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환의 앤드원] 6개 반지와 떠나는 양동근 “나는 역대 최고가 아니다”

2020-04-21     이동환 기자

[루키=이동환 기자] 양동근은 기자들 사이에서 인터뷰하기 어려운 선수로 통한다. 마치 자신의 플레이스타일처럼 어떤 질문에도 모범적이고 정석적인 대답을 내놓아 기사를 쓰기가 쉽지 않았던 적이 많았다.

하지만 은퇴라는 사건이 그의 마음을 보다 편안하게 만들어준 걸까. 최근 만난 양동근은 어느 때보다 솔직하고 유쾌한 답변으로 한 시간 가까운 인터뷰 시간을 알차게 만들어줬다. ‘역대 최고’라는 평가에 대해 이야기할 때는 쑥스러운 듯 웃으며 손사래를 치다가도, 현역 시절에 대한 이야기가 길어질 때는 한없이 진지한 표정으로 속내를 털어놓기도 했다. 지금부터 KBL 역대 최고의 남자, 'The G.O.A.T' 양동근과 나눈 이야기를 공개한다.

 

은퇴 기자회견 후에 일주일 가까이 흘렀다. 요즘에는 인터뷰가 더 많다고 들었다. 어떤 기분으로 지내고 있는지 궁금하다.

사실 은퇴에 대해 늘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갑자기 기분이 달라지고 그런 것은 없다. 돌이켜 보면 갑작스럽게 은퇴를 발표하게 된 것은 가족들을 생각해서라도 분명 아쉽긴 하다. 팬 분들이나 주변에서도 당시에 많이 놀라셨었다.

기자회견 때 눈물도 많이 흘렸다. 끝나고 허전함 같은 건 없었나.

그런 감정은 없었다. 당시에 눈물이 많이 나왔던 이유가 있다. 운동을 하는 동안 부모님과 가족들이 정말 많은 희생을 했었다. 그런 것에 대한 감사함이 컸다. 그래서 눈물이 많이 났다. 선수들과 같이 지내면서 느낀 고마움도 눈물을 흘린 이유였다.

은퇴 소식이 알려진 후에 쏟아진 문자메시지에 미처 답을 다 못했다고 했었다.

제가 어떤 과정으로 은퇴 기자회견을 하게 됐는지 다들 아시지 않는가. 기사가 예상치 못하게 먼저 나오는 바람에 당황을 많이 했다. 그럼에도 기사가 나온 당일은 원래 계획했던 일상 생활을 하려고 했다. 다음 날은 기자회견을 앞두고 어떤 이야기를 할지 준비하고 생각을 하고 마음을 추스르느라 정신이 없엇다. 그래서 문자메시지에 계속 답을 못 드렸다. 기자회견이 끝나고 시간을 두고 천천히 다 답변을 하고 싶어서 일부러 참은 부분도 있다.

그럼 지금은 다 답장을 보냈나?

물론이다. SNS로 온 팬 분들의 메시지에도 짧게라도 다 답장을 드렸다.

은퇴 기자회견 후에도 팬들은 많이 아쉬워하는 분위기다. 온라인에는 여전히 양동근이라는 선수의 커리어를 되돌아보는 게시물들이 올라오고 있다.

정말 과분한 일이다.

팬들은 양동근이라는 선수를 정말 높게 평가하고 그간 코트에서 해준 것에 대해 감사해하는 듯하다.

그동안 너무나 과분한 사랑을 받아온 것 같다. 정말 감사드린다. 은퇴를 발표한 후에 SNS에 올라온 게시물들을 많이 봤다. 그걸 보면서 새삼 제가 정말 많은 사랑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느꼈다. 농구로 살아온 인생이다. 이제는 후배들이 농구를 하는 환경을 바꾸는 것은 물론이고 팬들께 받은 사랑에 보답하는 방법에 대해 고민해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이제 현대모비스는 포스트 양동근 시대를 맞이한다. 선배로서 팀과 후배들의 미래에 대한 걱정은 없을까.

다들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 저도 어릴 때부터 많은 경험을 쌓으면서 계속 성장했고 덕분에 과분한 평가를 받는 선수가 될 수 있었다. 후배들도 많은 경험을 통해서 더 좋은 선수로 성장할 수 있다고 믿는다. 잘 해낼 것이다.

어렸을 때 키가 작아서 고민이 많았다고 들었다. 그래서 코트에서 더 많이 뛰고 달리는 농구를 하려고 했다는 이야기가 있더라. 그게 플레이스타일에도 영향을 미친 건가.

어릴 땐 키가 작은 게 사실이었다. 사실 지금도 작지만 어릴 때 비하면 많이 큰 거라고 생각한다.

사실 키도 작았지만 농구를 저보다 잘하는 선수들이 정말 많았다. 경기에 출전도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운동을 안 할 수는 없었다. 달리기만큼은 남들에게 지지 말자는 생각으로 훈련을 했다. 어렸을 때부터 남들보다 더 많이 뛰고 잘 달려야 한다는 오기는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오기가 힘든 시간을 버틸 수 있는 원동력이 될 수 있었다.

