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석연의 더 멘트] 황금의 세대

2025-07-22     원석연 기자

대한민국과 카타르의 두 번째 평가전이 열리던 안양 체육관. 카타르의 빅맨 세이두가 발목 통증으로 쓰러지며 경기가 잠시 중단된 틈이었다. 4쿼터 종료까지 남은 시간은 1분 34초, 포인트가드 양준석이 여준석에게 다가가 조용히 얘기했다.

“준석아, 지금 하나 될 것 같은데.”

이윽고 재개된 경기, 양준석이 드리블로 하프라인을 넘어가는 사이 여준석은 코트를 가로 질러 오른쪽 코너로 향했다. 여준석이 안전하게 코너에 안착한 모습을 확인한 양준석은 하윤기에게 스크린을 와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번 대표팀 선수들이 토킹을 정말 많이 하거든요” 양준석이 그 장면을 회상한다.

“훈련 때도 그렇고, 일본전 끝나고서도 그렇고 서로 얘기를 정말 많이 했어요. 그러다 보니까 각자 좋아하는 위치도 금방 알게 되고 약속도 많이 하게 되더라고요. (여)준석이가 오른쪽 코너를 좋아하는 걸 알고 있었는데 그쪽에 가는 걸 보고서 ‘아, 저쪽에서 점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려면 내 쪽에서 각을 벌려야겠구나’라고 생각했어요. 이미 그 전에 투맨 게임을 몇 번하면서 상대 수비가 어떻게 나오는지는 알고 있었거든요.”

양준석의 말은 허언이 아니었다. 양준석이 하윤기의 스크린을 타고 투맨 게임을 전개하자, 카타르의 수비는 모두 양준석에게 쏠렸다. 그 사이 하윤기가 골밑으로 진입했고, 여준석을 코너에서 막고 있던 211cm의 알렌 하즈비고비치는 하윤기를 견제하기 위해 한 발자국 정도 앞으로 나왔다.

그리고 그 한 발자국은, 양준석이 그토록 기다렸던 총성과도 같았다. 하즈비고비치의 발이 떨어진 순간 양준석은 망설이지 않고 허공에 공을 뿌렸다. ‘황금 세대’의 시작을 알린 이 앨리웁 덩크는, 그렇게 작은 소통 속에서 탄생했다.

이번 대표팀을 관통하는 키워드는 소통이고, 선수단 전체가 그 달라진 소통의 근원지로 지목하는 선수가 한 명 있다. 바로 24살의 이현중이다. 

“뭔가 다르구나 싶었어요.” 이정현은 이현중을 이렇게 표현한다. 

“외국에서 오랫동안 뛰다가 들어왔잖아요? 아무리 종종 알고 지낸 사이라 해도 그렇게 갑자기 들어와서 형들 앞에서 저렇게 적극적으로 이야기를 하는 게 쉽지 않거든요. 그런데 현중이는 훈련 시작할 때부터 토킹이 진짜 많았어요. 그렇다고 그냥 말만 많은 게 아니고 자기가 루즈볼에 몸 던지고, 누가 넘어지면 제일 먼저 가서 일으켜 세우고… 그렇게 행동하면서 목소리를 내는 모습을 보니까 저도 뭐랄까… 초심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어느 샌가부터는 저도 현중이처럼 말을 많이 하게 되고, 박수치고 있고, 그게 또 다 팀의 에너지 레벨로 바뀌고요.”

물론, 이현중의 이런 발언권은 처음부터 주어진 것은 아니었다. 아무리 해외파라고 한들 한국 사회에서 24살의 어린 선수가 선배들에게, 코치에게, 감독에게 자신의 의견을 꺼낸다는 건 결코 당연한 일이 아니다.

더군다나 그곳이 최고의 선수들이 모여 있는 국가대표 선수촌이라면 더욱더. 그렇게 목소리에 힘이 있기 위해서는 행동과 실력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현중은 수년간의 해외 생활을 통해 이 단순한 이치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선수다. 

가령 이런 것이다. 시차 따위의 핑계를 대기 싫어, 진천에 합류하자마자 바로 훈련을 시작하고 싶었고 이를 위해 미국에서 비행기를 타기 이틀 전부터 밤을 새워 바이오리듬을 미리 한국 시간에 맞춰오는 것.

덕분에 진천에 도착하자마자 훈련을 시작할 수 있었는데, 그 훈련 또한 기존 선수들이 처음 보는 방식이었다는 것. 양준석은 이현중의 훈련에 대해 이렇게 얘기한다.

“현중이 형이 연습하는 걸 보면 진짜 자극받아요. 혼자 슛 연습을 한다고 그냥 던지는 게 아니고, 항상 무조건 수비 한 명을 세워놓고 실전처럼 움직이면서 슛을 던지더라고요. 그냥 저희처럼 똑같은 스팟에서 몇 백 개 던지고 끝이 아니라, 상황을 설정해서 어떤 타이밍에 던질지, 어떻게 빠져나올지 같은 걸 다 생각하면서 던지고 극한으로 끌고 가더라고요.”

“한국에 있을 땐 저도 눈치를 많이 봤었죠.” 이현중이 자신의 소통 방식에 대해 털어놓는다. 

