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시래대잔치

2020-09-06     원석연 기자

[루키=원석연 기자] “상장, 득점상, 명지대학교 김시래. 내용은 같습니다. 상장, 어시스트상. 명지대학교 김시래. 내용은 같습니다... 아...! 김시래 선수. 상장, 수비상. 명지대학교 김시래.”

2011년 12월 안산에서 열린 농구대잔치, 대학리그에서 8위에 그쳤던 약체 명지대는 야전사령관 김시래의 지휘 속에 한양대, 연세대, 건국대를 꺾고 사상 처음으로 대회 결승에 올랐다. 비록 결승에서는 아마추어 최강 상무를 만나 석패했지만, 그해 농구대잔치는 이미 김시래의 독무대였다. 대회 3관왕을 차지하고 시상식 단상에서 내려오는 김시래를 보며 한 매체는 기사를 통해 대회의 이름을 다시 지었다. 

‘명지대 가드 김시래를 위한 대잔치, 시래대잔치.’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20년 9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1

중 2때까진 늘 첫째 줄이었다. 초등학교 졸업할 때 키가 148cm. 겨우 160이 됐을 무렵, 자신의 손재주가 제법 쓸 만하다는 걸 깨닫고 본격적으로 농구에 빠져들었다.

“초등학교 때 특활 해보셨죠? 특별활동. 초등학교 3학년 때였어요. 담임 선생님이 토요일마다 하는 특별활동을 정하겠다고 하더라고요. 제가 그때도 공놀이를 좋아해서 친한 친구들이랑 축구를 하고 싶었거든요. 친구 4명이랑 다른 데 손 안 들고 축구부만 기다리고 있었는데 마지막까지 축구부가 안 나오는 거예요. 알고 보니 축구부는 특활에 없었던 거죠.(웃음) 다른 데는 다 찼고 마지막 남은 게 이제 농구부,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농구부에 들었어요. 그때 제 키가 130cm이었어요.”

그때까지만 해도 별다른 생각은 없었다. 많아 봤자 일주일에 한 두 번 하는 특별활동이었으니까. ‘해보고 재미없으면 내년에는 친구들이랑 다른 거 하지 뭐.’ 10살 김시래는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특활이 다 그렇잖아요. 뭐 평범한 것들 많잖아요. 영화감상부, 마술부, 독서부... 근데 농구부는 다르더라고요. 알고 보니 엘리트 농구부였던 거예요. 첫 입부한 날부터 6학년 형들 운동하는 걸 보는데 와... 살벌하더라고요. ‘저런 운동을 어떻게 할까’ 싶었는데 3년 뒤에 제가 똑같이 하고 있었죠.”

시작은 달콤하고 평범하게 끌렸다. 4학년까지는 제대로 된 운동이 아닌 말 그대로 공 튀기고 공 던지는 공놀이를 시켰는데, 그게 축구만큼이나 재밌었다. 속아서 시작한 농구는 어린 김시래의 마음을 홀렸다. 

“하다 보니 재밌더라고요. 어느 날 부모님께 집에 가서 ‘저 농구 계속 할게요’했더니 무척 심하게 반대하셨어요. 집안 형편이 안 좋았거든요. 그때만 해도 운동을 하면 비용이 워낙 만만치 않았으니까. 안 시키려고 하시길래 저도 그만두려다가 학교 선생님까지 오셔서 부모님을 설득하시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지금 시켜주시면 끝까지 하겠다’면서 다시 말씀을 드렸어요.”

자식 이기는 부모 없다고. 부모님은 김시래의 고집을 더 꺾지 않으셨다. 그러나 김시래의 걱정과 달리 부모님은 그가 학교를 졸업하는 날까지 돈 얘기를 꺼낸 적이 없었다.

“형편이 안 좋은데, 친구들한테 부끄럽지 말라고 회비를 하루도 안 밀리셨어요. 신발이나 용품도 남 부끄럽지 않게 좋은 거로 항상 사주셨어요. 다행인 건 제가 그 나이 때 그걸 눈치를 챘다는 거죠. ‘아, 부모님이 나 때문에 일을 더 나가시는 구나.’, ‘더 열심히 해야겠다.’ 정말 부모님 생각하면서 운동 했어요 저는. 그때 운동이 정말 힘든 시절이라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도 많이 들었는데, 부모님한테 처음 드렸던 약속, 끝까지 하겠다는 그 약속 지키려고 정말 끝까지 버텼죠.”

