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모험을 싫어한 소녀' 최규희의 새로운 도전
인터뷰 에세이 ‘단편’(斷片/短篇)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 항해
'모험을 싫어한 소녀' 최규희의 새로운 도전
[루키=박진호 기자] 선수들이 휴가를 마치고 훈련에 복귀하는 시기가 되면, 각 팀마다 선수 거취에 관한 이야기가 나오기 마련이다. 이 시기에는 긍정적인 정보가 거의 없다. 대부분이 선수단 정리에 관한 것이다.
본인의 의사, 혹은 구단의 입장에 의해 선수 생활을 포기하는 선수가 나온다. 구단 입장에서는 팀의 샐러리캡을 맞추기 위해 선수단을 정리해야할 수도 있고, 새 시즌 드래프트에서 최소 2명 이상의 선수를 선발해야 하기에, 아쉬운 마음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기량을 따져 정리 명단을 작성하기도 한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0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1
최규희.
선일여고 출신 가드로 지난 2016 WKBL 신입선수선발회에서 전체 19순위로 우리은행에 지명됐다. 4라운드 1순위. 그 해 드래프트에서 마지막에 이름이 불린 선수다.
당시 선수층이 두텁지 않았던 우리은행이 무려 4명의 선수를 지명했는데, 그 덕분에 최규희는 가까스로 프로에 입단할 수 있었다.
“그렇게 안 보였을지 모르지만 속으로는 부글부글했죠. 그냥 머릿속이 하얬어요. 1-2라운드에 이름이 불리지 않으면서 ‘내가 이렇게 못했나’하는 생각도 들었고요. 마지막에 제 이름이 불리니까 (김)선희(BNK)가 옆에서 막 울더라고요. 선희가 우는 걸 보다가 저도 울었어요. 그리고 나가서 사진 찍을 때는 웃으면서 찍었는데... 그때 속으로 다짐했었어요. 프로에 가서는 내가 더 나은 선수라는 걸 보여주겠다고...”
#2
최규희를 처음 봤던 것은 2013년 6월이었다. 초여름 이른 더위가 짜증스럽던 그해 6월 중순, 나는 제49회 쌍용기 여고부 결승(선일여고-인성여고)을 보기 위해 잠실학생체육관으로 향했다.
선일여고 3학년 신지현(하나원큐)을 보기 위해서였다. 신지현은 그 해 1월, 경북 경산에서 열린 2013 WKBL총재배 8강 대전여상과의 경기에서 한 경기 61점을 득점하며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한 경기 61득점은 중고연맹이 전산화된 후 남녀 중고 농구를 통틀어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신지현의 이 기록은 약 1년 뒤, 강원도 양구에서 열린 제39회 협회장기 전국남녀중고농구대회에서 김진영(BNK)에 의해 깨진다. 숭의여고 3학년이었던 김진영은 마산여고와의 경기에서 66점을 득점했다.
신지현은 다가오는 WKBL 신입선수선발회에서도 당연히 1순위 후보로 거론되고 있었다. 하지만 결승전은 신지현보다 뜻밖의 상황에 더 시선을 뺏기게 만들었다.
등록 선수가 5명뿐이었던 선일여고는 경기 초반, 김선희(BNK)가 부상으로 코트를 떠났게 됐고, 선수 4명으로 30분 이상을 버텨야 했다. 경기 내내 5:4의 경기가 이어졌고, 수적인 열세를 극복의 영역으로 놓기에는 주어진 시간이 너무 길었다.
결국, 김지영(하나원큐), 김희진(BNK), 서수빈(전 하나원큐) 등이 활약한 인성여고가 꾸준히 리드를 지키며 어렵지 않게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를 보며 유독 한 선수에게 눈이 갔다. 애초에 지켜보고자 했던 신지현도, 김선희가 빠진 골밑을 혼자 지켜내던 김연희(신한은행)도, 우승팀 인성여고도 아니었다. 등번호 6번을 달고 수적 열세였던 팀의 가드로 활약하던 선일여고 1학년 최규희였다.
코트 위에서 가장 어린 선수였지만, 궁지에 몰린 상황에서도 침착하게 경기를 펼치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팜플렛에 올라온 등록 사진을 보면서 ‘사극에 출연하는 아역배우로 잘 어울리겠다’는 생각도 했지만, 궁극적으로는 ‘저 1학년, 프로에서도 볼 수 있겠지’라는 생각을 막연히 했다.
그리고 2년 후, 전라남도 광주에서 최규희를 다시 볼 수 있었다. 2015 연맹회장기 전국남녀중고농구대회를 취재하던 중 3학년이 된 최규희를 발견했다. 당시 수피아여고 체육관에서 벌어진 8강에서 선일여고는 분당경영고를 만났다.
