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피디아] 슈퍼스타들의 발목을 잡은 NBA의 부상 사례 1탄
그냥 봐도 정말 재밌는 NBA, 경기장 밖에서 떠도는 여러 흥미로운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더 NBA를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준비한 코너가 루키피디아다. 이번에는 NBA 슈퍼스타들의 발목을 잡은 부상 사례들을 다루는 첫 번째 시간이다.
*본 기사는 루키 2025년 4월호에 게재됐습니다.
매직 존슨과 래리 버드
1991년 11월 8일은 NBA 역사에서 가장 충격적인 날 중 하나였다. 리그를 대표하는 슈퍼스타인 매직 존슨이 은퇴 발표를 했기 때문. 당시 그의 나이는 30대 초반에 불과했다.
농구 경기에서 큰 부상을 당한 것은 아니었다. 존슨이 밝힌 은퇴 사유는 에이즈로 이어질 수 있는 HIV(인간면역결핍 바이러스)에 감염됐기 때문이었다. 당시만 해도 에이즈에 대한 공포가 훨씬 컸던 시기이기에 충격 또한 상당했다.
세 번이나 검사를 받을 정도로 존슨 본인조차 이러한 사실을 쉽게 믿지 못했던 것으로 알려졌지만 은퇴 발표 현장에서 그는 덤덤한 모습이었다고 한다.
존슨은 “내 인생이 끝난 게 아니다. 계속 살아갈 것이고 모든 게 여전히 똑같다. 운동도 할 수 있다. 약을 먹는 것부터 시작할 것”이라고 말한 뒤 “이건 내 인생의 또다른 도전이다. 계속 나아갈 것이고 이겨낼 것”이라며 긍정적인 마인드를 전했다.
실제로 존슨은 1차 은퇴 발표 이후 3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적절한 치료, 관리와 함께 활발한 외부 활동을 펼치며 건재함을 과시, ‘HIV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에이즈에 걸려 무조건 죽는다‘는 부정적이고 절망적인 인식을 바꾸는 데 앞장서고 있다.
은퇴 발표를 하고도 올스타에 뽑히거나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출전, 최초의 드림팀 멤버로 활약했다. 1995-1996시즌에는 시즌 중에 깜짝 복귀를 선언, 전성기만큼은 아니었지만 30대 중후반의 나이와 긴 공백에도 여전히 리그에서 통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도 했다. 이후에는 감독과 사업가, 구단 수뇌부 등으로 일하며 다양한 활동을 펼치기도 했다.
존슨만큼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라이벌이었던 래리 버드도 12시즌밖에 뛰지 못하고 비교적 이른 나이에 코트를 떠났다. 시대 최고의 선수 중 한 명이었던 버드의 발목을 잡은 것은 허리 부상이었다.
경기 도중 강한 파울을 당한 뒤 착지 과정에서 허리 부상을 크게 입은 버드는 점점 상태가 악화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준급 활약을 펼친 것은 맞지만 허리 부상의 영향 탓에 버드의 퍼포먼스는 이전보다 떨어지기 시작했다.
1991년 비시즌, 등에 큰 수술을 받았음에도 버드의 부상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벤치에도 제대로 앉아 있기 힘들 정도로 고통이 컸던 상황. 그럼에도 의지를 가지고 1991-1992시즌을 소화했다. 이 시즌을 마지막으로 보스턴의 프랜차이즈 스타는 코트를 떠났다.
감독 부임 이후에도 버드는 뛰어난 능력을 인정받았다. 인디애나 감독 시절이던 1998년, 올해의 감독상을 수상하는 등 큰 발자취를 남겼고 레지 밀러와 함께 팀의 파이널 진출을 이끌기도 했다.
NBA에서 정규시즌 MVP와 감독상을 동시에 받은 케이스는 버드가 유일했다. 하지만 감독 커리어도 오랜 시간 지속할 수 없었다. 허리 통증으로 길게 서 있는 일 자체가 힘들었기 때문. 결국 버드는 2000년을 끝으로 인디애나의 감독 자리에서 물러났다.