“아, 저 공부도 잘했어요. 농구하기 전인 2학년 때까지는 방학식 날 상장도 막 5개씩 가져가고 그랬어요. 한자경시대회에서 입상도 하고.”

 

#2

김시래는 연가초를 졸업하고 명지중학교에 진학했다. 초등학교 때도 엘리트 운동부였지만, 중학교 운동부의 운동은 차원이 달랐다. 그때 김시래를 지도했던 코치가 지금 성균관대 김상준 감독이다.

“어휴, 중학교는 정말 많이 다르더라고요. 지금 생각해도 정말로.(웃음) 김상준 감독님이 계셨는데 운동량이 어마어마해도 분위기는 꽤 괜찮았어요. 새벽, 오전, 오후, 야간 네 탕을 뛰었는데 그러면서도 선수들을 다 아들처럼 대해주셨거든요. 지금 떠올리면 힘든 것보다 재밌던 게 더 많이 기억나요. 김상준 감독님은 지금도 가끔 보면 너무 반갑죠. 근데 여전히 칭찬은 잘 안 해주시더라고요.”(웃음)

지금은 웃으며 말할 수 있지만, 명지중-명지고에서 보낸 6년은 그에게 고되고, 불안했던 시간이었다. 프로에 갈만한 선수들은 빠르면 중학교, 늦어도 고교 시절에는 이미 이름을 날리기 마련인데, 김시래는 그때까지만 해도 큰 두각을 나타내지 못했다. 전국구는커녕 팀 내에서도 3학년이 되기 전까진 벤치를 지키는 일이 많았다. 그리고 그가 스무 살이 되던 해.

“농구를 하면서 제일 서러웠던 때가 있어요.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원서를 내던 때였죠. 명지고가 강팀도 아니었고 그해 성적도 못 냈어요. 졸업을 앞두고 있는데 불러주는 학교가 한 군데도 없더라고요. 마음의 상처가 컸죠. 여태까지 저는 한 게 농구밖에 없는데, 아무도 날 찾아주지 않는다는 생각이 정말 절망스러웠어요. 다행히 그때 코치님이셨던 김현주 선생님께서 연계 학교인 명지대에 보내주시긴 했는데, 저는 명지대 갈 때도 졸업 생각 안 했어요. 딱 1년. 1년만 할 생각으로 보고 갔어요. 1년 동안 여기서 죽을 만큼 해보고 여기서 안 되면 농구는 내 길이 아닌 거다. 이 생각으로 입학했거든요.”

죽으라는 법은 없었다. 비장한 각오로 입학한 신입생 김시래는 명지대에서 박대남과 변현수를 만났다. 비주류인 명지대치고 선수단 구성이 나쁘지가 않았던 터라 1년만 하고 갈 생각으로 온 김시래는 그해 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했다.

“그때 멤버가 나쁘지 않았어요. 그런데 대학교에 와서도 사실 저는 주전이 아니었거든요. 벤치도 아니고 정말 연습게임에도 잘 못 나올 정도였어요. 그런데 1학년 이제 첫 대회 때, 지금 오리온에 가신 강을준 감독님이 계셨거든요. 그때 대회에서 시합을 하는데, 1쿼터에 가드 형들이 좀 부진했어요. 시작한 지 3분 만에 감독님이 갑자기 ‘몸 풀어라’라고 하시는 거예요. 뛸 거라고 생각도 못하고 있었기에 되게 당황했죠. 그렇게 경기에 투입됐는데, 거기서 제가 잘했어요. 그때부터 이제 경기에 좀 뛰는, 농구 ‘선수’가 됐죠.”

 

#3

2011년 12월 18일이었다. 안산 올림픽기념관 체육관에는 남대부, 여대부, 남고부, 여고부 총 28개 팀이 농구대잔치 개막을 위해 모였다. 명지대학교 4학년 김시래는 사실 대회에서 빠지고 싶은 마음이 컸다.

“감독님. 저희 4학년은 드래프트도 얼마 안 남았는데 대회에서 빠지고 드래프트 준비를 하는 게 좀...”

명지대 박상관 감독이 답했다.

“뭔 소리야? 뛰어 이 자식들아.”

이때만 해도 김시래는 전혀 몰랐다. 2011 농구대잔치는 훗날 ‘시래대잔치’로 불리고, 박상관 감독의 심드렁한 이 한마디가 김시래의 인생을 바꿔놓으리라는 것이라는 것을.

