그 팀이었고, 불과 2년 뒤에 아데토쿤보는 만 19살이 되면서 자동으로 NBA 드래프트 지명 자격을 얻었다.(NBA 드래프트 규정상 미국인을 제외한 해외 농구 유망주는 만 19살이 되면 드래프트 참가 신청을 따로 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NBA 드래프트 지명 자격을 얻게 된다.)
물론 2011년부터 2013년까지 단 2년 사이에 아데토쿤보는 유럽 농구계에서 상당한 주목을 받는 선수가 되긴 했다. 스페인 리그의 바르셀로나, 터키 리그의 에페스 같은 명문 팀들이 아데토쿤보에게 관심을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유럽 구단의 주목받는 것과 NBA 스카우터들의 주목을 받는 것은 다른 차원의 일이었다. 무엇보다 당시 NBA 팀들에겐 아데토쿤보에 대한 정보력과 확신이 부족했다. 프로 경력이 2년밖에 되지 않아 확인할 수 있는 경기 표본 자체가 적었다.
그렇게 15순위까지 내려온 아데토쿤보를 밀워키가 데려갔고, 결국 이 선택은 오랜 침체기에 머물던 밀워키 벅스 프랜차이즈의 역사를 바꾸는 한 수가 됐다. 아데토쿤보는 지난해 가을 밀워키와 연장계약을 맺으며 구단에 대한 충성심까지 드러냈다.
존 스탁턴(1984년 16순위), 폴 피어스(1998년 10순위), 폴 조지(2010년 10순위), 클레이 탐슨(2011년 11픽), 카와이 레너드(2011년 15순위), 데빈 부커(2015년 13순위) 역시 10순위권에서 나온 최고의 스틸픽이다. 최근에는 마이클 포터 주니어(2018년 14순위)도 주목을 받고 있다.
1라운드 막바지의 괴물들
사실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막바지, 그러니까 20순위 중후반대에 지명되는 선수들은 기본적으로 기대치 자체가 높지 않다. 한 팀을 이끌 에이스보다는 팀에 도움이 될 롤 플레이어나 준수한 벤치 자원 정도를 기대하고 뽑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NBA 역사를 돌이켜보면 1라운드 막바지에 지명된 선수 중에서도 주전급 선수를 넘어 팀을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가 등장했다.
최근 사례 중에 가장 대표적인 선수가 바로 지미 버틀러다.
버틀러는 2011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30순위, 그러니까 1라운드 맨 마지막 픽으로 시카고 불스에 지명됐다.
당시 시카고는 1998년 이후 13년 만에 정규시즌 리그 1위를 달성한 신흥 강호였다. 데릭 로즈, 조아킴 노아, 카를로스 부저 등 그동안 수집한 유망주와 베테랑 플레이어로 로스터를 잘 구축한 만큼 30순위 지명자인 버틀러가 많은 기회를 얻기는 힘들어 보였다.
하지만 루키 시즌부터 특유의 허슬과 수비로 탐 티보도 감독의 인정을 받은 버틀러는 소포모어 시즌에 82경기에 모두 출전하는 시카고의 핵심 식스맨으로 거듭났고, 2014-2015시즌에는 평균 20점을 기록하는 팀의 에이스급 선수로 발돋움했다.
드래프트 당시만 해도 한계가 있었던 공격 스킬셋이 비약적으로 발전하면서 얻은 쾌거였다. 코너에서 캐치앤슛을 던지는 핵심 수비 카드에 불과했던 버틀러는 점점 풀업 점프슛, 턴어라운드 점프슛 기술이 개선되고 자유투 유도 능력까지 성장하며 어느새 시카고를 이끄는 에이스가 됐다.
2015년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되고 기량발전상까지 차지한 버틀러는 이후 4번이나 올-NBA 팀에 선정됐으며 미네소타를 14년 만의 플레이오프로, 마이애미를 파이널로 이끌며 이제는 리그를 대표하는 스윙맨으로 커리어를 이어가고 있다.
루디 고베어와 파스칼 시아캄 역시 1라운드 막바지에 등장한 스타들이다.
고베어는 앞서 언급한 2013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27순위로 유타 재즈에 지명됐다. 드래프트 당시부터 7피트 9인치(약 236cm)에 달하는 엄청난 윙스팬으로 주목받긴 했으나, 당시 고베어는 마른데 민첩성은 떨어지고 공격력은 사실상 없는 빅맨으로 평가받았다. 실제로 데뷔 초반 고베어의 보직은 데릭 페이버스와 에네스 칸터를 보좌하는 백업 빅맨이었다.