학창 시절을 돌이켜 보면 고민이 참 많았다. 농구를 관두려는 생각도 많이 했던 기억이 난다. 새 학기가 되면 새로운 일반 학생 친구들을 사귀면서 유혹에 흔들리기도 했다. 일반 학생 친구들은 학교가 끝나면 놀기도 하고 그러는데 저는 훈련을 해야 하는 게 힘들었다. 그런 부분 때문에 마음이 많이 흔들리기도 했었다. 하지만 실력이 떨어져서 경기에 출전하지 못하는데도 부모님은 저와 관련된 일이면 어떻게든 학교까지 오시는 모습을 보면서 힘든 걸 꾹 참았다. 어떻게든 할 수 있을 때까지 버텨보자고 생각했다. 실력이 부족하니 체력만큼은 남들보다 좋아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포기하지 않고 계속 훈련을 했다.

스피드나 활동량을 늘리기 위해 어떤 준비를 했나.

농구를 하기 전부터 달리기는 잘하는 편에 속했다. 그것만큼은 자신이 있었다. 견디고 또 견뎠다. 어떻게든 그만두지 않고 하루하루를 잘 버텨냈던 것 같다. 그런 시간이 지금의 저를 만들었다.

“농구를 잘할 자신이 없었다면 애초에 시작하지 않았을 것이다”라는 말을 직접 한 적도 있었는데 혹시 기억하나.

(깜짝 놀라며) 정말 그런가? 제가 그런 말을 했나? 무슨 자신감으로 그런 얘기를 했는지 모르겠다.

루키 시즌에 그런 말을 했었더라.(웃음)

아, 프로에 온 뒤였나?

그렇다. 프로에 온 직후였다.

그렇다면 이해가 된다. 사실 대학에 온 뒤에는 스스로 농구에 대한 자신감이 많이 붙었었다. 제가 가장 크게 성장한 시기가 고등학교 신입생 시절부터 대학 시절까지였다. 운이 좋았다. 진짜 운이 좋았다. 제가 뭘 해도 코치님들이 믿어주셨다. 제가 하고 싶은 걸 다 하게 해주셨다. 그때는 자신감이 하늘을 찌를 때다. 겁이란 걸 모르던 시절이었다.

그 전까지 농구를 포기하는 것을 생각할 정도로 고민이 많았던 선수가 성장하면서 점차 달라진 건가.

그렇다. 지금 생각해보면 초등학교 때는 그저 중학교에 가기 위해 버티고, 중학교 때는 고등학교에 가기 위해 버티면서 농구를 했던 것 같다. 농구에 대한 재미와 자신감은 대학교에 오면서 본격적으로 생겼다. 특히 대학교 신입생 때부터 생각과 마음가짐이 많이 달라졌다.

그렇게 속앓이를 하던 시간이 길었다면 2004년 드래프트에 전체 1순위로 지명됐을 때는 가슴 한 켠에서 짜릿함도 느꼈을 것 같다.

최악의 드래프트라는 이야기를 들으며 프로에 온 상황이었다. 프로 무대에서 당장 외국선수들, 전설적인 선배들과 경쟁해야 하는 상황이기도 했다. 안팎의 혹평에 대한 생각 때문에 짜릿한 마음이 아주 크지는 못했다.(웃음) 

드래프트 후에는 막연한 자신감을 가진 채 아등바등 프로에서 살 길을 찾으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런 막연한 자신감이라도 갖지 않으면 프로라는 무대에서 살아남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농구를 잘할 자신이 없었으면 시작도 안 했을 것이라는 말은 그런 심리 때문에 나온 말일 것이다.

프로에 온 뒤로 대단한 선배 가드들을 코트에서 만나야 했다. 이상민, 신기성, 김승현 등등.

정말 대단했다. 심지어 다들 플레이스타일이 다 달라서 더 힘들었다. 선배들의 플레이를 연구하기 위해서 비디오를 정말 많이 봤다. 감독님이 조언해주신 부분이 있으면 그걸 확인하기 위해서 선배들의 비디오를 반복해서 보곤 했다. 선배들을 수비에서는 어떻게 막아야 하는지, 공격에서는 어떻게 그들을 공략해야 하는지 연구를 정말 많이 했다.

사실 저는 선수 생활 동안 비디오는 항상 많이 보는 편이긴 했다. 하지만 상무에 가기 전까지는 특히 더 많이 봤던 것 같다. 선배들을 분석하기 위해서였다. 팀 미팅할 때 다 같이 비디오를 보고 경기 전에 혼자서 비디오를 또 보며 선배들의 플레이를 공부했다.

비디오를 보면서 얻은 게 많았을 것 같다.

오히려 단념하게 된 게 있었다.

