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인터뷰의 주인공인 김이서 치어리더는 최근 가장 대세로 떠오르고 있는 치어리더 중 한 명이다.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매일같이 폭발적으로 증가할 만큼 하루가 다르게 엄청난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김이서 치어리더에게는 ‘농구선수 출신’이라는 독특한 이력이 있다. 선수가 아닌 치어리더가 되어서 코트로 돌아온 김이서 치어리더의 이야기를 담아왔다.

선출 치어리더?

앞서 설명했듯 김이서 치어리더는 농구선수 출신이라는 독특한 경력을 갖추고 있다. 평소라면 치어리더에 관한 질문이 먼저 나왔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자, 그래서 농구는 어떻게 하게 되셨나요?

“제가 중학교 1학년 때였나 그랬어요. 농구부 코치님이 저를 보시고는 키가 크다고 농구를 해볼 생각이 없냐고 하시더라고요. 그 코치님께서 저희 부모님을 설득하셨어요. 그런데 부모님이 코치님의 말씀을 듣고 저를 농구를 시키기로 마음 먹으시고 기숙사에 던져(?)놨어요. (웃음) 초등학교 때 주말에 농구교실에 가서 친구들이랑 놀고 하긴 했었는데 그렇게 갑자기 농구를 시작하게 됐죠.”

그러나 갑작스럽게 시작한 농구는 김이서 치어리더에게 적성에 맞지 않았다. 단지 키가 크다는 이유만으로 엘리트 농구부에 들어가 농구를 하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을 터. 결국 김이서 치어리더는 금방 농구를 그만두고 새로운 길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오래 하지는 않았어요. 제가 적응을 잘 못했거든요. 평소에 운동을 하던 사람이었으면 적응을 할 수 있었겠지만 저는 그러지 않았으니까요. 농구교실에서 친구들이랑 놀던 실력으로 선수를 준비하는 친구들과 같이 농구를 하려니 힘들더라고요. 몸을 풀려고 뛰어다니기만 해도 항상 숨이 찼어요. 그래서 스트레스를 받으면서 이 길은 제 길이 아니라고 생각해서 그만두게 됐죠. 한 2년 정도 했었던 것 같아요.”

그렇다면 이쯤에서 드는 궁금증 하나. 과연 현재 김이서 치어리더의 농구 실력은 어느 정도일까. 금방 그만두었다고는 하나 엘리트 농구를 2년 동안 배웠기에 그녀의 현재 농구 실력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은... 자유투 정도는 어렵지 않게 넣을 정도는 되지 않을까요?(웃음) 또 레이업 정도는 충분히 가능할 것 같아요!”

김이서 치어리더가 학창 시절 농구를 했던 곳은 숙명여중. 당시 같이 운동을 했던 선수들 중 현재 프로에서 활약하고 있는 선수가 있다고 한다. 그 주인공은 바로 우리은행에서 뛰고 있는 이재원.

숙명여중과 숙명여고를 거친 이재원은 2019년 드래프트에서 지명을 받지 못했으나 이후 신한은행의 수련 선수로 입단해 프로 무대에 발을 내딛었다. 이후 신한은행에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던 이재원은 이번 시즌 우리은행으로 이적해 활약을 이어오고 있는 중이다. 

“같이 농구를 했던 친구들 중에서 계속 농구를 하고 프로에 있는 친구는 (이)재원이 밖에 없어요. 제가 재원이가 있는 팀으로 응원 대타를 가거나 하면 반갑다고 연락도 하곤 해요. 중학교 때는 재원이가 주장이었거든요. 이렇게 프로에서 뛰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 신기하고 기특하기도 해요. 언젠가 꼭 WKBL 연봉 1위가 되길 바란다고 전해주세요!”

치어리더로 다시 돌아온 코트

그렇게 짧았던 농구 선수 생활을 마무리 한 김이서 치어리더. 그런 김이서 치어리더의 눈에 새롭게 들어온 것은 바로 춤이었다. 

“농구를 그만두고 뭘 할지 고민을 하던 차에 춤을 춰보고 싶더라고요. 그 때 제가 제일 친하게 지낸 친구가 댄스 동아리를 하고 있었는데 그게 그렇게 멋있어 보이더라고요. 그래서 댄스 아카데미를 갔는데 옆에 연습실에 삼성 썬더스 치어리더 분들이 연습을 하고 있었어요. 우연히 연이 닿아서 연습생으로 시작을 해서 언니들이 경기를 못 가는 일이 생기면 대신 들어가고 하면서 이 일을 시작하게 됐죠.” 

당연히 처음 춤을 배울 때는 힘든 점이 많았다고. 그러나 점차 흥미를 느낀 김이서 치어리더는 그렇게 춤이 가진 매력에 조금씩 빠지게 됐다. 