하지만 고베어는 이후 2대2 게임에서 스크리너로서 가져야 할 기본기와 공격 동작에서 큰 발전을 이루면서 소포모어 시즌부터 팀의 주전 빅맨으로 자리 잡았다. 칸터를 포기한 유타는 고베어를 페이버스와 함께 트윈타워로 활용했고, 이후 고베어는 페이버스까지 밀어내며 유타의 확고부동한 기둥이 됐다.
2018년 생애 첫 올해의 수비수상을 수상하며 리그 최고급 빅맨으로 성장한 고베어는 이번 시즌까지 5년 연속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올해의 수비수 수상 3회를 차지하는 대단한 커리어를 만들어가고 있다.
파스칼 시아캄은 2016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전체 27순위로 토론토 유니폼을 입었다. 카메론 출신의 원석이었던 시아캄은 토론토의 안정적인 G-리그 시스템 속에서 차분하게 성장해갔다.
루키 시즌에 NBA와 G-리그를 오가며 G-리그 파이널 MVP를 차지하는 등 성장세를 이어간 시아캄은 소포모어 시즌이었던 2017-2018시즌부터 토론토의 팀 디펜스를 책임지는 핵심 식스맨으로 자리잡았다.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시아캄은 세 번째 시즌이었던 2018-2019시즌에 공격에서도 비약적인 성장을 보이며 기량발전상을 수상했다. 이 시즌 시아캄의 평균 기록은 16.9점 6.9리바운드 3.1어시스트. 시아캄이 건강하게 무려 80경기를 뛰어주면서 토론토는 레너드의 출전 경기를 관리하면서도 정규시즌을 안정적으로 운영할 수 있었고, 결국 창단 첫 우승 트로피까지 들어올릴 수 있었다.
레너드가 떠났지만 시아캄의 위력은 여전했다. 2019-2020시즌에는 평균 22.9점 7.3리바운드 3.5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팀의 실질적인 에이스가 된다. 올 시즌은 부상 여파와 감정 컨트롤 문제로 다소 부진한 시즌을 보냈으나, 시아캄이 향후 토론토를 이끌 에이스라는 사실은 누구도 의심할 수 없다.
2라운드 신화
니콜라 요키치는 1976년 NBA-ABA 합병 이래 최초의 2라운더 MVP가 됐다. 요키치처럼 MVP가 되지는 않았지만 요키치 이전에도 2라운드 출신으로 성공 신화를 쓴 선수들이 존재했다.
1986년과 1999년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57순위로 지명된 데니스 로드맨과 마누 지노빌리는 2라운더에 대한 시선 자체를 바꿔놓은 선수들이다.
로드맨은 NBA 드래프트 지명 당시 무명 대학 출신의 단신 빅맨이었고, 지노빌리는 대부분의 NBA 관계자들이 이름만 알거나 잘 알지 못하는 유럽 리그 출신의 가드였다.
하지만 데뷔 후 둘의 행보는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었다. 로드맨은 ‘배드보이즈’ 디트로이트의 핵심 선수를 넘어 올해의 수비수상만 두 차례(1990, 1991) 차지하는 리그 대표 수비수가 됐다. 리바운드왕은 무려 7번이나 차지했고 현재도 NBA 역사상 최고의 리바운더로 꼽히고 있다. 2라운드 지명자였던 로드맨은 디트로이트에서 등번호 10번이 영구결번되고 명예의 전당에도 헌액됐다. NBA 팬이라면 모두가 아는 시대의 풍운아이자 리그 대표 스타였다. 우승 반지도 디트로이트와 시카고에서 5개나 수집했으니, 이만한 커리어도 찾기 힘들다.
마누 지노빌리는 사실 샌안토니오가 샐러리캡 관리를 위해 지명한 유망주였다.
1999년 파이널에서 우승한 샌안토니오는 리그 2연패를 위해 우승 멤버를 그대로 지키길 원했고, 당장 NBA에 데뷔하지 않을 비미국인 유망주를 지명하는 ‘알박기’라는 드래프트 전략을 실행했다.
1라운드부터 이 전략은 실행됐다. 1999년 드래프트에서 샌안토니오는 29순위로 지명한 미국인 유망주 리온 스미스를 댈러스에 넘기고, 그 대가로 크로아티아 출신의 40순위 유망주 고단 기리첵과 2000년 NBA 드래프트 2라운드 지명권을 받아온다. 당시 자국 리그에서 뛰고 있던 기리첵은 NBA 데뷔조차 불투명한 선수였다.
