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 편집부 = 프로 선수들은 구단과 팬들의 큰 기대를 받으며 데뷔한다. 하지만 모든 선수들이 그 기대를 충족시키는 것은 아니다. 정확히 말하자면 기대에 못 미친 선수들이 훨씬 더 많다. 부상과 자기관리 실패, 뜻밖의 사고 등 여러 가지 변수들이 이들의 성장을 가로막았다. 기대에 비해 N%가 부족한 커리어를 보낸 선수들에 대해 돌아보는 시간, 그 두 번째 주인공은 톰 구글리오타다.

♣ 톰 구글리오타 PROFILE

출생 : 1969년 12월 19일 (미국 뉴욕州 헌팅턴스테이션)
신체조건 : 208cm, 113kg
출신대학 :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데뷔 : 1992년 신인드래프트 1라운드 6순위 (워싱턴)
소속팀 : 워싱턴 -> 골든스테이트 -> 미네소타 -> 피닉스 -> 유타 -> 보스턴 -> 애틀랜타
수상실적 : 올-루키 퍼스트팀, 올스타(1회)
통산기록 : 13시즌(총 763경기) 9,895득점, 5,589리바운드, 2,140어시스트, 1,079스틸 / 경기당 평균 13.0득점, 7.3리바운드, 2.7어시스트, 1.4스틸, 0.6블록슛

★ 스타의 산실 1992년 드래프트 6순위

좀처럼 보기 힘든 ‘구글리오타(Gugliotta)’라는 성씨는 70여년의 NBA 역사에서 단 한 선수만이 사용했다. 그것은 누구일까? 주인공은 바로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 준수한 활약을 펼친 백인포워드 톰 구글리오타다. 구글리오타는 샤킬 오닐과 알론조 모닝으로 대표되는 1992년 신인드래프트 출신이다. 이 해의 드래프트는 5명의 NBA 올스타(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 크리스천 레이트너, 톰 구글리오타, 라트렐 스프리웰)를 배출했다. 또한 짐 잭슨, 라폰소 엘리스, 월트 윌리엄스, 로버트 오리, PJ 브라운, 클라렌스 웨더스푼, 파파이 존스, 맷 가이어, 말릭 실리, 앤써니 필러, 존 배리 등 수준급 선수들이 이 해 드래프트를 통해 데뷔했다.

노스캐롤라이나주립대 4학년을 마치고 드래프트에 나선 구글리오타는 1라운드 6순위로 워싱턴 불리츠(現  워싱턴 위저즈)에 지명됐다. 당시 워싱턴은 힘든 나날을 보냈다. 이전 시즌에 참담한 성적(25승 57패)을 거두고도 이 좋은 드래프트에서 6순위에 그쳤기에 상황은 더욱 암울해 보였다. 이들보다 성적이 좋았던 샬럿 호네츠(31승 41패)가 2순위 픽을 얻어 알론조 모닝을 지명한 것과 대조적이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구글리오타가 (오닐과 모닝 등에 비하면 무게감이 많이 떨어지지만) 첫 시즌부터 좋은 활약을 펼쳤다는 사실이다. 구글리오타는 신인 시즌에 단 한 경기만을 결장하며 경기당 평균 14.7득점, 9.6리바운드, 3.8어시스트, 1.7스틸을 기록, 성공적으로 데뷔했다. 

대부분의 빅맨이 프로 데뷔 후 대학시절의 영광을 뒤로한 채 그저 그런 롤플레이어로 전락하곤 한다. 구글리오타는 이들과는 분명 달랐다. 그는 백인들 중 최상위급 운동능력을 지녔고, 뛰어난 센스와 일대일 기술도 보유하고 있었다. 이를 바탕으로 파워포워드와 스몰포워드를 넘나들었다(아쉬운 점은 해당시즌 워싱턴의 성적이 22승 60패로 직전 시즌보다 더 나빠졌다는 사실). 구글리오타는 결국 올-루키 퍼스트 팀에 이름을 올리며 데뷔 시즌을 마감했다. (당시 올-루키 퍼스트 팀은 샤킬 오닐, 알론조 모닝, 라폰소 엘리스, 크리스천 레이트너, 톰 구글리오타까지 전원이 빅맨인 엽기적인 라인업으로 장식됐다.)

★ ‘꽃피는 봄날’을 맞은 미네소타 시절

구글리오타는 1993-94시즌에도 제 몫을 다했다. 1994-95시즌 초반에는 골든스테이트 워리어스로 트레이드 됐다. 미래의 드래프트 1라운드 지명권 세 장과 구글리오타를 크리스 웨버 한 명과 바꾸는 대형 트레이드였다(골든스테이트는 이때 얻은 1라운드 지명권 중 한 장으로 1998년 드래프트에서 빈스 카터를 지명한 뒤 곧바로 토론토 랩터스의 앤트완 재이미슨과 트레이드했다). 

