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4년의 역사, 뉴욕 닉스의 영광의 시대는?

2020-09-11     이학철 기자

[루키=이학철 기자] 뉴욕은 1946-47년 NBA의 전신인 BAA시절 창단해 무려 74년 동안 리그에 참여하고 있는 역사 깊은 구단이다.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만큼 수많은 스토리를 보유하고 있으며, 수없이 많은 슈퍼스타들의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천장 아래에서 뛰어 왔다.

현재 뉴욕은 7시즌 연속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하며 암흑기를 보내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이들에게도 분명 ‘영광의 시대’는 존재했다. 통산 2,799승 2,988패. 승률 48.4%를 기록하고 있는 뉴욕의 오랜 역사들 중 리그의 강호로 군림했던 이들의 영광의 시대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자.

*본 기사는 루키더바스켓 9월호에 게재됐습니다.

 

Heart of America

미국 뉴욕주에 위치한 미국 최대의 항구도시. 2019년 기준 약 890만의 인구가 살고 있으며 교외를 포함하면 1,600만이 넘는 방대한 인구수를 자랑하는 곳. 미국 상업, 금융, 무역의 중심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뉴욕이라는 도시는 바로 그런 곳이다. ‘세계의 중심’ 이라고 표현해도 무리가 없는 이 뉴욕이라는 도시의 이름을 달고 있는 유일한 NBA 팀이 바로 ‘뉴욕 닉스’다. 참고로 미국의 또 다른 메이저 스포츠인 MLB(뉴욕 메츠, 뉴욕 양키스), NFL(뉴욕 자이언츠, 뉴욕 제츠), NHL(뉴욕 레인저스, 뉴욕 아일런더스) 등에는 뉴욕을 연고지로 삼고 있는 팀이 2개씩 존재한다.

이들의 역사는 1946년 BAA(Basketball Association of America)의 등장과 함께 시작된다. 1946년 11월 1일 NBA 역사 탄생의 시작을 알리는 첫 개막전 경기의 주인공 역시 뉴욕이었다. 당시 뉴욕의 상대는 토론토 허스키스. 이 경기에서 뉴욕은 68-66 승리를 따내며 ‘NBA 최초의 승리팀’이라는 타이틀을 손에 넣었다. 

초창기 뉴욕의 성적은 나쁘지 않았다. 첫 시즌 33승 27패로 55.0%의 승률을 기록한 그들은 이후 9시즌 연속 5할 이상 승률을 기록하며 강팀으로 군림했다. 특히 NBA 출범 후 2번째 시즌이었던 1950-51시즌부터는 3시즌 연속 파이널에도 진출하며 우승을 노렸으나 아쉽게도 3차례 모두 준우승에 머물렀다. 뉴욕은 통산 8차례 파이널 무대를 밟았는데 그 중 3차례가 이 시기에 몰려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요소다. 

 

Prime Time

74년 역사 중 뉴욕이 파이널 우승 트로피를 들어 올린 것은 딱 2차례 있었다. 1969-70시즌의 첫 우승과 1972-73시즌의 두 번째 우승. 그렇기에 뉴욕 프랜차이즈의 최고 전성기가 언제냐고 묻는다면 단연코 이 시기가 첫 손에 꼽힐 것이다. 

1950년대 중순 이후 뉴욕은 심각한 암흑기를 겪고 있었다. 1955-56시즌 이후 12시즌 동안 5할 이상의 승률을 기록한 것은 단 한 차례.(1956-57시즌, 36승 36패) 이 기간 동안 최하위만 9번을 차지하며 동네북 신세로 전락한 상태였다.

그러나 뉴욕의 암흑기는 1964년 드래프트에서 2라운드에 지명되며 혜성처럼 등장한 이 남자, 윌리스 리드의 등장으로 끝나게 된다. 루키 시즌 평균 19.5점 14.7리바운드를 기록하며 뉴욕의 희망으로 떠오른 리드는 데뷔 3시즌 만에 팀을 다시 플레이오프에 올려놓았고, 뉴욕은 끝을 알 수 없던 어두운 터널에서 점차 벗어날 채비를 마쳤다. 

레드 홀츠먼 코치가 시즌 도중 감독으로 승진한 1967-68시즌 43승 39패를 기록하며 9시즌 만에 5할 승률을 회복하는데 성공한 뉴욕은 1969-70시즌 마침내 창단 첫 우승 트로피를 품에 안게 된다. 당시 뉴욕의 정규시즌 성적은 60승 22패. 첫 15경기에서 14승 1패를 거두며 엄청난 페이스를 보인 뉴욕은 이후 18연승을 질주하는 등 적수가 없는 모습을 보였고 그 결과 창단 처음으로 60승을 따내는 기염을 토한다. 