57순위에서도 샌안토니오는 같은 결정을 내렸다. 이탈리아 리그의 비올라에서 뛰고 있었던 한 아르헨티나 출신의 유망주를 지명했다. 마누 지노빌리였다. 당시 스카우트 팀 팀장이었던 R.C. 뷰포드는 지노빌리를 뽑은 선택에 대해 흣날 다음과 같이 이야기했다.
“우리가 다른 팀이 보지 못하는 곳에서 지노빌리를 몰래 염탐하고 지켜본 것은 전혀 아니었다. 여러 가지를 고려해서 지노빌리를 뽑았고 정말 운이 좋았다. 하지만 지노빌리가 스틸픽이 된 가장 큰 공은 결국 지노빌리 본인에게 있다. 지노빌리가 최고의 선수가 될 때까지 능력을 기르고 스스로 성장해줬다”
3년 뒤인 2002년 마침내 NBA로 향한 지노빌리는 이후 팀 던컨, 토니 파커와 함께 샌안토니오를 이끄는 전설의 트리오가 된다. 지노빌리는 던컨, 파커와 무려 4번의 우승을 합작했으며, 올-NBA 팀에도 두 차례 이름을 올렸다. 2008년에는 식스맨상을 수상하며 2010년대 NBA의 벤치 운영 변화에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최근 사례로는 드레이먼드 그린과 아이재아 토마스도 빼놓을 수 없다.
드레이먼드 그린은 2012년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35순위로 지명됐다. 미시간 주립대 출신으로 2012년 빅10 컨퍼런스 올해의 선수상까지 수상한 그린은 NBA 드래프트에서는 막상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빅맨으로 뛰기엔 너무 작은 신장(201cm)과 평균 이하의 득점력 때문이었다.
실제로 데뷔 첫 2년 동안 그린의 보직은 평균 15분에서 20분 정도를 뛰는 식스맨이었다. 앤드류 보거트, 데이비드 리를 보유한 골든스테이트로서는 굳이 그린에게 큰 기대를 걸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2014년 스티브 커가 골든스테이트의 신임 감독으로 부임하면서 상황이 완전히 달라진다. 커는 농구에 대한 이해도가 높고 뛰어난 수비력을 가진 그린의 잠재력을 알아봤다. 커의 지도 아래 그린은 골든스테이트의 컨트롤타워로 활약하는 핵심 빅맨이 됐고, 2016년에는 엄청난 수비력과 경기 운영 능력으로 생애 첫 올스타 선정은 물론 올-NBA 세컨드 팀에도 선정되는 반전을 일으켰다. 2017년에는 빅맨으로서 리그 스틸왕을 차지하고 올해의 수비수까지 선정됐다.
사실 지금도 그린은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선수다. 더티 플레이 논란과 별개로 그린은 너무 부족한 개인 공격력 때문에 활용 가치가 다소 떨어진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하지만 그린은 올 시즌에도 자신이 스테픈 커리를 살려줄 수 있는 최고의 조각이라는 점을 증명했고, 스티브 커 감독과 커리도 그린을 팀의 핵심 수비수이자 컨트롤 타워로서 강하게 신뢰하고 있다. 35순위 선수가 이 정도까지 온 것이니 이 역시 대단한 일임이 분명하다.
아이재아 토마스는 2011년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 60순위, 그러니까 가장 마지막 픽에 지명되며 NBA에 입성했다. 175cm에 불과한 토마스가 NBA 스카우터들에게 저평가를 받는 것은 사실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새크라멘토에서 맞이한 첫 시즌부터 토마스는 평균 11.5점 야투율 44.8% 3점슛 성공률 37.9%를 기록하며 심상치 않은 조짐을 보인다. 이후에도 성장세를 이어간 토마스의 커리어는 보스턴에서 정점을 찍었다.
2015-2016시즌 평균 22.2점 3.0리바운드 6.2어시스트를 기록한 토마스는 2016-2017시즌에 평균 28.9점 2.7리바운드 5.9어시스트를 기록하며 NBA를 대표하는 가드로 거듭난다. 2016년에 이미 생애 첫 올스타에 선정된 토마스는 2017년에는 올-NBA 세컨드 팀에도 뽑히는 영광을 누렸다.
안타깝게도 이후 골반 부상으로 인한 운동능력 하락으로 토마스의 NBA 커리어는 갑작스럽게 내리막을 걸었다. 최근에는 워싱턴, 뉴올리언스에서 부활을 노렸지만 녹록지 않았다. 하지만 60순위 지명자였던 토마스가 10년 가까이 NBA에서 보여준 모습은 분명 성공적이었다고 할 만하다.
사진 = 로이터/뉴스1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