단념?

‘나는 절대 저 형들 같은 가드는 될 수 없겠구나’하는 단념이었다.(웃음) 가드의 시야는 타고나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선배들의 비디오를 보며 그들이 패스를 하는 순간만 보는 게 아니라 패스를 하기 전까지 어떤 과정을 거치는지 유심히 살펴보며 분석했다. 공을 잡기 전에 어떤 동작을 하고 코트의 어디를 보고 있는지, 그리고 공을 잡은 뒤엔 패스를 어떻게 실행에 옮기는지. 그런데 보면 볼수록 저는 그런 플레이가 도저히 안 된다는 걸 깨달았다.

워낙 패스가 뛰어났던 선배들이니 많이 따라해 보려고 했을 것 같은데.

결과적으로 그건 따라한다고 되는 게 아니었다. 유재학 감독님도 선배들과 저의 차이를 비디오를 함께 보며 하나하나 다 짚어주시곤 했다. 예를 들어 공격이 이런 방향으로 전개가 돼서 패스가 나가야 하는데, 그러기 위해서는 이전에 어떤 동작들을 가져가야 하는지에 대해 감독님이 정말 많이 말씀해주셨다. 그걸 공부하고 따라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막상 해보니 완벽하게 따라할 수는 없었다. 감독님은 그러는 와중에 저만이 가진 장점을 찾아서 살려주시려고 해주셨다. 정말 감사한 일이었다.

 

사실 데뷔 당시만 해도 농구계에는 정통 포인트가드에 대한 기대와 환상이 여전히 컸던 걸로 기억한다. 그런데 본인은 대학 때까지 해도 슈팅가드로 뛰기도 했고 공격적인 성향이 강한 가드였다.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포인트가드는 경기 운영과 패스를 일단 잘해야 한다는 시대적인 편견 때문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 같다.

저는 사실 그런 것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스타일이 아니긴 하다. 데뷔할 때는 제가 감히 어떤 평가를 받을 만큼 입지가 큰 선수도 아니었다.

다만 말씀하신 대로 저에 대해 이런저런 말들이 많긴 했다. 포인트가드의 정석적인 플레이가 있는데 양동근은 포인트가드가 아니라는 평가, 키가 작은 슈팅가드라면 조성원 선배처럼 슛을 잘 쏴야 하는데 양동근은 슛도 그 정도로 뛰어나지 않다는 평가들이 있었다.

무엇보다 당시만 해도 KBL은 물론이고 NBA에서도 공격적인 성향의 가드들은 좋은 이야기를 듣지 못했다. 지금은 어느 리그든 공격적인 가드가 정말 많아졌다. 하지만 당시엔 숫자가 그렇게 많지 않았다. 단점을 계속 지적받을 수밖에 없는 시절이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유재학 감독님이 제가 신인일 때부터 말씀해주신 게 있었다. 가드는 슈팅력과 공격력이 없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는 얘기였다. 무조건 슈팅력과 공격력을 갖춰야 한다고 제게 끊임없이 강조하셨고 저의 강점을 살려주려고 하셨다.

오히려 그래서 공격적인 부분에 더 집중했다고 봐야 할까?

맞다. 그쪽에 더 집중을 했다. 유재학 감독님은 도움을 주시면서도 제가 못하는 걸 억지로 잘하게 만들려고 하시지는 않았다. 잘하는 걸 더 잘할 수 있도록 환경을 만드시고 도움을 주셨다.

효과가 있었던 걸까? 데뷔 시즌에 신인왕이 됐고 이후 두 시즌은 바로 2년 연속 MVP를 수상했다.

(손사래를 치며) 어휴. 그건 제가 잘했다기보다도 좋은 선수들을 좋은 때에 잘 만난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유재학 감독님이 저를 잘 키워주시고 모비스라는 팀도 잘 만들어주셨다. 특히 선수단의 조합은 감독님이 다 만드신 것이었다. 크리스 윌리엄스라는 훌륭한 선수도 만났다. 궂은일을 나서서 해주는 형들도 있었다. 그로 인해 제게 좋은 일이 생겼다고 봐야 한다. 상을 받긴 했지만 저 혼자만의 힘으로 받은 것은 아니었다.

그리고 결국 2007년에 통합 우승을 달성했다.

2006년 챔피언결정전에서 삼성에 4전 전패로 졌었다. 사실 그때는 우리 팀이 못했다기보다는 삼성이 너무 강했다. (서)장훈이 형, (이)규섭이 형, (강)혁이 형, (이)정석이, 오예데지, 네이트 존슨 모두 대단한 선수들이었다. 사실 우리 팀은 그들과 비견할 만한 멤버를 갖추지는 못했었다. 하지만 2006년의 뼈아픈 경험 덕분에 2007년에 통합 우승을 할 수 있었다.

