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환의 NBA노트] 블레이크 그리핀의 변신, 진화일까 퇴화일까?
[루키=이동환 기자] LA 클리퍼스는 지난여름 가장 많은 변화를 겪은 팀이다. 6월부터 9월까지 3개월 동안 클리퍼스에 새로 둥지를 트거나 클리퍼스를 떠난 선수만 20명에 육박한다.
올스타 9회, 올-NBA 팀 선정 8회에 빛나는 ‘천재 포인트가드’ 크리스 폴 역시 그 명단에 있다. 6년 만에 크리스 폴을 휴스턴으로 떠나보낸 클리퍼스는 J.J. 레딕, 자말 크로포드, 루크 음바무테, 모리스 스페이츠 등 기존의 핵심 선수들과도 이별했다. 사실상 판을 뒤엎은 것이다.
*LA 클리퍼스의 2017 오프시즌 주요 로스터 변화*
IN: 다닐로 갈리나리, 밀로스 테오도시치, 루 윌리엄스, 패트릭 베벌리, 샘 데커, 윌리 리드, 몬트레즐 하렐, 마샬 플럼리
OUT: 크리스 폴, J.J. 레딕, 자말 크로포드, 루크 음바무테, 레이먼드 펠튼, 모리스 스페이츠, 폴 피어스
하지만 클리퍼스가 로스터를 완전히 뒤바꾼 것은 아니다. ‘크리스 폴 시대’의 또 다른 주춧돌이었던 블레이크 그리핀, 디안드레 조던은 여전히 팀에 남아 있다. 특히 폴이 떠난 후 비로소 에이스의 지위를 차지한 블레이크 그리핀은 2017-18 시즌 클리퍼스에서 가장 주목할 선수임이 분명하다.
2009년 드래프트 전체 1순위로 클리퍼스에 입단한 블레이크 그리핀은 대부분의 커리어를 크리스 폴과 함께했다.
무릎 수술로 데뷔를 1년이나 미룬 그리핀은 루키 시즌이었던 2010-11시즌부터 최고의 활약을 펼치며 스타덤에 올랐다. 코비 브라이언트를 이어 도시 LA와 리그 전체를 대표하는 새로운 스타로 순식간에 올라섰다.
루키 시즌의 그리핀은 스탯라인만 살펴봐도 훌륭한 선수라는 것이 드러난다. 평균 22.5점 12.1리바운드 3.8어시스트 야투율 50.6%. 여기에 기회만 생기면 엄청난 점프로 꽂아버리는 엄청난 덩크슛까지 있었다. 내실과 스타성을 겸비한 라이징 스타라는 평가가 괜히 나왔던 게 아니다.
실제로 그리핀은 데뷔 시즌에 곧바로 올스타에 선정되며 2003년 야오밍 이후 8년 만에 신인으로 올스타전 무대를 밟기도 했다. 이 올스타전에서 그리핀은 슬램덩크 콘테스트 우승까지 차지했다. 누구도 그리핀의 밝은 미래를 의심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후 그리핀의 커리어는 다소 뜻밖의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리핀의 경기력이 떨어졌다는 얘기는 아니다. 그리핀은 아주 조금씩, 서서히 플레이스타일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크리스 폴이 합류한 2011-12 시즌부터 곧바로 변화의 조짐이 감지됐다.
루키 시즌의 블레이크 그리핀은 높은 수직 점프와 터프한 몸싸움을 앞세워 페인트존을 적극적으로 공략하는 빅맨이었다. 전체 야투 시도의 40.8%가 3피트(약 1미터) 이내 구역에서, 31.8%가 3피트에서 10피트(약 3미터) 이내 구역에서 나왔다. 전체 슈팅의 72.6%를 10피트 이내 구역에서 시도하며 많은 득점을 생산하는, 굉장히 위력적인 페인트존 득점원이었다.
*루키 시즌 블레이크 그리핀의 거리별 슈팅 빈도*
3피트 이내: 40.8%
3-10피트 이내: 31.8%
10-16피트 이내: 10.2%
16피트-3점슛 라인 이내: 15.4%
3점슛 라인 바깥: 1.7%
하지만 폴과 함께 뛰기 시작한 뒤 그리핀이 슈팅을 시도하는 구역은 점점 림으로부터 멀어졌다.