하지만 골든스테이트의 리빌딩 계획에 구글리오타는 없었다. 골든스테이트에 온 지 정확히 3달 뒤인 1995년 2월, 그는 다니엘 마샬과 1대1로 트레이드되며 미네소타에 안착하게 된다. (이 트레이드는 그의 저니맨 커리어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미네소타에서 그는 드래프트 동기이자 자신과 여러 모로 비슷한 백인 빅맨 크리스천 레이트너와 한솥밥을 먹게 됐다. 그리고 1995-96시즌에는 이 팀의 미래를 책임질 케빈 가넷이 합류했다. 이에 따라 미네소타의 프런트코트 라인 교통정리가 필요해 보였다. 결국 미네소타는 가넷과 구글리오타를 남기고, 레이트너를 처분했다.

당시 미네소타는 가넷의 가능성을 매우 높게 평가했다. 구글리오타는 고졸로 데뷔한 어린 가넷이 리그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코트 안팎에서 잘 챙겨줬다. 반면 레이트너는 굴러온 돌이 박힌 돌 빼는 것을 의식하듯, 가넷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 때문에 미네소타 프런트의 선택은 자연스럽게 구글리오타가 됐다. 1996년 2윌 레이트너는 애틀랜타 호크스로 트레이드됐다.

미네소타는 1996 드래프트에서 스테판 마버리를 영입했다. 이에 '가넷-구글리오타-마버리' 트리오가 완성됐다. 이 3인방의 활약은 눈부셨다. 이들은 손발을 맞춘 첫 시즌인 1996-97시즌에 경기당 평균 51.3득점 18.4리바운드 14.8어시스트 3.8스틸 3.3블록슛을 합작하며 리그에서 가장 젊고 유능한 트리오로 각광받았다. 창단 이래 좋은 소식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었던 미네소타는 이때 처음으로 정규시즌 40승(42패) 이상을 거뒀고, 꿈에 그리던 플레이오프 진출에도 성공했다. 
 
이 무렵은 구글리오타의 최전성기이기도 했다. 그는 1996-97시즌에 생애 최고의 활약(경기당 평균 20.1득점 8.7리바운드 4.1어시스트 1.6스틸 1.1블록슛)을 펼쳤다. 덕분에 커리어에서 유일하게 올스타에 선발됐다. 팀 동료 가넷은 샤킬 오닐(부상)의 대체 선수로 선발돼 올스타전에서 구글리오타와 손발을 맞췄다. 한때 이들과 동료였던 레이트너는 동부 컨퍼런스 올스타에 선정됐다. 또 과거 구글리오타와 맞트레이드됐었던 크리스 웨버도 이때 패트릭 유잉(부상)의 대체 선수로 올스타에 합류했다. 한편, 이 올스타전은 구글리오타에게 매우 뜻 깊은 자리이기도 했다. 어릴 적 우상이었던 마이클 조던과 함께 올스타 무대에 섰기 때문이다.

 

★ 내리막의 시작과 끝

최고의 시즌을 보낸 뒤, 1997-98시즌에도 구글리오타는 좋은 페이스를 유지했다. 41경기를 치를 때까지 이전 시즌 못지않은 활약(경기당 평균 20.1득점 8.7리바운드 4.1어시스트 1.5스틸)을 펼치며 2년 연속 올스타전에 나설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이 시점에서 발목 뼛조각 제거수술을 받으며 남을 시즌을 통째로 쉬게 됐다. 이전까지 매 시즌 5경기 이내로 결장하며 건강을 유지했던 구글리오타는 이때부터 걸핏하면 병원을 찾는 선수로 전락했다.

당시 미네소타는 시즌 도중 가넷과 계약기간 6년, 총액 1억 2,600만 달러(한화 약 1,200억 원)에 달하는 파격적인 액수의 재계약을 체결했다. 그런데 이 계약이 너무 큰 부담이 됐기 때문에 미네소타는 가넷, 구글리오타, 마버리 모두를 이끌고 가기가 힘들어졌다. 에이스급 활약을 펼쳤고, 자신이 팀의 중심이라고 생각했던 구글리오타는 구단의 미온적인 태도에 차츰 실망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대로 가면 가넷이 그를 훨씬 뛰어넘는 것은 시간문제였다. 결국 구글리오타는 그 옛날 레이트너처럼 이 팀을 떠나야만 했다. 시즌이 끝난 뒤 구글리오타는 피닉스 선즈와 계약을 맺고 미네소타를 떠났다. (구단에 불만이 가득했던 마버리마저 1999년 3월 뉴저지 네츠로 트레이드되며 미네소타의 젊은 트리오가 이끌던 시대는 짧게 끝나고 말았다.)

파업 여파로 짧아진 1998-99시즌, 구글리오타는 7경기만을 결장하며 컨디션을 회복했다. 제이슨 키드를 중심으로 돌아가던 피닉스에서 구글리오타는 다시 플레이오프 무대를 밟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1라운드에서 포틀랜트 트레일 블레이저스에게 스윕당했다.