2007년 챔피언결정전은 7차전까지 갔었다. 그런데 정말… 그때의 피가 말리는 기분은 직접 겪어보지 않으면 잘 모를 것이다.

기억난다. 그때 3승 1패로 앞서고 있다가 2연패를 당하면서 시리즈가 7차전까지 가지 않았었나.

그러니까 말이다. 아찔했다. 그때 만약 우승을 못했다면 그 이후로도 당분간은 우승을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는 생각도 든다.

2007년 챔피언결정전 이후에 상무에 바로 가기도 했으니 그때 우승을 못했으면 우승 공백이 분명 길어졌을 것 같긴 하다.

맞다. 2007년에 우승을 못했다면 상무 제대 후에도 저 스스로에 대한 고민과 생각이 많아져서 우승에 시간이 더 걸렸을 것이다. 우승 문턱까지 가서 좌절하는 팀과 선수들이 얼마나 많은가. 저 역시 그런 일을 많이 겪는 선수가 됐을 수도 있다. 그래서 2007년 우승이 제겐 정말 의미가 큰 우승이다.

통합 우승을 한 2006-2007시즌을 앞두고는 도하 아시안게임에도 출전했었다. 2006년 챔피언결정전에서 삼성에 완패를 한 후에 출전한 대회였는데, 아시안게임도 5위로 결과가 좋지 못했다. 농구만이 이유는 아니었지만 ‘도하 참사’라는 표현까지 나왔을 정도였다. 준우승에 아시안게임 부진까지 겹치지 않았나. 속이 많이 탔을 것 같다.

그때만 해도 중동 국가들이 농구에 대한 관심이 많지 않았다. 아시안게임을 개최한 카타르 같은 경우는 외국선수를 돈으로 사서 대회에 참가했었다. 하지만 워낙 피지컬이 좋아서 상대하기가 정말 힘들었던 기억이 난다. 심지어 그때는 중국은 더더욱 이기기 힘든 상대였다. 그런 상황이다 보니 제가 국가대표로 계속 뛰는 동안에는 대표팀 성적도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괜히 제 책임인 것 같아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하지만 대표팀에서 그렇게 패배를 겪으면서 많은 경험을 했고 결과적으로 그렇게 쌓인 경험이 제 선수생활의 가장 소중하고 큰 자산으로 남은 것 같다.

국가대표 경험을 얘기하니 갑자기 올 시즌 중에 본인이 직접 했던 코멘트가 하나 떠오른다. 당시 KT 허훈이 정말 잘하고 있었다. 허훈의 성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는데 월드컵 출전을 거론하며 “국가대표를 한 번이라도 경험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은 천지차이”라고 답했었다.

인터뷰를 준비하며 찾아보니 2006년 도하 아시안게임 직후에도 비슷한 이야기를 했었더라. 국가대표로 아시안게임에 다녀온 뒤로 자신이 정말 많이 성장했다고 했었다. 그때나 지금이나 국제대회 경험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기는 듯 하다. 이유가 있을까.

국제 대회에 가면 다른 스타일의 가드들을 많이 만날 수 있다. 특히 키가 큰 가드들이 국제무대에 많다. 힘과 신장이 국내선수들과는 확실히 다르다. 국제무대에서 피지컬 좋은 선수들을 상대하다가 KBL로 돌아와서 상대적으로 키가 작은 선수들을 상대하면 심적으로 편안한 부분이 생길 수밖에 없다.

국제무대 경험이 많이 없었다면 저 역시 많이 성장하기 힘들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국가대표로 뛰면서 경험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사실 스포츠뿐만 아니라 사회생활이 다 그렇지 않은가. 해본 것과 해보지 않은 것의 차이가 분명히 있다. 국가대표를 경험한 뒤로는 어차피 후회할 것이라면 해보고 후회하는 게 좋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사람에겐 경험이 정말 중요한 것 같다. 저 같은 경우엔 국제무대의 경험이 엄청난 도움이 됐다.

그 경험 덕분일까? 2007년에 통합 우승도 달성하고 챔피언결정전에서는 최초로 만장일치 MVP도 선정됐다.

어쩌다보니 그렇게 됐다.(웃음)

이후에 바로 상무에 갔고 발목 수술을 받았다.

발목 수술은 사실 그 전에 했었어야 했다. 그래서 고민이 정말 많았다. 수술과 플레이오프 출전 사이에서 고민하다가 수술을 일단 미루고 아픈 걸 참으며 플레이오프와 챔피언결정전에 뛰었다. 상무에 가니 전국체전과 농구대잔치밖에 없다 보니 그 사이에 시간이 많이 비더라. 그래서 곧바로 수술을 받았다. 상무에서 많이 배려해주셨다. 수술을 받고 재활에 집중할 수 있도록 시간을 주셨다. 상무 시절은 제 인생의 전환점이 된 시기이기도 하다. 좋은 인연도 많이 만났다.