특히 미드레인지 구역이라고 불리는 16피트(4.8미터)에서 3점슛 라인 사이 구역이 그리핀의 주요 슈팅 지점으로 자리잡기 시작했다. 루키 시즌 15.4% 정도였던 그리핀의 미드레인지 구역 슈팅 빈도는 폴의 합류 이후 곧바로 20%를 넘어섰고, 2015-16 시즌에는 무려 45.8%까지 치솟았다. 페인트존 득점원에서 미드레인지 득점원으로 변신한 것이다.
NBA.com에 따르면 2015-16 시즌에 미드레인지 구역에서 가장 많은 슈팅을 시도한 선수가 바로 블레이크 그리핀(평균 9.0개)이었다. 미드레인지 구역의 왕자로 불리는 카멜로 앤써니(8.4개)와 덕 노비츠키(7.7개), 니콜라 부셰비치(7.6개), 앤써니 데이비스(7.4개), 라마커스 알드리지(7.1개)보다도 그리핀이 더 많은 슛을 던졌다.
문제는 정작 미드레인지 구역에서 기록한 슈팅 효율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는 점이다. 2015-16 시즌 그리핀의 미드레인지 구역 야투 성공률은 38.1%에 불과했다. 미드레인지 슈팅 시도 상위 6명의 선수 중 이 구역의 야투 성공률이 40%가 안 되는 선수는 그리핀이 유일했다. 그리핀 다음으로 수치가 나빴던 앤써니 데이비스조차 성공률이 40%를 상회했다.
그리고 2016-17 시즌 들어 그리핀의 변화는 더 극단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일단 비효율적이었던 미드레인지 구역의 슈팅을 줄였다. 시도 빈도가 28.3%까지 내려갔다. 그런데 미드레인지 구역의 대안으로 그리핀이 선택한 곳은 페인트존이 아닌 3점슛 라인 바깥이었다. 데뷔 이래 꾸준히 3% 안팎에 머물렀던 그리핀의 3점슛 시도 빈도가 갑자기 11.6%까지 치솟았다. 경기당 2개 안팎으로 꾸준히 3점슛을 던졌다. 이전까지는 2경기에 1번 정도 던지는 것이 보통이었다. 불가피한 상황이 아니면 던지지 않던 3점슛이 주무기 중 하나로 자리잡은 것이다.
그리핀은 슈팅 시도 구역뿐만 아니라 다른 부분에서도 변화를 시도했다. 바로 패싱 게임이다.
그리핀은 데뷔 첫 4년 동안 어시스트 점유율(팀 전체 어시스트 중 해당 선수가 기록한 어시스트가 차지하는 비율)이 18.7% 정도인 선수였다. 경기당 어시스트가 3개에서 4개 사이였으니, 괜찮은 패스 능력을 보유한 빅맨으로 평가할 수 있었다.
그런데 최근 세 시즌 동안 그리핀의 어시스트 점유율은 25.8%까지 치솟았다. 이 기간 동안 평균 어시스트는 5.1개로 늘었으며, 9점 안팎을 오가던 어시스트를 통한 득점 생산(Assist Points Created) 기록도 12점대까지 증가했다. 패스를 주무기로 삼는 빅맨이 된 것이다.
실제로 지난 시즌 빅맨으로 분류된 선수 중 어시스트를 통한 득점 생산이 그리핀보다 많았던 선수는 보스턴의 알 호포드가 유일했다. 리그 최고의 패싱 빅맨으로 분류되는 니콜라 요키치(11.4점), 마크 가솔(11.2점)도 그리핀보다 수치가 낮았다. 그리핀의 패싱 게임이 클리퍼스 공격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핀은 2000년대 중반 피닉스의 아마레 스타더마이어처럼 포인트가드의 2대2 파트너에 머물지 않았다. 미드레인지 구역에서 볼을 가지는 시간을 늘리며 림으로 컷인하는 동료들의 득점 기회를 봐주거나, 더블 팀을 유도해 외곽의 슈터들에게 킥아웃 패스를 해주는 등 게임 조립에 적지 않은 힘을 쏟았다. 그리고 좋은 기회가 생기면 여지없이 중, 장거리슛을 던지거나 돌파로 득점을 만들어내기도 했다.