“그런데 해외에서 계속 도전하면서 성격이 바뀌었어요. 눈치만 보다가 결국 내 자리 뺏기고, 기회도 놓치고, 결국 그러면 남는 게 핑계뿐이더라고요. 그래서 그때부터 절대 눈치 보지 말자고 다짐했고, 하나 더 느낀 건 농구장에서 소통이 많아서 나쁠 건 절대 없다는 거였어요. 이번 대표팀에서는 이런 걸 꼭 한국 선수들과 나누고 싶었어요.”

지금으로부터 꼭 한 달 전, 이현중은 새크라멘토에 있었다. 2023년 필라델피아, 2024년 포틀랜드에서 NBA 서머리그에 참가한 그는 이번 여름에도 미국에서 훈련을 이어가며 새로운 기회를 기다리고 있었다. 

기약 없는 시간이었지만, 이현중에게 이런 고독은 익숙했다. 새벽 6시에 일어나 스스로 오전 훈련을 시작했고, 하루에 세 차례 훈련은 기본이었다. ‘사람이 이렇게 할 수도 있구나’라고 스스로 회상할 만큼 자신을 끊임없이 채찍질했다.

그 간절함이 닿았던 걸까. 에이전트를 통해 두 구단의 오퍼가 도착했다. 뉴욕 닉스 그리고 휴스턴 로케츠였다. 뉴욕은 이현중에게 Exhibit 10 계약(캠프 초청 후 G리그 전환이 가능한 단기 계약)을, 휴스턴은 서머리그 계약을 제시했다.

“진짜로 저를 원하는 곳이 어디일까 생각했어요.” 이현중이 그때를 떠올렸다. “벌써 세 번째 서머리그니까 진짜로 저를 원하고, 코트에 바로 세워줄 팀을 찾고 싶었어요. 두 팀 모두 좋은 구단들이지만, 그런 느낌은 안 들었던 거죠.”

진짜로 나를 원하는 곳. 이현중은 곧바로 한국행 비행기를 끊었다. 개인의 도전만을 쫓았다면 서머리그에 남았겠지만, 여러 생각이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한국에서 이례적으로 열리는 평가전 4연전, 지난 11월 아시아컵 예선 당시 고양에서 그를 반겨준 한국의 팬들, 그리고 해외파로서의 책임감. 이현중은 그렇게 서머리그를 포기하고 비행기에 올랐다. 농구선수로서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기회비용이었지만, 그만큼 이현중의 마인드셋은 더 단단해졌다.

“제가 미국에서 한국에 가는 비행기를 타는 건, 집에 돌아가는 길이라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항상 설레는 마음이 있었어요. 그런데 이번에 비행기를 타고 올 땐 처음으로 그런 설렘이 없었어요. 정말 나라를 위해, 한국농구를 위해 가는 것이라는 사명감을 갖고 들어왔거든요. 대표팀이 처음은 아니지만 그래서 이번에는 더 그렇게 하고 있어요. 토킹도 더 많이 하고, 제가 가진 노하우도 하나라도 더 전하고 오려 하고.”

열흘 간의 평가전 4연전을 마친 지금, 이현중의 선택은 결코 헛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경기 결과를 떠나, 이번 평가전이 한국 농구에 끼친 파급력은 실로 대단했다. 4경기 중 3경기가 매진이 됐고, 4경기 전체 총 좌석 점유율은 92%에 달했다. 대표팀 유니폼은 예상된 매출량을 하루 만에 초과하며, 그야말로 없어서 못 파는 품목이 됐다. 

무엇보다 경기 내용도 완전히 달라졌다. 귀화 선수의 포스트업 & K-지역방어로 대변되던 과거 한국농구의 문법은 이제 사라졌다. 이현중과 유기상은 커리처럼 퀵샷을 던진다. 느리고 답답한 지역방어 대신 적극적인 맨투맨 수비로 이정현은 신이 나고, 여준석은 달려가 덩크를 찍는다. 안준호 감독의 포용력, 김종규와 이승현 두 고참의 리더십, 이현중을 중심으로 한 MZ 세대의 커뮤니케이션까지.

사람들은 어느새 이 팀을 이렇게 부르기 시작했다. 대한민국 농구의 ‘황금 세대’라고.

“농구인으로서, 이번 평가전은 또 다른 의미가 있어요.” KCC의 이규섭 코치는 이번 평가전을 이렇게 정리했다.

“단순한 승패나 흥행 여부를 떠나서, 이번 무대는 이현중과 여준석이 국내 팬들 앞에서 처음으로 증명할 수 있었던 자리였습니다. 오랜 시간 해외에서 땀을 흘리며 정말 힘들었을 거예요. 정말 외롭고 힘든 길인데, 팬들의 눈에 보이지 않으니 관심이 멀어지죠. 관심이 멀어지는 것뿐일까요? 허송세월 보낸다며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하지만 그 선수들이 이렇게 건재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그 시간들이 헛된 시간이 아니었다고 코트 위에서 증명한 거죠. 그동안 제대로 평가받지 못했던 저들의 도전 정신과 노력에 다시 한번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

이규섭 코치의 말처럼, 이번 평가전에서 보여준 이현중의 3점슛과 여준석의 덩크는 단순한 눈요기가 아니다. 이들의 활약은 KBL 선수들에게 자극이 되었고, 나아가 해외 무대를 꿈꾸던 유망주들에게도 새로운 가능성이 되었다.

그래서 이 ‘황금 세대’는 지금의 대표팀만이 아니라, 앞으로 한국 농구를 이끌 세대까지 포함하는 이름일지도 모른다. 이번 평가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의의가 있다.

사진 = 대한민국농구협회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