리드는 이 시즌 자신의 커리어-하이인 21.7점을 올렸다. 평균 리바운드는 13.9개. 든든하게 골밑을 지킨 리드를 필두로 월트 프레이저(20.9점), 딕 바넷(14.9점), 데이브 드부셰어(14.6점), 빌 브래들리(14.5점) 등이 중심이 된 뉴욕의 조직력은 톱니바퀴처럼 맞아 들어갔다. 

이 시기 뉴욕은 리그 최고의 수비 팀이었다. 1968-69시즌 평균 105.2실점으로 리그 1위에 올랐던 뉴욕은 이후 6시즌 중 5차례나 리그 최고의 수비 팀으로 군림했다. 프랜차이즈 첫 우승을 차지했던 1969-70시즌 역시 마찬가지. 105.9실점과 92.4의 디펜시브 레이팅 수치 모두 리그 1위에 해당했다. 당시 뉴욕은 115.0득점으로 리그 9위에 머무르며(당시 총 14개 팀) 평균 이하의 공격력을 지닌 팀이었지만 엄청난 수비력을 앞세워 매서운 연승을 질주할 수 있었다. 

플레이오프에서 뉴욕은 볼티모어(4승 3패), 밀워키(4승 1패)를 차례로 꺾고 파이널에 진출했다. 당시 뉴욕의 파이널 상대는 LA 레이커스. 엘진 베일러, 제리 웨스트, 윌트 체임벌린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레이커스를 상대로 뉴욕은 7차전 접전 끝에 승리를 따내며 창단 첫 우승을 품에 안았다. 

 

The Jump 

뉴욕이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던 1969-70시즌 파이널. 당시 파이널 시리즈의 7차전은 ‘The Jump’로 일컬어지는 리드의 전설이 탄생한 경기이기도 하다. 당시 리드는 4차전까지 평균 32.0점을 기록하며 뉴욕을 이끌고 있었다. 4차전까지 두 팀은 2승 2패로 팽팽한 상황. 

시리즈의 향방을 가를 수 있는 5차전. 경기 도중 리드는 허벅지 부상을 당하며 코트를 이탈했다. 경기는 뉴욕이 107-100으로 잡아냈지만 리드의 부상 정도를 볼 때 향후 시리즈 출전을 장담할 수 없었다. 

예상대로 리드는 6차전을 결장했다. 그리고 뉴욕은 113-135, 22점차 대패를 당했다. 7차전에서도 리드가 출전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뉴욕 프랜차이즈 첫 우승 기회가 그렇게 물거품이 되는 듯 했다. 

“우리는 리드가 출전할 수 있을지 아닌지 알지 못한 채 워밍업을 위해 라커룸을 나가야 했다” 

리드의 팀 동료였던 빌 브래들리가 회상한 7차전을 앞둔 풍경이다. 그렇게 메디슨 스퀘어 가든의 분위기가 어둠으로 가득 차있을 찰나, 당시 경기장에 들어서 있던 19,500명의 관중들은 믿기 힘든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리드가 절뚝거리는 다리와 함께 경기를 뛰고자 경기장 안으로 들어선 것. 

그리고 리드는 채임벌린을 상대로 점프볼을 따내더니 팀의 첫 득점에 이어 중거리슛까지 림에 꽂으며 순식간에 4점을 만들어냈다. 이 득점을 마지막으로 그는 더 이상 득점을 만들어내지 못했지만, 동료들의 심장에 뜨거운 불길을 타오르게 만드는 데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리드의 투혼에 자극을 받은 뉴욕은 레이커스를 압도하는 경기력을 보였다. 프레이저가 36점을 기록하며 펄펄 난 가운데 바넷 역시 21점을 보탰다. 이들의 활약을 앞세운 뉴욕은 113-99로 레이커스를 따돌리는데 성공한다. 믿기지 않는 투혼으로 뉴욕의 첫 우승을 이끈 리드는 정규시즌 MVP와 올스타전 MVP에 이어 파이널 MVP 트로피까지 손에 넣으며 위대한 업적을 인정받았다. 

이후에도 한동안 뉴욕의 강세는 이어졌다. 2년 뒤인 1971-72시즌. 뉴욕은 리드가 왼쪽 무릎 부상으로 11경기 출전에 그쳤음에도 파이널에 진출했으나 이번에는 레이커스에게 1승 4패로 패했다. 그러나 뉴욕은 이듬해인 1972-73시즌 프레이저를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레이커스와 파이널에서 조우하며 4승 1패로 1년 전의 패배를 복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이 시즌의 우승은 아직까지도 뉴욕 프랜차이즈의 마지막 우승으로 남아있다. 