은퇴 기자회견에서도 상무 시절을 언급했었다. 그때 수술을 받고 은퇴에 대한 생각을 처음 해봤다고 하지 않았나.

맞다. 그때 은퇴에 대한 생각을 처음으로 많이 해보게 됐다. 수술이 잘 됐다고 해도 부상을 언제 또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감이 있었다. 선수의 몸이란 게 그렇지 않은가. 언제 아플지 알 수 없다. 조심한다고 해서 부상을 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부대에서 그 부분에 대해 혼자 생각을 정말 많이 했다. 그러면서 은퇴라는 게 내가 원하는 시기에 할 수 있는 게 아닐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갑자기 다가올지도 모르는 은퇴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그 준비는 어떤 것이었나.

훈련하는 마음가짐에 대해 생각을 많이 했다. ‘지금 내가 내일 은퇴를 한다면? 프로에서 3년을 뛰었는데 갑자기 은퇴를 하는 상황이 오면 후회하지 않을 수 있을까?’ 고민 끝에 은퇴할 때 적어도 후회는 없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더라. 내일 다쳐서 갑자기 은퇴를 하게 되더라도 ‘어제 훈련을 더 열심히 할 걸’이라며 후회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이후의 13년은 그 다짐이 계속 이어져온 결과라고 봐도 될까.

13년 동안 어떻게 마음이 한결 같을 수 있었겠나.(웃음) 사람의 마음은 언제든 변하는 게 아니겠나.

다만 스스로 다짐한 건 어떻게든 지키려고 했다. 사실 몸이 피곤하고 힘든 날은 저도 운동을 하기 싫을 때가 많았다. 그럴 땐 차라리 쉬는 게 낫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훈련을 해야 할 때는 대충하지 않고 제대로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지금 돌이켜봐도 후회가 남을 정도로 훈련을 적당히 한 날은 없었다고 자부한다.

 

상무에서 전역하고 모비스에 돌아왔을 땐 함지훈이라는 선수가 입단해 있었다. 함지훈과 처음 같이 훈련을 하고 경기를 뛰었을 땐 느낌이 어땠나.

정말 편했다. 지훈이를 막을 사람이 없었다. 무엇보다 수비자 3초 룰이 있을 때가 아니었나. 그때 지훈이는 정말 무적이었다.

서장훈, 김주성이라는 대단한 빅맨 선배들과 코트에서 경쟁도 해보고 직접 호흡도 맞춰보지 않았나. 그들과 비교했을 때 함지훈은 어떤 선수일까?

지훈이는 두 형님과 스타일이 완전히 다르다. 장훈이 형은 슛이 정말 좋은 선수다. 공격은 외국선수들보다도 뛰어난 1옵션이었다. 주성이 형은 공격보다는 수비에서 존재감이 더 대단하고 속공 참여도 훌륭한 빅맨이었다. 사실 지훈이는 그런 부분들은 두 형님에 비해 부족했다. 하지만 어떻게든 본인이 잘할 수 있는 걸 찾아내서 최선을 다했다. 그 과정에서 고생도 많이 했다. 지훈이는 본인이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최선을 다하는 선수였고 사실 지금도 그렇다. 세 사람은 확실히 플레이스타일이 다른 것 같다.

양동근의 커리어를 이야기할 때 짝이라고 할 만한 선수는 함지훈인 것 같다. 양동근에게 함지훈은 어떤 존재일까.

우리는 누구보다 서로를 잘 아는 파트너다. 오랜 시간 동안 서로의 장단점을 잘 파악하면서 호흡을 계속 다듬어갔다. 지훈이와 함께 하면서 코트에서 서로의 약점을 보완할 수 있었다. 정말 고마운 존재다.

결국 함지훈과 함께 5번의 우승을 더 차지했다. 특히 2013년부터 2015년까지는 쉬지 않고 우승을 했다. KBL 역사상 최초의 챔피언결정전 3연패였다. 모비스는 그때 비로소 왕조로 불릴 수 있는 팀이 된 것 같다. 첫 통합우승을 했던 2007년과는 결이 또 다른 느낌이었다.

솔직히 선수단 조합이 너무 좋았다. 지훈이에 (김)효범이도 있었고 슈터 중에는 (박)종천이나 (김)동우 형도 있었다. 외국선수는 브라이언 던스톤이나 애런 헤인즈도 있었다.

와, 이렇게 들으니까 새삼 대단하게 느껴진다.

이름만 들어도 그렇지 않나.(웃음) 우승을 못하면 이상할 정도로 짜임새가 좋았다. 챔피언결정전 3연패를 할 때도 포지션별로 상대를 압도할 수 있는 힘이 있었다. 지훈이는 물론이고 (문)태영이도 있었고 1순위로 입단한 (김)시래도 있었다. (라)건아에 로드 벤슨, 아이라 클라크까지 함께 했다. 대단했다.

좋은 선수들이 진짜 많았던 것 같다.

