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피디아] NBA의 트레이드 요청

2025-03-01     김혁 기자

그냥 봐도 정말 재밌는 NBA, 경기장 밖에서 떠도는 여러 흥미로운 사실을 알고 나면 더욱더 NBA를 즐길 수 있다. 그래서 준비한 코너가 루키피디아다. 이번 시간은 NBA 트레이드 요청 사례 1탄이다.

*본 기사는 루키 2025년 2월호에 게재됐습니다.

팬들에게 큰 상처 안겼던 태업 논란

최근 지미 버틀러 드라마로 NBA가 뜨겁다. 마이애미 언더독 스토리 주역으로 활약하며 마지막 남은 올드스쿨 낭만의 상징처럼 불렸던 버틀러는 최근 구단과의 불화 속에 언해피를 띄우고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구단에서 마음이 떠난 버틀러는 코트에서 태업성 플레이를 펼치며 팬들에게 큰 실망감을 안겼다.

버틀러 이전에도 태업 논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스타 플레이어들의 태업성 플레이가 트레이드로 연결되거나 트레이드 요청이 원활하게 이뤄지지 않자 태업한 사례들도 있다.

가장 먼저 떠오르는 선수는 역시 ‘에어 캐나다’ 빈스 카터. 별명에서 알 수 있듯이 카터는 토론토 구단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던 선수다. 실력도 뛰어났다. 데뷔 시즌에 신인왕을 차지했고 이후 시즌부터는 올스타를 놓치지 않았다. 토론토가 강팀으로 불리지는 않았지만 카터의 존재감만큼은 상당했다.

그러나 전성기 나이였던 카터에게 2년 연속 플레이오프에 진출하지 못한 팀의 전력 상황이 그다지 만족스럽지 않았다. 결국 2004-2005시즌 구단에 트레이드를 요청한 상태로 시즌이 시작됐다.

카터의 플레이는 이전과 확실히 달라졌다. “더는 덩크를 하고 싶지 않다”는 말을 남긴 덩크왕은 누가 봐도 태업을 의심할 법한 플레이로 본인의 트레이드 가치를 스스로 떨어트렸다. 결국 예상보다 훨씬 헐값에 뉴저지 네츠로 향하게 된다.

뉴저지로 떠난 카터는 토론토 팬들의 뒤통수를 더욱 거하게 쳤다. 이적하기 전보다 확연하게 달라진 플레이로 덩크를 펑펑 터트리며 부활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들이 겹치면서 카터는 당연히 토론토 팬들에게는 금지어와도 같은 인물이 됐다. 

빈스 카터 2004-2005시즌 이적 전후 성적
토론토 시절 – 평균 15.9점 3.3리바운드 3.1어시스트 야투율 41.1%
뉴저지 시절 – 평균 27.5점 5.9리바운드 4.7어시스트 야투율 46.2%

그래도 시간이 약이 됐다. 세월이 흐르면서 카터를 향한 토론토 팬들의 분노는 어느 정도 누그러졌고, 홈 경기에 그의 헌정 영상이 나오자 기립 박수가 나오기도 했다. 이에 눈물을 보이며 감동한 카터였고 나중에는 토론토에서 영구결번까지 됐다.

또다른 슈퍼스타의 태업 논란은 제임스 하든에게 있었다. 아직 커리어가 끝나지 않은 하든은 벌써 트레이드만 4번 경험할 정도로 슈퍼스타치고는 이동이 많았다. 그만큼 트레이드 요청도 잦았다.

가장 큰 임팩트를 남긴 것은 휴스턴에서 브루클린으로 팀을 옮길 때였다. 휴스턴에서의 하든은 MVP를 수상하는 등 NBA 최고의 득점머신으로 이름을 날리며 구단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였다. 휴스턴 또한 플레이오프 단골손님이자 우승 후보로 자주 거론됐다.

그렇지만 강호로 군림하는 시간이 영원할 수 없었다. 우승이라는 벽은 끝내 넘지 못했다. 크리스 폴, 러셀 웨스트브룩 영입에도 우승 갈증은 풀리지 않았고, 결국 트레이드를 요청하기에 이른다. 

2020-2021시즌 초반을 전후로 하든은 상당히 불안했다. 시즌 전에는 캠프 참가를 미루고 파티를 즐기다가 코로나 프로토콜 위반으로 막대한 벌금을 냈고, 이전보다 뚱뚱해진 모습으로 나타난 뒤 정규시즌에서 기대 이하의 모습을 보였다. 뚝 떨어진 득점력에 태업 논란이 등장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하든은 시즌이 얼마 진행되지 않은 시점에 슈퍼팀 브루클린으로 합류했다. 하지만 옛 동료 케빈 듀란트와의 재회도 결국 해피엔딩으로 끝나지 않았다. 하든과 듀란트, 카이리 어빙이 뭉친 브루클린은 우승 후보 0순위로 불렸지만 끝내 정상 등극의 꿈을 이루지 못했고, 하든은 브루클린 합류 후 1년이 지나 또다시 트레이드를 요청해 필라델피아 유니폼을 입었다.

하지만 하든은 필라델피아에서도 또 태업 논란을 일으켰다. 영혼의 파트너처럼 불렸던 대릴 모리 사장과 계약 문제를 두고 루비콘 강을 건넜고 급기야 “대릴 모리는 거짓말쟁이”라며 정면으로 비판하기에 이른다.