포스트 조던들의 아쉬움
’농구 황제‘ 마이클 조던이 NBA에 남긴 임팩트는 말로 표현하기 힘든 수준이었다. 조던 이후는 누가 인기를 책임질 것이냐도 NBA의 중요 숙제 중 하나였다.
페니 하더웨이와 그랜트 힐은 ’포스트 조던‘으로 불린 대표적인 선수들이었다. 데뷔 초부터 매력적인 플레이로 어필하며 많은 인기를 누렸던 그들. 하지만 불운하게도 부상이 그들의 발목을 잡고 말았다.
1993년 드래프트 전체 3순위로 골든스테이트에 지명된 하더웨이는 바로 1순위 크리스 웨버와 트레이드돼 올랜도 유니폼을 입었다. 성공적인 데뷔 시즌을 보낸 그는 2년 차 시즌 상당한 성장세를 보이며 올-NBA 퍼스트 팀에 선정되는 엄청난 도약을 이뤘다.
하더웨이와 샤킬 오닐이 이끄는 올랜도는 마이클 조던이 복귀한 시카고를 꺾고 1994-1995시즌 파이널까지 진출했다. 비록 우승에는 실패했지만 이듬해 하더웨이는 더욱 강한 인상을 남겼다. 오닐이 부상으로 빠진 구간에도 원맨쇼를 펼치며 팀의 승승장구를 이끌었고,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정규시즌 60승을 달성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조던의 후발주자로 꼽히며 상당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하더웨이. 그러나 부상이 그의 발목을 크게 잡았다.
1996-1997시즌 60경기 출전을 채우지 못했던 하더웨이는 1997-1998시즌엔 무릎 부상으로 19경기에 나서는 데 그쳤다. 부상도 부상이었지만 완전한 치료 없이 출전하는 등 하더웨이의 몸 상태에는 계속해서 이상 신호가 오고 있었다.
결국 이 시즌부터 하더웨이의 퍼포먼스는 급격하게 꺾였다. 부상 후유증 탓에 운동 능력이 감소했고 득점력 또한 큰 폭으로 떨어졌다. 올랜도를 떠나 피닉스, 뉴욕, 마이애미를 거친 뒤 현역에서 물러난 하더웨이다.
대학 시절 NCAA 토너먼트 우승을 두 번이나 차지한 그랜트 힐도 포스트 조던 후보로 불리며 많은 조명을 받았던 선수다. 1994년 드래프트 전체 3순위로 디트로이트에 뽑힌 힐은 배드 보이즈 시대 이후 팀을 이끌 주역으로 거론됐다.
신인이었지만 인기는 이미 데뷔 때부터 리그 최고 수준의 슈퍼스타였다. 그 결과 1994-1995시즌과 1995-1996시즌 올스타 투표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결과를 내기도 했다. 특히 95-96시즌의 경우 마이클 조던이 복귀 후 처음 치른 풀타임 시즌이었지만 힐의 득표가 더 많았다.
기량도 충분히 뛰어났다. 꾸준히 20점 이상의 평균 득점을 올리며 팀을 이끌었고 99-00시즌엔 평균 25.8점 6.6리바운드 5.2어시스트를 기록하는 커리어-하이 시즌을 보냈다. 다만 플레이오프에서는 계속 1라운드에서 탈락하는 등 큰 성과가 없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한 의지가 컸던 힐은 99-00시즌 막판 발목 부상을 당했음에도 플레이오프 출전을 감행했으나 저조한 퍼포먼스 속에 팀의 탈락을 막지 못했다. 이 시즌 이후 힐은 초대형 계약과 함께 올랜도로 이적한다.
하지만 디트로이트를 떠난 이후 힐의 커리어는 급격한 추락을 경험하게 된다. 디트로이트 시절 막바지 당했던 발목 문제가 끝없이 그를 흔들었고 이적 후 첫 2시즌 동안 단 18경기 출전에 그쳤다.
발목에만 수술을 여러 차례 받는 등 부활을 위해 노력했던 힐이지만 끝내 전성기 시절의 기량을 되찾지는 못했다. 하더웨이와 힐은 NBA에서 ’부상이 없었다면...‘이라는 가정이 나올 때 가장 많이 언급되는 선수들이다.
사진 = 로이터/뉴스1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