“제가 너무 뻣뻣해서 웨이브를 배울 때도 머리, 가슴, 팔을 나눠서 배웠어요.(웃음) 저도 그 때는 춤을 추는 제 모습을 볼 때마다 한심하더라고요. 또 치어리더는 액션을 할 때 손이 항상 곧게 뻗어 있어야 하거든요. 그런데 저는 손이 계속 휘니까 테이프로 꽁꽁 싸서 고정을 시키고 연습을 하기도 했어요. 그렇게 하면서도 너무 재밌었어요. 제가 되게 멋진 사람이 된 것 같았거든요.”

그렇다면 그 이전에는 춤을 춰봤던 적이 전혀 없었을까.

“5살? 6살 정도에 발레 학원 잠깐 다녔어요. 그 때 애들이 발레복 입고 하는 게 너무 예뻐 보여서 했는데 저는 그 발레 타이즈가 안 맞더라고요! 그래서 바로 그만뒀죠.”

발레를 했다면 뻣뻣하기는 힘든데... 라는 생각과 함께 발레를 얼마나 했냐고 물어보니 해맑은 미소와 함께 “하루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음... 그래요... 하루도 어쨌든 잠깐은 잠깐이니까요... 틀린 말은 아니야...

어쨌든 그렇게 치어리더의 세계에 발을 딛기 시작한 김이서 치어리더다. 그러나 이 일을 시작할 당시 부모님,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고. 

“처음에 춤을 배운다고 했을 때는 아빠가 엄청 놀렸어요. 막 너처럼 뻣뻣한 애 처음 본다면서~ 평소에도 아빠가 말을 좀 세게 하시거든요? 그런데 제가 그런 거에 무뎌서 상처 안 받아요.”(웃음)

“치어리더를 하겠다고 했을 때도 아빠가 반대를 하셨어요. 농구를 그만두면서 아빠랑 공부 하겠다고 약속을 했었거든요. 그런데 춤을 추겠다고 하니까 반대를 하시더라고요. 사실 지금도 딱히 좋아하시는 편은 아니세요. 그래도 제가 계속 하겠다고 하니까 그 열정을 시험 점수로 보이라고 하시더라고요. 수학을 80점 이상 맞아오면 허락을 해주시겠다고 해서 열심히 공부해서 80점 이상 맞았죠.”

이어 김이서 치어리더는 이와 관련해 억울(?)한 일이 있다며 난데없는 하소연을 하기 시작한다. 그녀는 과연 뭐가 그토록 억울했을까.

“사실 이 수학 80점 이야기가 전에 기사로 나간 적이 있었거든요. 그런데 그 때 댓글에 머리가 얼마나 나쁘면 고작 수학 80점을 이야기하느냐 막 이런 이야기가 있더라고요! 그런데 제가 나온 숙명여중, 숙명여고가 나름 명문(?)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우리 학교는 시험이 딥따(?) 어려웠어요! 진짜 1,2문제로 내신 등급이 왔다갔다하는 곳인데 그런 댓글이 달려서 상처받았어요.”(웃음)

예.. 그렇다고 합니다. 김이서 치어리더에게 상처(?)를 준 그 분들은 이 해명을 보신다면 인스타 DM으로라도 사과하세요.

아무튼 이처럼 험난한(?) 과정을 거쳐 마침내 김이서 치어리더는 이 일을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공교롭게도 김이서 치어리더가 처음으로 일을 시작한 곳은 농구장. 과거 선수로 뛰던 농구장을 치어리더가 되어 다시 돌아온 느낌은 어땠을까.

“처음에는 좀 어색했어요. 항상 몸 풀고 뛰어다니던 코트에서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이 어색하더라고요. 막 마대자루를 들고 바닥을 닦아야 할 것 같고.(웃음) 또 원래 코트에 들어갈 때 신발 미끄러지지 않게 밑창을 닦고 들어가는데 춤추기 전에 닦고 들어가야 할 것 같더라고요.”

보통 농구를 처음 접하는 치어리더들은 규칙도 처음부터 배워야 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는 김이서 치어리더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았던 이야기. 또한 김이서 치어리더는 농구에 대한 남다른 애정을 언급하기도 했다.

“그럼요! 저는 규칙은 빠삭(?)하게 다 알고 있죠. 그런데 또 막상 주위 치어리더들한테 설명하려고 하면 설명은 잘 못해요. 저 혼자는 되게 잘 알고 있는데 설명하기에는 제가 말주변도 부족하고 해서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큰 틀에서만 알려주곤 했어요.”

“제가 다른 종목에 비해 농구는 룰을 더 자세히 알고 있는 것도 있어서 더 편안함을 느끼는 것 같아요. 저에게는 농구 코트가 약간 고향 같은 느낌? 오! 방금 되게 멋진 말이었어! 그쵸?”