#4

그해 명지대는 대학리그에서 8위를 기록한 약체였다. 리그 22경기에서 9승 13패로 승률이 5할이 채 안 되는 플레이오프 탈락 팀. 박지훈, 김기성, 김수찬, 배강률 그리고 김시래의 명지대가 농구대잔치에서 선전하리라 예상한 이는 없었다. 

명지대가 예선에서 차바위와 이재도의 한양대를 95-87로 꺾고, 상명대를 잡고 본선에 오를 때만 하더라도 그랬다. 100이면 100 명지대의 돌풍은 6강 연세대전에서 멈출 줄 알았다. 당시 연세대는 전준범, 박경상, 최승욱, 주지훈으로 이어지는 탄탄한 라인업을 자랑하는 우승후보였으니.

“다 저희가 진다고 생각했어요. 언론, 관계자들, 솔직히 저희도 마음을 비우고 나갔으니까요. 그냥 예선에서 하던 대로, 재밌게 뛰고 나오자고 들어갔거든요. 그런 건 있었어요. 제가 그전까지 연대를 4년 동안 한 번도 이겨본 적이 없었거든요. ‘마지막 대회인데 한 번은 잡아보고 싶다...’ 그런 생각은 있었죠.”

당시 연세대와 명지대의 위상은 하늘과 땅 차이였다. 대학리그 두 차례 맞대결에서는 당연히 연세대가 모두 이겼다. 명지대는 첫 번째 경기에서 38점, 두 번째 경기에서는 22점 차로 졌다. MBC배에서도 만났는데, 이 경기 역시 30점 차로 패배. 2011년 명지대는 연세대와 3경기에서 –90의 득실 마진을 기록하고 있었다.

#5

명지대와 연세대의 6강은 12월 25일 크리스마스에 열렸다. 1쿼터는 모두의 예상대로 연세대의 압도적 우위. 연세대는 주지훈의 높이를 살려 29-18로 1쿼터를 마쳤다. 그러나 남은 30분이 모두 흐른 뒤, 2011 농구대잔치 남대부 6강전의 기록지는 다음과 같았다.

[연세대]

주지훈 : 40분00초 33점 17리바운드 2어시스트
박경상 : 34분30초 22점 6리바운드 2어시스트

[명지대]

김시래 : 40분00초 33점 5어시스트 4리바운드

명지대 88-81 연세대

 

#6

“상장, 득점상, 명지대학교 김시래. 내용은 같습니다. 상장, 어시스트상. 명지대학교 김시래. 내용은 같습니다... 아...! 김시래 선수. 상장, 수비상. 명지대학교 김시래.”

6강에서 연세대를 꺾은 명지대는 4강에서 건국대마저 잡고 결승에 오른다. 이후 결승에서 상무를 만나 준우승에 그쳤지만, 이 대회의 주인공은 이미 김시래와 명지대였다. 6경기에서 25.5점 8.0어시스트를 기록한 김시래는 시상식에서 득점상, 어시스트상, 수비상까지 3관왕에 올랐다. 

“그땐 정말...(웃음) 대회를 치르는 그 하루하루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나날들이었어요. 계속 떠 있는 듯한 기분이라고 해야 할까? 사실 그 대회는 (박)지훈이랑 (김)수찬이가 앞에서 정말 잘 달려줘서 게임이 잘 풀렸어요. ‘시래대잔치’의 큰 지분을 차지한 친구들이었죠. 크게 한턱 쐈어야 했는데 제가 경황이 없어서 밥도 한 번 못 샀던 것 같아요. 시래대잔치. 제 인생을 바꾼 대회죠. 누가 지어주셨지는 몰라요. 그저 감사할 따름이죠.”

#7

“대회를 치르기 전까지만 해도 감독님이 말씀하시길 1라운드 5순위 밑으로 평가받고 있다고 하셨어요. 1순위는 생각도 못했죠. 대회를 치르고 주가가 오르긴 했는데, 그래도 불안했어요. 드래프트 하루 전까지만 해도 엄청 뒤척거렸어요. 너무 긴장해서 잠을 제대로 못 자고 갔는데, 그래서 트라이아웃도 되게 피곤한 상태로 했거든요. 큰 실수를 한 건 아니었는데, 그렇다고 또 잘하지도 않았어요.”

명지대를 최초로 농구대잔치 결승전으로 이끌며 역사의 주인공이 됐던 김시래는 이듬해 드래프트에서 또 하나의 역사를 쓴다. 당시 1순위 지명권을 갖고 있던 모비스(현 현대모비스)의 지명을 받으면서 명지대 최초의 1순위 선수가 된 것이다.