당시 분당경영고는 대적할 상대가 없는 절대 강자였다. 분당경영고의 박지수, 차지현(이상 KB), 나윤정(우리은행) 트리오는 입학과 동시에 팀을 여고 무대에서 무적의 챔피언으로 올려놓고 있었다.
선일여고는 분당경영고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미 1쿼터에 15점을 앞서나간 분당경영고는 시종 페이스를 조절하듯 경기를 펼쳤지만, 선일여고는 점수차를 좁히지 못했다.
20점차가 넘는 대패를 당한 선일여고의 3학년 최규희는 팀내 최다 득점을 올렸던 것으로 기억하지만, 그렇게 인상적이지 못했다. 2년 전, 나름 원석을 발견한 것 같았던 마음과 비교하면 약간은 실망스럽다는 느낌이기도 했다.
#3
최규희와 처음 대화를 한 것은 그가 프로에 입단한 후였다. 왠지 조용하고 내성적일 거라 생각했는데, 막상 인터뷰를 해보니 뜻밖의 모습이 많았다. 웃음 코드가 약간은 4차원이었지만, 전체적으로는 해맑은 소녀의 모습이었다.
학창시절 그를 보았던 두 번의 기억을 말하며, “고 1때, 농구를 제일 잘했던 것 같다”고 농담을 했더니, 최규희의 동기였던 엄다영(전 우리은행)이 “맞아요! 그런데 얘, 중학교 때는 더 잘 했어요”라고 받아쳤다. 최규희는 벙어리 인형처럼 웃고만 있었다.
우리은행 유니폼을 입은 그를 보면서는 기대보다 걱정이 앞섰다.
혹독하고 거친 프로 무대에서 버텨내기가 쉽지 않을 것 같았다. 그런데, 최규희는 살아남았고, 꾸준했다. 힘든 시기를 이겨내며, 2018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에는 3X3 국가대표로 나서기도 했다.
대중은 드라마를 좋아한다. 스포츠 역시 ‘각본 없는 드라마’라는 말을 많이 듣는다. 예상치 못한 감동이 주는 짜릿함은 스포츠의 가장 큰 매력이기도 하다.
WKBL에서 ‘3라운드의 기적’을 기대하는 것이 사치다. 2라운드는 물론 1라운드에 지명됐지만 1군 무대에 한 번 서보지 못하고 꿈을 포기한 선수들이 상당하다. 팀에서도 훈련을 통해 옥석을 가리고 발전하는 선수에 대해 가중치를 주지만, 그래도 앞 순위에 선발한 선수에게 더 많은 기회를 줄 수밖에 없다.
하물며 4라운드. 그것도 드래프트 맨 마지막에 호명된 선수가 기적을 만들 수 있을까? 어떻게든 최규희가 그런 드라마를 써주기를 바랐다.
#4
그렇게 5년. 2020년 새롭게 발표된 선수 명단에 최규희는 없었다. 우리은행은 ‘선수 본인 의사’에 의해 최규희를 웨이버로 공시했다고 밝혔다.
웨이버는 임의탈퇴와 달라서 선수가 원소속 구단의 허가 없이 소속팀을 찾아 선수생활을 계속할 수 있다. 그러나 최규희가 새 구단을 찾았다는 말은 없었다. 프로 진출 5년 만에 선수의 꿈을 완전히 접은 것이다.
“감독님이랑 면담을 할 때, 제가 그만하겠다고 말씀드렸어요. 감독님이 선수를 계속 할 거면 다른 팀이나 실업, 그리고 대학까지 다 알아봐주겠다고 하셨어요. 그런데 제가 아니라고 말씀드렸어요. 선수를 계속 할 거면 우리은행에서 하지 왜 나가겠어요? 지난 시즌 중에 농구 선수는 여기까지라는 생각이 들었고, 감독님도 면담을 한 후에 제 결정을 존중해주셨어요.”
“나오면서 눈물도 안 흘렸어요. 후련하다고 해야 하나? ‘그 힘든 생황을 이제 안 해도 돼서 신난다’는 느낌은 아니었어요. 저는 뭐랄까... 우리은행에 있으면서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해요. 더 열심히 하는 분들이 보면 우스울 수도 있겠지만, 선수생활에 미련이 없을 만큼 최선을 다했어요. 그래서 제 삶의 절반 이상 동안 계속 해온 농구를 그만두면서도, 뒤돌아보지 않고 나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최규희는 5년간 프로에 있으면서 총 16번, 1군 무대를 밟았다. 경기당 평균 출전 시간은 2분 37초. 총 출전 시간이 41분 59초다. 에이스 선수들이 연장을 뛰었다면 한 경기에 다 소화했을 법한 시간을 할애 받는데, 5년을 나누었다.