그러니까 말이다. 심지어 감독님은 유재학 감독님이었다.(웃음) 뛰어난 선수들과 뛸 수 있었던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선수였다. 제가 이런 얘기를 괜히 반복하는 게 아니다. 저는 정말 운이 좋은 선수다.

3연패 기간 중 개인적으로 가장 기억에 남는 때가 2013년 챔피언결정전이다. SK와 붙었던. 사실 그때 SK가 정말 강하지 않았나. 정규리그 때는 모비스도 SK에 힘을 못 썼던 기억이 난다.

맞다. 우리가 정규리그에서는 SK에 되게 약했었다.

그래서 챔피언결정전에서도 경험 차이에도 불구하고 SK가 충분히 모비스를 잡을 수 있다는 전망이 있었다. 그런데 결과는 정반대였다. 모비스의 시리즈 스윕이었다. 4전 전승.

경험의 차이가 만들어낸 결과였다. 우리에겐 2006년에 삼성에 4전 전패를 당한 경험이 있지 않았나.

그걸 그대로 돌려준 건가.(웃음)

그건 아니다.(웃음) 당시에 SK가 정규리그에서 강한 모습을 보여준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 하지만 저희는 그런 SK를 이길 자신이 있었다. 감독님도 그런 얘기를 했었다. SK의 드롭존 수비는 5초나 10초 안에 깰 수 있다고. 그런 상황에서 저와 (김)시래가 드롭존 수비를 깨기 위해 얼마나 연습을 많이 했겠나. 어디에서 기회가 날 수 있게 어떻게 슛을 쏘면 되는지 감독님이 디테일한 움직임과 동선을 다 잡아주셨다. 준비 과정 자체가 차원이 달랐다. 아니나 다를까 1차전에서 우리가 역전승을 거뒀다. 그때 시리즈는 이미 끝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1차전이 끝나고 이미 우승한다는 확신이 생겼었나?

물론이다. 무조건 우승한다고 자신하며 시작한 시리즈였다. 1차전에서 역전승을 하다 보니 기선제압을 더 확실히 할 수 있었다.

2014년 챔피언결정전에서 만난 LG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다.

그때 LG는 정말 좋은 팀이었다. (문)태종이 형도 있고 (데이본) 제퍼슨도 있었다. 심지어 시래도 그땐 LG로 넘어가 있었다.

당시 모비스가 단단한 팀이라면 LG는 개개인의 역량이 무척 뛰어난 느낌이었다. 꽤 버거운 상대였을 것 같다.

맞다. 버거웠다. 정규리그에서 제퍼슨과 태종이 형을 제대로 못 막아서 지곤 했었으니까. 하지만 챔피언결정전에서는 결국 경험의 차이가 작용했다. SK를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였다. (김)종규는 그때 챔피언결정전이 처음이었다. 종규를 비롯한 LG 선수들이 챔피언결정전 경험이 좀 있었다면 상황이 달랐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경험의 차이 때문에 시리즈의 주도권이 우리에게 넘어온 부분이 분명 있었다.

그리고 작년엔 또 다시 통합우승을 일궈냈다. 커리어 6번째 우승이었다.

작년에 우리는 팀을 2개로 운영해도 둘 다 4강에 갈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있었다. 그런 마음을 가지고 시즌을 치렀었다. 솔직히 내심 ‘무조건 우승이지’라는 생각이 강했던 것 같다. ‘우승을 못하면 안 된다’, ‘우승을 못할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다.

 

 

다른 종목에서 우승을 많이 선수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승은 해도 해도 좋은 것”이라고 하더라. KBL에서 이걸 물어볼 만한 선수는 양동근인 것 같다. 본인은 우승을 거듭할 때마다 기분이 어땠나. 모든 우승이 같은 짜릿함으로 다가왔나. 아니면 각자 다르게 느껴졌나.

우승을 할 때는 항상 좋았다. 사실 우승을 한 번도 못하고 은퇴하는 선수들이 있지 않은가. 나는 2007년에 이미 우승을 경험했고 사실 그때는 더 이상 우승을 못하고 은퇴해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정말 기뻤다.

그래서 그 후에는 우승을 할 때 행복을 느끼는 포인트가 좀 달라졌다. 물론 저 스스로의 우승도 기뻤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던 부분은 저와 같이 뛰는 동료, 후배 선수들이 양동근라는 선수와 함께 우승을 꿈꾸고 경험한 것이었다. 어느 순간부터는 저와 뛰었던 선수들이 적어도 한 번씩은 우승에 대한 기억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 생겼다. 그런 바람을 가지고 계속 우승에 도전했다.

6번의 챔피언결정전 우승에 4번의 정규리그 MVP와 3번의 챔피언결정전 MVP까지. 경력이 압도적이다. 그래서인지 양동근이 KBL 역대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가 나오고 있다. 알고 있는가.

아니다. 제발 그런 말씀하지 말아 달라. 욕을 너무 많이 먹고 있다.