“엄청난 영광이었는데, 막상 가려니까 한편으로는 두려운 마음도 좀 생기더라고요. (양)동근이 형, (함)지훈이 형이 있는 워낙 쟁쟁한 팀인 데다가 ‘내가 과연 기대치에 맞는 활약을 펼칠 수 있을까’ 싶어서.”

유재학 감독은 김시래를 뽑자마자 들뜬 목소리로 “양동근의 후계자로 적합한 선수”라고 말했다. 당대 최고의 선수였던 양동근의 후계자로 지목된 것은 기쁜 일, 그러나 반대로 말하면 그만큼 양동근이 모비스에서 차지하고 있는 비중은 어마어마했다.

“팀에서 자체 연습을 할 때마다 (양)동근이 형이랑 매치를 했어요. 사실 신인 땐 웬만한 경기보다 연습 때 동근이형과 매치가 더 도움이 많이 됐던 것 같아요. 배운 것도 많고, 최고의 선수랑 연습하면서 자신감도 생기고.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때 정말 동근이 형한테 배운 게 많았어요. 연습 때도 그렇고 연습이 끝나고 나서 라커룸에서도 배울 게 많았죠. 존재 자체가 리더로 태어난 사람 같았어요. 가만히 있어도 선수들을 따르게 하는 사람이었죠.”

 

#8

그러나 김시래는 양동근의 후계자가 될 수 없었다. 모비스는 2012-2013시즌 챔피언 결정전에서 SK를 꺾고 우승한 다음 날, 챔프전에서 맹활약한 김시래의 트레이드를 발표했다. 커티스 위더스-로드 벤슨 트레이드의 후속 트레이드였다. 우승의 기쁨을 만끽하기도 전에 곧바로 발표된 날벼락 같은 소식.

“솔직히 정규시즌 막바지에 눈치는 채고 있었어요. 저는 모르고 있었는데 다른 팀 선수들이 얘기를 해주더라고요. ‘너 끝나고 LG 간다며?’, ‘트레이드라는데?’라고. 구단으로부터 정확히 들은 건 우승하고 다음 날 새벽이었어요. 국장님이 제 방에 오셔서 ‘트레이드됐다’고 하시는 거예요. 그날 아침에 기사가 뜰 예정이었는데, 기사가 뜨기 전에 귀띔을 해주신 거죠. 트레이드 될 거라고 생각은 하고 있었는데, 정말 우승 다음 날 될 줄은 몰라서 많이 당황스러웠죠. 한숨 자고 일어나니까 정말 기사가 떠 있었고, 이미 난리가 나 있더라고요. 바로 동근이 형한테 찾아 갔는데 좋은 얘기 많이 해주셨어요. 그리고 유재학 감독님한테도 찾아가서 인사드리고...”

정규시즌 말미부터 이미 눈치를 챈 김시래였지만, 그의 경기력은 오히려 그때를 즈음하여 더욱더 좋아졌다. 정규시즌 54경기에서 평균 6.9득점 3.0어시스트 1.2스틸을 기록한 그는 챔피언 결정전에서 10.3점 5.0어시스트 2.5스틸로 정규시즌 두 배에 가까운 성적을 냈다.

“플레이오프부터는 그런 생각을 아예 잊고 경기에만 집중했어요. 그냥 모두 잊고 이 상황,  이 경기, 이 포제션에만 집중하자고 스스로 생각했죠. 너무 재밌었으니까. 제가 초등학교 때 이후로 무슨 대회에서 우승한 적이 없었거든요. 우승을 정말 하고 싶었어요.”

“그땐 좀 섭섭한 게 있었지만, 지금은 다 이해해요. 프로에서는 그렇게 모든 걸 걸어야 할 때가 있거든요. 모비스는 그때 모든 걸 걸었던 거고, 결국 우승을 했으니까 잘한 비즈니스였죠.”

 

#9

그렇게 우승 다음 날, 전날 마신 우승주의 숙취가 가시기도 전에 LG로 트레이드된 김시래는 이제 팀의 리더가 됐다. 8년 전 루키 김시래가 양동근을 보고 입단한 것처럼, 이제 LG로 오는 신인들은 김시래를 보고 입단한다. 

그냥 나이만 많은 리더가 아니다. 그는 팀의 중심이다. 지난 시즌 김시래는 10.5점 4.8어시스트를 기록했는데, 최근 3시즌 연속 10.0점+ 4.0어시스트+를 기록한 선수는 KBL에 단 세 명뿐이다. KCC 이정현, KT 허훈 그리고 LG 김시래. 김시래를 제외하면 모두 MVP 출신으로 그만큼 달기 어려운 훈장.