5년, 4시즌, 16경기, 41분 59초, 12점, 5리바운드, 2어시스트. 자신의 모든 걸 불태웠다고 하기에 초라한 성적표다.
하지만 주전 의존도가 높은 팀이자, 최규희가 뛰는 동안 단 1시즌을 제외하고는 항상 정상에 있었던 우리은행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1군 경기에 나선 결과만으로 평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최규희는 퓨처스리그와 박신자컵 서머리그에 꾸준히 출전하며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했다. 선수로서의 기량도 조금씩 향상됐다. 위성우 우리은행 감독은 “1-2년차 선수들과 비교하면 당연히 최규희의 기량이 훨씬 위”라고 단언한다.
우리은행은 지난 8월, 충북 청주에서 열린 박신자컵 서머리그에서 6위를 차지했다. 주요 선수들의 줄부상으로 마지막 5-6위전은 5명으로 경기를 치러야했다. 팀을 이끌었던 전주원 코치는 “(최)규희만 있었어도 훨씬 좋은 모습을 보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저 스스로 한계도 느꼈고, ‘여기까지 하는 게 맞다’는 생각도 들었어요. 사실 몇 년 전에도, 선수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지에 대해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거든요. 그때 어머니께서 ‘농구 안하면 뭘 할 거니’라고 물어보시는데, 정말 막막하더라고요. 그런데 이번에는 제가 다른 걸 찾아가는 게 맞다는 확신이 들었어요. 만약 제가 1군 경기를 많이 뛰고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면 분명 상황이 달랐을지도 모르죠. 그런데, 제가 3X3 아시안게임 대표로 선발된 적이 있었잖아요? 그때도 정말 기분은 좋았는데, 딱 그때 뿐이더라고요. 뭐랄까... 어린 아이가 놀이동산 갈 때의 설렘 같은 게 없었어요.”
지난 5년간 최규희를 지도했던 위성우 감독은 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사실, 선수가 그만둔다고 하면 ‘얘가 선수를 안 하면 뭘 하려고 하지’라는 부분이 정말 신경 쓰여요. 그래도 우리 팀에서 내가 데리고, 가르치고 했는데, 운동을 그만 둔 다음에도 먹고 살수는 있어야 하잖아요. 그런데 규희는 걱정 안 해요. 팀에 있을 때도 그 힘든 훈련 다 이겨내고, 성실하게 잘 했던 아이거든요. 운동 계속한다고 했으면 끝까지 데리고 갔을 거예요. 뭘 해도 잘 할 아이에요. 그만 두겠다고 했을 때, 어디서든 농구를 계속 하게 해주려고 했는데, ‘괜찮다’고 하더라고요. 오히려 그때 또 한 번 느꼈어요. 얘는 뭘 해도 할 거라는 걸... 규희라서 걱정 안 합니다. 무얼 하든 정말 잘 할 거예요.”
#5
왜 농구를 시작했을까?
어린 시절의 이야기를 묻자, 다시 ‘소녀 최규희’의 표정이 돌아왔다. “믿지 않으시겠지만~”이라는 단서를 걸고 말하는 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
그는 어렸을 때, 공부도 운동도 미술도 잘했다고 한다. 상도 정말 많이 받았단다. 그래서 지금 자기가 하는 말에 ‘믿지 않을 거’라고 단서를 달았다.
달리기를 정말 잘해서 학교 대표로 대회도 나갔고, 스파이크 화를 신지 않고도 상을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초등학교 시절 육상부가 있는 학교에서 스카우트 제의가 정말 많이 왔었고, 그런 와중에 농구를 선택하게 됐다고. 하지만 평생 함께할 것 같았던 농구공을 이제는 놓게 됐다.
농구를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었을 당시, 몇 가지 진로를 놓고 고민했다. 농구와는 다른 길을 가겠다고 결정했기에, 구단에 의사를 전할 때까지 이를 가족들에게도 알리지 않았다. 그만큼 결연했다.
처음에는 요가나 필라테스도 생각했다. 오랫동안 선수 생활을 한 만큼, 빠르게 배워서 응용할 수 있는 부분이었다. 하지만 어린 시절, 자신이 꿈꾸고 동경했던 일에 도전하기로 했다. 어쩌면 그가 살면서 직접적으로는 단 한 번도 부딪친 적 없는 분야로의 도전이다.