 

Era of Ewing

윌리스 리드가 1973-74시즌을 끝으로 은퇴한 뒤 뉴욕은 다시 나락의 길을 걸었다. 리드 은퇴 후 첫 시즌이었던 1974-75시즌 플레이오프 진출에 성공하긴 했지만 승률은 5할 밑으로 떨어졌고,(40승 42패, 0.488) 이후 13시즌 동안 플레이오프 진출은 5차례에 불과했다. 1984-85시즌부터는 3시즌 연속 2할대 승률에 머무는 등 그야말로 처참한 모습이 이어졌다. 

그런 뉴욕을 구원해 줄 또 한 명의 영웅이 등장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그 주인공은 조지타운 대학에서 최고의 센터로 군림하며 많은 팀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던 패트릭 유잉. 흔히들 이야기하는 1990년대 NBA의 4대 센터 중 한 명이며 ‘뉴욕의 왕(The King of New York), 동부의 야수(The Beast of the East)’ 등의 별명으로 불린 유잉은 뉴욕의 유니폼을 입었던 선수들 중 역대 최고의 선수로 손꼽힐 만큼 위대한 업적을 남겼다. 

그가 드래프트에 참여한 1985년 드래프트는 ‘유잉 드래프트’라고 불릴 정도로 유잉을 향한 관심은 상상초월이었다. 로터리 추첨 당일. 인디애나와 함께 최종 후보로 남게 된 뉴욕. 데이비드 스턴 총재의 손에 모든 관심이 쏠린 상황에서 1순위의 행운을 거머쥘 주인공은 뉴욕으로 발표됐다. 뉴욕 프랜차이즈의 또 다른 전성기를 이끌 괴물 센터는 그렇게 메디슨 스퀘어 가든에 입성했다. 

유잉은 루키 시즌 50경기에 나서 평균 20.0점 9.0리바운드의 준수한 기록을 남긴다. 그러나 기대와 달리 뉴욕은 23승 59패의 성적에 머무르며 전년도(24승 58패)와 크게 다를 것 없는 성적을 거뒀다. 당시 뉴욕은 직전 시즌 32.9점을 올렸던 버나드 킹이 부상으로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고, 핵심 골밑 자원이었던 빌 카트라이트 역시 부상으로 인해 2경기 출전에 그친 상황이었다. 그 결과, 이제 막 NBA 유니폼을 입었던 햇병아리 유잉이 팀 내 최다 득점과 리바운드를 기록하게 되는 촌극이 펼쳐졌다. 

유잉의 진가가 드러나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데뷔 후 3번째 시즌이던 1987-88시즌. 유잉은 정규시즌 20.2점 8.2리바운드 3.0블록슛을 기록하며 뉴욕의 골밑을 든든히 지켰고, 그 결과 처음으로 플레이오프에 진출하게 된다. 비록 첫 플레이오프 무대에서는 래리 버드가 이끌던 보스턴을 만나 1승 3패로 탈락을 맛봤지만, 이는 ‘뉴욕의 왕’의 새로운 탄생을 알린 시작점에 불과했다. 

이후 유잉은 뉴욕의 유니폼을 입고 13시즌을 더 뛰었다. 그리고 이 기간 동안 뉴욕은 단 한 차례(1990-91시즌, 39승 43패)를 제외하면 매 시즌 5할 이상의 승률을 거두며 플레이오프 티켓을 놓치지 않았다. 비록 우승 트로피는 거머쥐지 못했지만 이 기간 동안 파이널에도 2차례(1993-94시즌, 1998-99시즌) 오르며 동부 컨퍼런스 강자의 지위를 유지한 뉴욕이다.

첫 전성기가 그러했듯, 두 번째 전성기 시절에도 뉴욕의 팀 컬러는 ‘질식 수비’였다. 유잉을 필두로 존 스탁스, 앤써니 메이슨, 찰스 오클리 등이 뭉친 뉴욕은 ‘갱스터’라는 별명을 얻게 될 만큼 거친 수비를 앞세워 상대 팀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이러한 뉴욕의 팀 컬러를 이끌어 낸 인물은 바로 팻 라일리. 라일리가 지휘봉을 잡은 4시즌 동안 뉴욕은 평균 실점 1위 2차례, 디펜시브 레이팅 1위 3차례를 기록하며 끈끈한 수비 조직력을 과시했다. 