“하하. 좋은 기록이긴 한데, 개인 기록은 이제 정말 아무 욕심 없어요. 특히 지난 시즌을 겪고 나니까 더 그래요.”

10.5점 4.8어시스트. 숫자만 놓고 보면 나쁘지 않아 보이지만,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면 김시래의 지난 시즌은 잊고 싶은 시즌이다. 야투율은 31.3%로 데뷔 후 가장 낮았고, 출전 경기 수 또한 25경기에 그쳤다. 턴오버도 2.2개로 지난 시즌에 비해 0.5개나 늘었다.

“최악의 시즌이었죠. 야투율도 그런데 무엇보다 경기에 많이 빠졌다는 게 제일 싫었어요. 팀에 도움이 아예 못 된 거니까. 경기에 나가서도 못했죠. 작년에는 좀 안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었어요. 시즌 전부터 ‘올해는 시래 네가 공격을 해줘야 한다’고 압박을 받으니까 저도 코트 위에서 조급해진 거죠. 예전부터 제가 하던 플레이가 있는데, 지난 시즌에는 공을 잡으면 어떻게든 제가 쏴야 한다고 생각했으니까. 올해는 다시 돌아가려고 해요. 저는 가드의 역할은 팀을 유기적으로 만드는 게 먼저라고 생각하거든요. 다섯 명이 모두 공을 만질 수 있는 유기적인 농구, 제가 가장 잘 할 수 있는 농구로.”

때마침 만난 조성원 신임 감독은 이런 김시래에게 날개를 달아줄 적임자처럼 보인다. LG의 8대 사령탑으로 취임한 조 감독은 김시래의 명지대 18년 선배로 이들 두 사람은 명지대가 낳은 최고의 스타들이다. 아무리 학연, 지연, 혈연이 적폐로 지탄받는 시대라지만, 이런 학연은 환영이다.

“감독님께서 올해 평균 90점을 넣고 싶다고 말씀하시잖아요? 그런데 그게 그냥 숫자만 말씀하시는 게 아니라 그 속에 다 감독님의 철학이 있어요. 먼저 ‘농구는 넣으려고 하는 거고, 넣으려면 그만큼 던져야 한다’고 하시거든요. 90점을 넣기 위해서는 한 경기에 80번은 공격을 해야 한다고 하세요. 그러면 또 80번의 공격을 시도하기 위해서는 수비부터 준비를 하는 거죠. 스틸 후 속공은 당연한 거고, 수비 리바운드를 잡고 바로 달린다거나, 아니면 실점을 하고서도 바로 달려서 페이스를 끌어 올리는 거죠. 가드만 그러는 게 아니고 팀원 모두가 뛰는 거예요. 그런데 5명이 그렇게 다 뛰어나가니까 시너지가 나더라고요. 저도 팀에서 이런 에너지가 느껴지는 건 정말 오랜만에 봐요.”

벌써 8년 차의 베테랑이지만, 농구 얘기를 하는 그의 표정은 특별활동을 잘못 골라 농구부에 들어와 공을 처음 잡은 3학년 아이처럼 천진난만해 보였다.

 

#10

몇 번이나 농구를 그만둘 뻔했다. 초등학생 김시래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농구를 그만두려 했다. 중학생 김시래는 갑자기 많아진 훈련량에 놀라 농구를 그만두려 했다. 스무 살 김시래는 불러주는 학교가 없어 농구를 그만두려 했다. 

그러나 김시래는 이제 더 이상 농구를 그만 둘 생각이 없다. 32살의 창원 LG 세이커스 김시래는 자신의 황혼기를, 자신이 뛰고 있는 이곳 KBL 무대를 9년 전 농구대잔치처럼 다시 자신의 무대로 만들 생각이다.

“첫째 딸 채빈이가 이제 4살이거든요. TV에 제가 나오면 이제 앞으로 가서 손가락으로 저를 가리키면서 알아봐요. 애들이 이렇게 크는 걸 볼 때마다 좀 더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고 싶거든요. 더 자랑스러운 아빠, 더 농구 잘하는 아빠로... 그래서 이번 여름 운동 정말 열심히 했어요. 데뷔 후 제일 열심히 했거든요. 올 시즌은 정말 다시 해야 할 때니까.”

그래서 우리는 올 시즌 김시래를 주목해야 한다. 다시 반등할 김시래를, 다시 날아오를 LG를, 다시 열릴 시래대잔치를.

 

사진 = 이현수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