다 동의하는 분위기로 알고 있다.(웃음)

아니다. 정말 아니다.(웃음) 저 스스로를 최고라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보다는 오랜 시간동안 열심히 농구를 하며 인내심 있게 잘 버텨온 선수라는 평가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한다. 최고라는 평가는 저한테 과분하다.

정말 그런가? 개인적으로는 최고가 되고 싶다는 욕심을 전혀 가지지 않고 이렇게 오랫동안 좋은 실력을 유지하면서 뛰는 게 가능했을까하는 의문도 든다.

나 혼자 최고가 되려는 욕심이 있었다면 기록을 쌓기 위해서 득점을 더 적극적으로 올리지 않았을까.(웃음) 정말 그랬다면 매 경기 40점씩 넣으려고 애썼을 것이다. 하지만 제 개인의 수상 실적이나 영광보다 팀이 이기는 게 먼저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그러지 않았다. 특히 MVP는 억지로 하고 싶다고 할 수 있는 게 아니지 않은가. 코트에서 제가 돋보이려는 마음을 가진 적은 없었다.

팀을 위해 플레이하다 보니 수상 경력도 자연스럽게 따라온 것이라고 보면 될까.

맞다. MVP 같은 상은 제가 받고 싶다고 받을 수 있는 게 아니다. 팀의 승리를 위해서 좋은 플레이를 하다 보면 따라오는 것이다. 그런 과정에서 좋은 평가를 받고 상을 많이 받은 것은 그저 감사한 일이다.

집요하게 느껴질 수 있겠지만 한 번만 더 물어보겠다. 양동근이라는 선수에게 ‘역대 최고’라는 평은 정말 과한 걸까.

많이 과하다. 제가 어떻게 역대 최고일까. 좀 전에 말씀드렸다시피 우승을 많이 한 것도 역대 최고로 운이 좋았던 선수였던 덕분이다. 좋은 선수들과 함께 뛰었던 운이 좋은 선수. 그게 나였던 것 같다.

본인이 아니라면 누가 역대 최고에 해당된다고 보나.

KBL에서는 사실 잘 모르겠다. 하지만 모비스에서는 지훈이다. 함지훈.

제가 볼 때 지훈이는 농구를 정말 잘하는 선수다. 그래서 제가 가장 많이 믿는 선수이기도 하다. 모비스에서 지훈이의 비중은 절대적이다. 컨트롤 타워 역할을 하는 지훈이 덕분에 많은 공격 찬스가 파생된다. 그런 부분은 절대 무시할 수 없다. 제 개인 SNS를 보셨는지 모르겠지만 지훈이는 내 마음 속의 1.5등이다. 다른 사람들은 인정하지 않더라도 제겐 그렇다.

함지훈은 10년이라는 긴 시간을 함께 해온 파트너였다. 이제 양동근 없이 베테랑으로서 모비스를 이끌어야 하는 입장이다. 어떤 조언을 해주고 싶나.

자기가 알아서 잘 하지 않겠나.(웃음) 지훈이는 이젠 정말 자기가 좀 알아서 할 때가 됐다. 얼마 전에 앞으로 잘 해보라고 조언해줬다. 여태까지 지훈이가 농구할 때 커뮤니케이션도 열심히 안 하고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게 제가 곁에 있었기 때문인 것 같다. 이야기할 게 있으면 제가 다 해주고 그랬으니까. ‘동근이 형이 알아서 동생들을 리드해주니까’라고 생각하면서 저를 배려해서 오히려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던 것 같다. 이제는 본인이 나서서 리더 역할을 해야 한다. 잘할 거라고 생각한다.

 

▲ 양동근이 인터뷰 현장에 직접 챙겨온 2007년 챔피언결정전 우승 기념 모자. 자신은 물론 크리스 윌리엄스의 사인도 함께 적혀 있었다. 사진엔 보이지 않지만 모자 뒤쪽에는 7차전이 끝나고 직접 잘랐던 동천체육관 림의 그물도 달려 있었다.

 

은퇴 기자회견 때 크리스 윌리엄스에 대해 언급했었다. 올 시즌 마지막 라운드는 원래 윌리엄스의 등번호를 달고 뛰려고도 했었다. 양동근에게 크리스 윌리엄스는 어떤 존재인가.

지훈이가 내 마음 속의 1.5등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게 크리스 윌리엄스 때문이다. 1등은 윌리엄스니까. 그래서 지훈이는 앞으로도 영원히 1.5등이다.(웃음)

크리스 윌리엄스는 어떤 부분 때문에 양동근 마음 속의 1등이 될 수 있었을까.

윌리엄스는 정말 제 농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존재다. 농구뿐만 아니라 코트 밖의 생활적인 부분에서도 배울 게 정말 많았다. 저보다 1살 형이었지만 친구처럼 편한 동료였다. 그러면서도 때로는 형처럼 저를 다잡아줬다. 외국 생활에서 얻은 경험도 많이 얘기해줬다. 저뿐만 아니라 제 가족도 정말 많이 챙겨줬다.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었을 때는 많이 힘들었을 것 같다.