 

눈물겨운 우승 도전기

유잉의 성장과 함께 다시금 강팀 반열에 오른 뉴욕에게 더 이상 플레이오프 진출 정도는 만족할만한 성과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1972-73시즌 이후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구경도 하지 못했던 우승 반지가 절실히 필요했다. 

그러나 문제는 하필 뉴욕이 우승권에 근접한 시기가 1980년대 후반이라는 점이다. 이 시기가 왜 문제가 되냐고? 정답은 간단하다. 유잉보다 1년 앞선 1984년 드래프트에서 1라운드 3순위로 노스캐롤라이나 대학 출신의 마이클 조던이 시카고 불스의 유니폼을 입었기 때문이다. 

조던이 한창 전성기 기량을 과시하며 NBA의 아이콘으로 자리 잡은 기간이 하필이면 뉴욕의 두 번째 전성기 구간이었다. 그리고 조던의 시카고는 무려 5차례나 유잉의 뉴욕을 플레이오프에서 탈락시킨다. 특히 1990-91시즌부터 1992-93시즌까지는 3년 연속 맞대결을 펼쳐 3차례 모두 시카고가 시리즈를 가져갔다. 

물론 뉴욕에게도 기회는 있었다. 1993-94시즌. 쓰리-핏을 달성한 조던이 은퇴를 선언하자 더 이상 시카고는 뉴욕의 앞길을 막아서지 못했다. 2라운드에서 시카고를 만나 4승 3패로 승리를 따낸 뉴욕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조우한 인디애나 역시 4승 3패로 꺾으며 파이널에 진출했다. 

패트릭 유잉과 하킴 올라주원의 맞대결로도 많은 관심을 모았던 대결. 이 파이널 무대에서 뉴욕은 5차전까지 3승 2패로 앞섰다. 남은 2경기에서 1승만 따내면 꿈에 그리던 우승 반지를 따낼 수 있는 상황. 그러나 운명의 장난처럼 뉴욕은 6차전과 7차전을 내리 내주고 말았고, 그렇게 우승 도전은 허무하게 물거품이 됐다. 

1996-97시즌에는 앨런 휴스턴과 크리스 차일즈 등을 영입해 전력을 끌어올린 뉴욕이다. 이 시즌 57승을 따낸 뉴욕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다. 2라운드 무대에서 만난 마이애미를 상대로 4차전까지 3승 1패를 거두며 압도했지만 5차전에서 벌어진 난투극으로 인해 주축 선수들이 대거 출전 정지 징계를 받는 황당한 사건이 벌어졌고, 결국 뉴욕은 내리 3연패를 당하며 또 다시 탈락한다. 이어진 1997-98시즌 크리스 더들리와 크리스 밀즈를 영입해 대권 도전에 나선 뉴욕은 유잉이 손목 골절이라는 치명적인 중상으로 이탈한 탓에 2라운드에서 탈락을 맛봤다. 

단축시즌으로 치러진 1998-99시즌에는 ‘8번 시드의 기적’이 일어났다. 당시 뉴욕은 27승 23패의 성적으로 동부 컨퍼런스 8위에 그쳤지만 1라운드에서 1번 시드 팀인 마이애미를 격파한데 이어 애틀랜타, 인디애나를 연이어 무찌르며 파이널까지 진출해내는 기염을 토한다. 

이 과정에서 유잉의 눈물겨운 투혼이 빛을 발했다. 이미 선수로서의 황혼기가 지난 유잉은 시즌 내내 아킬레스건 부상에 시달리며 예전과 같은 모습이 아니었다. 그러나 유잉은 사실상 뛰는 것이 불가능한 몸 상태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정신력을 발휘하며 팀을 이끌었고, 이는 뉴욕의 다른 선수들이 정신무장을 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다만 컨퍼런스 파이널 2차전 이후 더 이상 출전한다면 선수 생명이 끝난다는 의료진의 경고를 받은 유잉은 파이널에 나설 수 없었고 그 결과 뉴욕은 다시 한 번 우승 문턱에서 좌절을 맛봤다. 

유잉과 함께했던 마지막 시즌인 1999-00시즌. 뉴욕은 50승을 따내며 재도전에 나섰지만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인디애나에게 패하며 시즌을 마쳤다. 그리고 2001-01시즌을 앞둔 9월 말, 뉴욕은 유잉을 트레이드로 떠나보내는 충격적인 결정을 내렸고, 이후 기나긴 암흑기를 보내고 있다.

 

사진 = 로이터/뉴스1 제공, 위키피디아 커먼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