“정말 열심히 하고 있어요. 저 운동 그만두고 4개월 동안, 자격증만 해도 벌써 여러 개 땄어요. 특공무술도 해요. 도와주시는 분들한테 칭찬도 많이 받았고요. 다음 학기부터는 대학에 들어가서 공부하게 됐는데, 많은 분들이 응원해주시고 용기도 주고 그러세요. 정확히 ‘뭘 하려고 하냐’고 물으시면 일단 비밀이라고 할게요. 저보다 오랫동안 꿈을 갖고 이 직업을 위해 준비하신 분들도 많은데, 제가 지금 그런 걸 말하면 그분들 보기에 건방져 보일 것 같아요. 꿈을 이루고 나면, 그때 당당하게 말씀드릴게요.”
매일 운동하던 시절만큼의 치열함으로 공부를 하고있다는 그는 요즘, 영어 공부에 빠져있다. 언니와 마찬가지로, 학창시절 농구를 했던 동생 역시 자신과 같은 목표를 갖고 있어, 자매가 같은 꿈을 향해 매진하는 중이다.
“동생도 농구를 그만두고 대학을 갔고, 지금은 저랑 같은 목표를 갖고 공부하고 있어요. 저보다 얼굴도 작고 예뻐요. 그런데 저 열심히 공부하는 중이라고 말은 했는데, 은퇴하고 10kg이나 쪘거든요? '말로만 열심히 하고, 실제로는 노는 거 아니냐'고 하시진 않겠죠?”
#6
프로에서 자신의 꿈을 끝내 펼치지 못하고 팀을 떠나는 선수는 매년 생겨난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우리은행은 특별하다.
많은 유망주들이 혹독한 훈련을 견디지 못하고 낙오한다는 비판이 유독 우리은행에게는 매섭게 날아든다. 위성우 감독-전주원 코치가 부임한 2012-13시즌 이후 챔프전 우승 6회, 정규리그 우승 7회를 기록한 ‘최강의 팀’이었지만, 어린 선수들에게는 '혹독하고 견디기 힘든 팀'이라는 날선 비판도 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다.
최규희 외에도 박시은, 이하영, 유현희 등 총 4명의 선수가 우리은행 유니폼을 벗었다. 올해 선발한 신인 김해지도 임의탈퇴 처리됐고, 우리은행에 대한 이런 시선은 여전하다.
“힘들죠. 솔직히 다른 팀은 안 가봐서 잘 모르겠지만, 힘든 건 정말 사실이에요. 훈련할 때, 죽겠다는 소리가 나올 만큼 힘들었던 적도 많으니까요. ‘내가 이 훈련을 계속 견뎌낼 수 있을까’라는 고민도 많이 했고요. 그만두는 선수들 모두 각자 이유가 있겠지만, 일단 저는 말씀드렸던 것처럼, 팀이 힘들어서 그만둔 건 아니에요. ‘훈련이 너무 힘들었던 것 아니냐’고 물으시면 ‘전혀 아니’라고 말은 못하겠지만요.”
“하지만 우리은행에서 뛴 5년이 없었다면, 다른 무언가에 도전해보겠다는 마음도 먹지 못했을 거예요. 비록 우리은행 선수로는 뭔가를 해내지 못했지만, 그 안에서 정말 많은 걸 배우고, 좋은 경험을 쌓았어요. 제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농구를 그만두게 됐지만, 끝이 아니라 분명 많은 걸 배우고 얻어서, 새로운 도전에 나설 수 있게 된 거라고 생각해요.”
최규희는 분명, 우리은행을 나올 때 “눈물도 흘리지 않고 나왔다”고 했다. “최선을 다했기에 미련이 없어서”라며, “내가 원래 그렇게 잘 우는 여자가 아니”라고 웃었다. 그런데, 몇몇의 이름이 등장하자 불현듯 울음을 터뜨렸다. 위성우 감독, 전주원 코치, 그리고 박혜진이었다.
“(박)혜진 언니한테는 정말 고마운 게 많아요. 한번은 대표팀을 갔다 온 다음에 갑자기 제 방에 오더니 먹을 거랑 화장품 같은 거를 우르르 쏟아 놓고는 가지라고 하더라고요. 그러더니, ‘열심히 하는 거 다 아는데 왜 자꾸 눈치를 보냐. 훈련할 때나 밥 먹을 때 그렇게 기죽어 있지 말라’고 했어요. 참 힘들 때였는데, 언니가 그렇게 말해주니까 너무 고맙더라고요.”