아니라고 했다간 서운해 할 것 같아 황급히 동의를 해주었다. 그렇게 그녀의 자화자찬과 함께 다음 질문으로...

코로나와 함께 찾아온 위기

김이서 치어리더가 치어리더로 코트에 돌아왔던 시기는 고등학생 때였다. 2000년 생으로 상당히 어린 나이이지만 어느덧 연차가 꽤 쌓인 치어리더다. 그렇다면 그녀가 느끼는 치어리더라는 직업의 매력은 무엇일까.

“제가 응원하는 팀이 잘해서 플레이오프에 가거나 우승을 하거나 하면 뭔가 제가 조금이라도 기여를 한 것 같아서 뿌듯한 마음이 들어요. 또 저를 찍어주시는 직캠이나 기사 같은 것들이 나오는 것도 신기하기도 하고요. 많은 분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는 것이 매력인 것 같아요. 가끔 팬 분들이 DM으로 응원하는 메시지를 보내주시면 더 뿌듯함을 느끼기도 해요.”

그런 그녀에게도 위기의 순간은 있었다. 코로나가 시작되면서 직접적인 피해를 받기 시작한 것. 코로나 초창기 당시 프로스포츠의 시즌들이 줄줄이 취소되면서 갑자기 일자리를 잃게 된 김이서 치어리더다. 

그런 상황에서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결국 김이서 치어리더는 PC방과 레스토랑 아르바이트 등을 하면서 상황이 나아지길 기다렸다. 최근 이러한 부분 역시 큰 화제가 되기도 했다. 

“코로나 때문에 시즌이 중단이 되었잖아요. 먹고 살려면 어쨌든 일을 해야 하니까 아르바이트 사이트를 뒤지다가 저희 집 근처에 PC방이 오픈한 것을 봤어요. 그래서 시즌이 시작되기까지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야겠다 싶어서 시작을 했죠.”

그 PC방에는 남자 손님들이 구름떼처럼 모여들지 않았을까. 그러나 본인 확인 결과 그런 일은 없었다고 한다. 그리고 김이서 치어리더가 설명한 그 이유 역시 범상치 않다. 

김이서 : 그 때 인기는 그다지 없었어요. 마스크를 쓰고 있기도 했었고 또 요즘에는 PC방이 거의 식당인거 아시죠? 엄청 다양한 요리를 했어야 했는데 제가 만들고도 그게 너무 맛있는 거에요! 또 저희 사장님 인심이 되게 좋으셨거든요. 진짜 너무 맛있어서 맨날 엄청 먹다가 살이 많이 쪘었어요.
루키 : 그때 상황이 원망스럽거나 하지는 않았어요?
김이서 : 그렇진 않았어요. 쉬면서 대학을 들어가서 다양한 친구도 만나고 했거든요. 치어리더를 하다 보면 항상 보는 사람들이 똑같잖아요. 그런데 학교를 다니면서 또 다른 사람들을 만나고 하니까 새롭더라고요. 오히려 좋은 부분도 있었어요.

아, 참고로 김이서 치어리더는 치어리더 일을 시작한 후 개명을 했다. 개명 이전의 이름은 나영. 이전 이름도 충분히 예쁜 이름인데 왜 개명을 하게 됐을까.

“제가 지금 18개월 된 남동생이 있거든요. 그 동생이 태어나기 전에 부모님께서 이름을 지으러 가셨다가 제 이름도 물어보셨나봐요. 그런데 거기서 나영이라는 이름은 잘 되다가도 안 되는 이름이라고 해서 이름을 바꿨어요.”

“개명에 대해서 별로 거부감은 없었고 마음에 들었어요. 이름을 바꾸고 더 잘 풀리는 것 같기도 하고요. 현재 만족도는 90% 정도에요. 나머지 10%는 앞으로 제가 살면서 채워나가야죠.”

개명 이후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치어리더 중 한 명이 됐으니 확실히 효과가 있었을지도. 어쨌든 팬들에게 전하는 인사를 끝으로 김이서 치어리더와의 즐거운 인터뷰를 마무리했다. 

“사실 하루에 팔로워가 1,000명 단위로 쭉쭉 늘어나니까 무섭기도 해요. 갑자기 너무 많은 관심을 받으니까 이러다가 갑자기 확 떨어질 수도 있다고 생각해서 무서운 것 같아요. 그래도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시는 것이 즐거워요. 앞으로도 더 많이 관심 가져주시고 좋아해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김이서 치어리더 프로필>
생년월일 : 2000년 9월 9일
신장 : 175cm
현 응원구단 : 고양 캐롯 점퍼스
인스타그램 아이디 : 2e2__seo
MBTI : INFP

사진 = 이현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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