옵트인으로 1년 더 계약을 연장했지만 필라델피아에서 뛸 마음이 없었던 하든은 당연히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개인 사정으로 팀을 떠나면서 프리시즌 경기에 출전하지 않았고, 복귀한 이후 원정 비행기에 탑승하려다 제지당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하든은 클리퍼스로 트레이드됐다.

필라델피아는 하든과의 갈등 이전에 또 한 명의 스타가 태업 논란으로 팬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바로 벤 시몬스.

제2의 르브론 제임스로 불렸던 시몬스의 성장세는 완전히 기대치를 충족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올스타 단골손님이었고 수비왕 투표에서도 높은 순위를 기록했다. 팀을 대표하는 스타 중 한 명이었다.

하지만 2021년 플레이오프 2라운드 탈락 이후 시몬스와 필라델피아 구단의 관계는 급격하게 나빠졌다. 트레이드를 요청한 그는 벌금을 감수하고 멘탈 문제를 이유로 경기 출전을 거부했으며 마지못해 훈련에 참여한 뒤 불성실한 모습으로 코칭스태프에 의해 쫓겨나기도 했다. 결국 잇따른 촌극 속에 시몬스는 하든의 반대급부로 브루클린으로 이적하게 된다.

우승으로 이어진 트레이드 요청 

슈퍼스타를 트레이드로 데려오는 가장 큰 목적은 역시 우승이다. 또한 스타가 팀에 트레이드를 요청하는 이유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도 역시나 우승을 향한 강한 열망이다.

트레이드 성공과 실패에 대한 판단은 주관적이라고 볼 수 있지만 그래도 영입 후 우승을 한 번이라도 차지한다면 대부분은 성공적인 영입이라고 평가받는다. 트레이드 요청 후 새로운 팀에서 우승의 기쁨을 맛본 스타들은 누가 있을까?

우선 가까운 사례로 카와이 레너드가 있다. 샌안토니오 황금기 막바지의 스타였던 레너드는 하체 부상 이후 소통 과정에서 구단과 사이가 틀어졌고, 결국 등을 돌렸다. 트레이드를 요청한 레너드의 이적 드라마는 NBA 팬들의 이목을 끌었다.

그의 행선지는 토론토였다. 더마 드로잔, 야콥 퍼들 등을 반대급부로 트레이드된 레너드는 한 시즌만 토론토에서 뛰었지만 우승 청부사 노릇을 특톡히 해냈다. 골든스테이트를 파이널에서 꺾은 토론토는 레너드의 합류에 힘입어 창단 첫 우승을 거머쥐었다.

이듬해에는 앤써니 데이비스의 이적이 있었다. 드래프트 1순위 출신이자 뉴올리언스의 기둥으로 오랜 시간 활약해온 데이비스는 큰 성과를 내지 못했던 팀 사정에 지치고 말았다. 그런 과정에서 LA 레이커스 이적설이 지속적으로 나돌았다.

데이비스 또한 태업설이 일어났던 선수 중 한 명이다. 그렇게 뉴올리언스는 크리스 폴에 이어 또 한 명의 스타를 팀에서 떠나보냈고, 데이비스는 결국 2019년 여름 레이커스 유니폼을 입었다.

태업 논란과 별개로 실력은 확실했다. 데이비스의 레이커스 합류도 우승으로 이어졌다.

르브론 제임스와 듀오를 이룬 데이비스는 원투펀치 역할을 제대로 해냈고 레이커스는 플레이오프도 오르지 못하던 팀에서 단숨에 리그 최상위권 팀이 됐다. 중심이었던 데이비스는 올랜도 버블에서 열린 플레이오프 무대를 지배했다. 특히나 그의 진가는 수비에서도 두드러졌는데 데이비스가 합류한 레이커스는 리그 최고의 수비팀이 됐다.

샤킬 오닐 또한 트레이드 요청 이후 이적한 뒤 얼마 지나지 않아 왕좌의 자리에 오른 선수다.

2004년 파이널, 역사상 최초의 4년 연속 우승을 노리던 레이커스는 배드보이즈 2기 디트로이트에 처참한 완패를 당하며 꿈을 접게 됐다. 이 과정에서 명장 필 잭슨이 팀을 떠나기도 했다.

완벽한 변화의 시점이었다. 필 잭슨의 경질과 더불어 코비 브라이언트와 함께 영광의 시기를 이끌었던 샤킬 오닐도 트레이드를 요청했다. 오닐은 코비와의 계속해서 불화설에 시달리던 터였다. 연장 계약 문제 또한 오닐이 트레이드를 요청한 유력한 이유 중 하나로 거론되고 있다.

마이애미로 떠난 오닐은 드웨인 웨이드와 새롭게 짝을 이뤘다. 비록 최전성기보다는 오닐의 기량이 떨어졌지만 여전히 그는 위력적이었다. 오닐이 합류한 첫 해, 마이애미는 동부 컨퍼런스 파이널에서 디트로이트에 한 끗 차이로 석패했다.

그렇지만 2005-2006시즌은 달랐다. 오닐은 시즌 시작 전 팀과 5년 1억 달러에 계약했는데, 본인이 최대로 받을 수 있는 금액에서 꽤나 삭감된 액수였다. 그만큼 오닐은 마이애미에 애정을 가지고 있었고, 결국 레이커스 시절 1옵션 역할과 달리 젊은 신성 웨이드의 뒤를 잘 받치는 2옵션 역할을 잘 수행했다.

그 결과 마이애미는 창단 첫 우승을 차지했다. 이후 저니맨이 되는 오닐 커리어의 마지막 불꽃이라고 봐도 무방한 순간이었다.

사진 = 로이터/뉴스1 제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