그는 박혜진 뿐 아니라 김정은도 자신이 힘들어할 때 좋은 이야기를 많이 해주고 힘이 되어 주었다며, “확실히 훌륭한 선수는 그냥 만들어진 게 아닌 것 같다”고 했다. 비록 선수생활을 그만하게 됐지만, 팀을 이끌면서도 다독이고 챙겨줬던 선배들에게는 여전히 고마운 마음을 갖고 있다.
위성우 감독과 전주원 코치 역시 마찬가지. 최규희는 위 감독과 전 코치에 대해 “정말 고마운 분들”이라고 말했다.
“그분들 덕분에 제가 지금까지 올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힘들 때도 있었고, 훈련하다가 미울 때도 있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항상 많이 배웠고 저한테 정말 잘해주셨어요. 전주원 코치님은 저희 학교(선일여고) 대선배님이시기도 한데, 학교 후배라고 챙겨주시는 건 전혀 없었지만, 선수로서 어떻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사람으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많이 가르쳐주셨어요. 두 분은 저한테 정말 고마운 분들이세요.”
위성우 감독, 전주원 코치, 그리고 우리은행의 동료들은 최규희가 새로운 목표를 겨냥하고 도전하는 데에 강력한 동기부여다. 그는 하루빨리 꿈을 이뤄 이들 앞에 다시 당당하게 서고 싶다는 마음을 전했다.
“저는 원래 모험을 정말 싫어해요. 태생적으로 안정적인 걸 좋아하는 데, 이제는 선수 때와 달리 불투명한 미래에 도전을 하는 거잖아요. 그래도 보물섬을 찾아 떠나는 모험이라고 생각하고 재미있게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인생의 절반 이상을 함께한 농구를 내려놓은 그의 선택을 혹자는 포기라고, 혹은 실패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삶이 언제나 마음대로 되는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마음먹은 대로 되는 인생이란 아마도 없을 것이다. 따라서 자기가 살아온 삶의 자취에서 끊임없이 배우고 경험을 쌓아, 이를 바탕으로 하나의 목표를 이룰 수 있다면, 휘청대며 걸어 온 과거조차도 성공을 위한 디딤돌이었다고 추억할 수 있을 것이다.
전혀 다른 길에 도전하는 최규희는 적어도 자신의 농구 선수 생활에 대해 ‘후회’라는 단어를 꺼내지 않았다. 힘든 터널을 벗어난 개운함, 선수의 꿈을 만개하지 못한 아쉬움보다는 농구를 하며 쌓아온 경험과 많은 것들이 앞으로 자신이 도전할 새로운 항해에 엄청난 도움이 될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었다. 그는 위성우 감독과 전주원 코치가 정말 좋아하는 과자가 있다며, “빨리 목표를 이뤄서 감독님, 코치님한테 그 과자를 산더미만큼 사서 선물하고 싶다”고 말했다.
“우리은행에서 뛰면서, 특별히 잘하지도 못했는데 응원해주셨던 팬들한테는 인사도 못 드리고 그만두게 돼서 죄송한 마음이 있어요. 그분들 덕분에 훈련 때도 한 발 더 뛸 수 있었고, 힘들 때도 즐거운 생활을 할 수 있었어요. 감사드린다는 말씀도 못했는데, 꼭 더 좋은 모습으로 나중에 찾아뵙고 인사드릴게요. 그리고 지금 제가 새로운 도전을 하는 데에 도움을 주시는 좋은 분들이 정말 많아서 행복하고, 그분들께도 모두 감사를 드리고 싶어요. 또, 평생 저 운동하는 거 뒷바라지 하느라 고생 많았던 부모님께도 감사하고, 앞으로 정말 꽃길만 걷게 해드리겠다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선수 최규희’는 여기까지다. 2013년 초여름, 서울의 한 체육관에서 봤던 등번호 6번의 소녀가 선수로서 활짝 웃는 모습은 이제 볼 수 없다.
어린 시절 농구를 하며, 그가 꿈꿨을 미래가 무엇이었는지 묻는 것을 깜빡했다. 생각해보니, 그런 건 이제 와서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 여름, 선일여고의 6번 소녀가 꿈꿨을 선수로서의 미래가 무엇이었든, 그것은 이루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그는 거기에서 무릎 꿇지 않았다. 선수로 보낸 세월을 후회 대신 발판으로 삼아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때문에 누군가에게는 선수생활 포기로 보일 수 있는 그의 선택에 대해, 결코 포기가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그리고 모험을 싫어했던 소녀가 선택한 항해가 반드시 그의 꿈이 닿는 보물섬에 이르러, 지나간 시간 모두가 찬란하게 가치 있었던 '성공의 역사'였음을 밝게 웃으며 이야기할 수 있게 되길 응원한다.
사진=박진호 기자, 이현수 기자, 최규희 본인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