그리핀이 이처럼 능동적인 플레이를 즐기는 빅맨이 되면서 크리스 폴과 그의 역할 분담은 더욱 애매해졌다. 최근 3년 동안의 그리핀은 크리스 폴의 게임 조립에 굳이 의존할 필요가 없는 선수였다. 어느새 폴과 그리핀은 공격에서 시너지 효과를 기대하기 힘든, 두 개의 태양 같은 콤비가 되어 있었다.
결국 그리핀과 폴은 결별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팀 전체가 계속된 우승 도전 실패로 매너리즘에 빠져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리핀과 폴이 함께 뛴다고 해서 더 이상의 성과를 내길 기대하기도 힘들었다.
폴은 트레이드를 통해 휴스턴 유니폼을 입었고, 얼마 되지 않아 그리핀은 클리퍼스와 재계약에 합의했다. 그리고 2017-18 시즌이 어느덧 코앞으로 다가왔다. 1인자로서 처음 맞이하는 오는 시즌의 결과물은, 그리핀이 그동안 시도해온 변화가 진화(進化)였는지 혹은 잘못된 방향으로의 퇴화(堆花)였는지 알려줄 것이다.
일단 최근 시작된 프리시즌부터 그리핀의 달라진 플레이가 확인되고 있다. 프리시즌의 그리핀은 파워포워드보다는 스몰포워드에 가깝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였다. 크리스 폴을 대신해 디안드레 조던과 2대2 게임을 펼치는가 하면, 45도 혹은 정면에서도 3점슛을 거리낌 없이 시도하는 모습이 포착됐다. 사실 이전 시즌에도 종종 보여줬던 플레이이긴 했다. 중요한 것은 그리핀이 보다 적극적으로, 더 자주 이런 플레이를 하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리핀이 빅맨으로서의 모습을 완전히 잃은 것은 아니다. 패트릭 베벌리, 밀로스 테오디시치와 2대2 게임을 시도하거나, 핸드오프 패스(가까운 거리에서 건네주는 패스)를 통해 가드와 호흡을 맞추는 플레이도 자주 실험했다. 좋은 지점에서 볼을 받았을 때에는 적극적으로 골밑을 공략하고 파울을 얻어내기도 했다.
2017년의 그리핀은 분명 루키 시즌만큼 저돌적인 선수는 아니다. 하지만 데뷔 초부터 주목받았던 안정적인 드리블 능력과 페이스업 공격(얼굴을 마주보고 펼치는 1대1 공격)을 통해 자신보다 느린 수비수를 공략하는 기술이 갈수록 노련해지고 있다. 공을 잡았을 때 무작정 림만 바라보는 것도 아니기에, 수비 입장에서는 막기가 더욱 까다롭다. 빅맨에서 윙맨으로 변하고 있는 그리핀의 플레이를 마냥 비판적으로 볼 수 없는 이유다.
한편 지난여름 그리핀은 더 건강한 선수가 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으로 알려졌다. 그리핀은 지난 세 시즌 동안 평균 54.3경기 출전에 그쳤다. 지난 봄 플레이오프에서도 부상으로 전력에서 조기 이탈했고, 결국 클리퍼스는 유타에 밀려 1라운드에서 탈락했다.
오프시즌이 시작된 직후 그리핀은 발가락 부상의 여파로 당장 달리기조차 할 수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그 기간 동안 수중 훈련을 통해 신체 밸런스를 조절하고 상체 근육 운동에 많은 시간을 투자했다고 한다. 최근 그리핀은 “지금은 어떤 부상도 없다. 컨디션이 매우 좋다”라며 몸 상태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했다.
마침내 에이스로 홀로서기에 나서는 블레이크 그리핀. 루키 시즌과 완전히 다른 선수가 된 그리핀의 도전은 과연 성공할 수 있을까. 이제 막 시작된 그리핀의 커리어 두 번째 챕터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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