정말 많이 울었다. 아직도 그날이 기억난다. 고양 오리온 원정 경기 전날에 소식을 접했다. 진짜 많이 울었다. 다른 선수들은 제게 윌리엄스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니까 이해하고 배려해줬다. 2-3일 동안은 말도 거의 안 했던 것 같다. 선수들이 많이 위로해준 덕분에 마음을 추스를 수 있었다.

선수 중에 크리스 윌리엄스, 함지훈이 빼놓을 수 없는 존재라면 지도자 중에서는 유재학 감독이 거기에 해당될 것 같다.

물론이다. 유재학 감독님은 지금의 저를 만들어주신 분이다. 17년이나 프로에서 뛸 수 있었던 원동력도 감독님이었다. 코트에서 저의 장점을 빠짐없이 다 끌어내주셨다. 제가 미처 표현을 다 못했을 뿐이지 감독님께도 감사한 마음이 너무 크다.

이제 지도자 준비를 시작하지 않는가. 지도자로서 유재학 감독이 가진 것들을 배우거나 가져가고 싶은 마음이 있을 듯하다.

디테일에 집중하시는 부분, 경기를 꼼꼼히 준비시하고 선수들에게 전술을 이해시키시는 부분들을 배우고 싶다. 감독님의 장점을 제 스타일에 맞게 잘 녹여내서 가져가고 싶다. 

이제 당분간 팬들은 양동근이라는 사람의 모습을 볼 기회가 없다.

SNS로 많이 보여주고 있다. 자전거 타는 모습을.(웃음) 자전거가 정말 매력 있더라. 이제 은퇴했으니 현역선수 때 가지지 못했던 취미를 하나씩 다 경험해볼 계획이다.

자전거 외엔 어떤 게 있을까.

일단 자전거 좀 타보고 생각할 계획이다.(웃음)

가족들이 같이 해보자고 하는 건 없나.

사실 요즘은 코로나 바이러스 때문에 아이들이 학교에 가질 못하고 있어서 집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는 것에 일단 신경쓰고 있다. 많이 챙겨주고 싶은 마음인데 최근에 인터뷰가 너무 많이 잡혀서 뜻대로는 안 되는 중이다.(웃음)

일단 자전거 같은 경우에도 와이프, 아이들과 함께 타면서 즐기고 싶다. 가족들과 같이 타다가 앉아서 쉬면서 음료수도 마시고 그러고 싶다. 사실 그러려고 최근에 자전거를 샀다. 우리 아이들의 친구 아버지 중에 자전거에 취미가 있는 분들도 계신다. 그분들과 같이 자전거를 타기도 하고 그런다. 최근에 SNS에 올린 사진은 그때 찍은 사진이다.

2007년 첫 우승 당시 기사들을 다시 보면 아내 분에 대한 이야기가 많다. 대학 때 처음 만나서 인연이 된 이야기, 첫 우승 반지가 결혼 반지가 됐다는 이야기 등이 기사에 실려 있더라. 양동근에게 아내 분은 어떤 존재일까.

정말 철없을 때 만나서 많이 의지했고 결혼도 했다. 그 후에는 아내가 아빠 역할까지 도맡아 하면서 아이들을 키워줬다. 너무나 미안하고 고마운 사람이다. 제가 안정적으로 선수 생활을 할 수 있게 가정을 꾸리고 이끌어줬다. 그 고마움을 말로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이제 선수 양동근의 모습을 팬들은 더 이상 볼 수 없게 됐다. 그동안 양동근을 응원하고 지켜봐온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한 마디만 남겨 달라.

갑작스럽게 은퇴 발표를 하게 됐다. 저 개인적으로는 올시즌 마지막 라운드를 33번을 달고 뛰지 못했던 것이 아쉽다. 팬 분들도 이 소식을 알고 함께 아쉬워해주셔서 너무 감사했다.

팬 분들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드리고 은퇴 소식을 전하지 못해서 죄송하게 생각한다. 혹시나 앞으로 그럴 수 있는 기회가 생긴다면 꼭 인사드리겠다. 제가 코트에서 농구를 하는 모습을 앞으로는 보기 힘드실 것이다. 하지만 동아리 농구 같은 무대에서는 한 번씩 뛸 수 있으니까 너무 슬퍼하지는 않으셔도 될 것 같다.(웃음) 농구 쪽에서 저의 힘이 필요하신 분들이 계시면 제가 할 수 있는 범위 안에서 농구로 또 보답하겠다. 다들 건강히 지내시고 더 좋은 모습으로 팬 분들 앞에 돌아올 수 있도록 할 테니 많이 응원해주셨으면 좋겠다. 정말 고맙고 감사하다.

 

사진 =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