이후 구글리오타는 1999-00시즌 중반 발표된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팀에 이름을 올리는 영광을 누렸다. 그런데 그에게 뜻밖의 사고가 닥쳤다. 갑작스런 발작으로 죽을 고비를 간신히 넘긴 것이다. 원인은 불면증 때문에 복용한 약의 부작용. 

한술 더 떠서 그는 2000년 3월 동료 랜디 리빙스턴과 충돌하며 무릎부상을 입어 수술대에 올랐다. 그로 인해 플레이오프에 나서지 했고, 2000년 시드니 올림픽에도 불참하게 됐다. (이때 그를 대신해서 올림픽에 참가한 선수가 빈스 카터였다. 다시 말하면, 구글리오타의 부상이 없었다면 우리는 카터가 프랑스 센터 프레드릭 와이즈를 뛰어넘으며 작렬시킨 그 덩크슛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일생일대의 기회를 놓친 구글리오타는 이후 속절없이 무너졌다.

2000-01시즌 구글리오타는 선발라인업에서 제외되며 단 두 경기를 제외하고 모두 후보로 출전했다. 이때 그가 남긴 기록은 경기당 평균 6.4득점 4.5리바운드 1.0스틸. 전성기와 비교하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이후 구글리오타는 예전의 기량을 되찾지 못했다. 거듭된 수술로 인해 그의 무릎은 흉터로 가득했으며, 운동능력을 잃어서 활용가치가 떨어졌다. 사실상 2002-03시즌을 끝으로 은퇴해도 이상할 것이 없어보였다. 그러나 그는 단 한 경기라도 더 나서고 싶어 했다. 그래서 피닉스를 떠나 유타 재즈, 보스턴 셀틱스, 애틀랜타 호크스 등을 거치며 선수생활을 이어갔다. 허나 그는 어느 팀에서나 후보였고, 매 시즌 절반 이상을 부상으로 인해 결장했다. 결국 그는 2004-05시즌을 끝으로 현역에서 물러났다. 한때 마이클 조던으로부터 “1990년대의 래리 버드”라는 찬사를 들은 선수치고는 너무도 초라한 은퇴였다.

★ 무엇이 아쉬웠나?

무엇보다도 구글리오타의 발목을 잡은 것은 부상이었다. 건강했던 데뷔 첫 다섯 시즌으로 미뤄보면, 그는 장차 충분히 한 팀의 영구결번까지도 노려볼만한 재목이었다. 특히 래리 버드의 뒤를 이을 백인 포워드 기대주였기에 아쉬움이 더욱 크다. (물론 기대치만큼 성장했어도 버드에는 한참 미치지 못했을 것이지만 말이다.) 선수 시절 말미, 경기 중계 중 클로즈업되는 그의 무릎은 온통 수술자국으로 가득해 보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곤 했다. 또한 구단 버스에서 발작을 일으켜 죽을 고비를 넘기는 등 좀처럼 겪기 힘든 사고도 경험했다. 그런 가운데서도 계속 현역 생활을 이어나갔던 정신력은 높게 평가할 만하지만 어쨌든 당초 기대치에 비하면 결과는 실망스러웠다. 

큰 경기에서 강한 인상을 심어주지 못했고, 그에 앞서 큰 경기 경험 자체가 부족한 것도 아쉬움이다. 구글리오타는 NBA에서 13시즌을 뛰었으나 플레이오프에는 단 4시즌(미네소타 소속 시절 1시즌, 피닉스 소속 시절 3시즌)밖에 나서지 못했다. 팀은 플레이오프에 진출했지만 자신은 부상으로 벤치만 지켰던 적도 있었고, 막상 출전한 플레이오프 경기에서도 내용이 좋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또, 네 번의 플레이오프 무대에서 모두 1라운드 탈락을 경험했다. 그가 출전했던 플레이오프 경기의 성적은 3승 9패에 불과하다.

그나마 국제대회에서 아쉬움을 달랬으면 좋았으련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대표선수로 선발되었으나, 부상으로 대회 시작 전에 교체됐다. 또 1998년 세계선수권대회 당시 국가대표 발탁이 유력했지만, NBA의 직장폐쇄로 인해 이 대회에 NBA 선수들이 참가하지 못하게 되면서 이것조차 불발됐다. 그나마 성과가 있다면 1999년에 열린 아메리카 챔피언십 대회에서 금메달을 획득한 것이었다. (당시 미국대표팀 멤버는 케빈 가넷, 빈 베이커, 팀 하더웨이, 제이슨 키드, 게리 페이튼, 앨런 휴스턴 등이었다.)

데뷔 초부터 여러 번의 트레이드에 시달리던 그는 미네소타와 피닉스에서 좋은 시절을 보낸 뒤 말년에 다시 여러 곳을 전전해야 했다. 만일 미네소타에서 가넷, 마버리와 이룬 트리오가 조금만 더 오래갔더라면 그의 커리어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수도 있다. 더군다나 미네소타가 구글리오타를 대신해서 영입한 가넷의 조력자들은 조 스미스를 비롯해 실망스러운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더욱 아쉬움이 크다. 구글리오타는 미네소타 생활에 만족감을 표했다. 마음에 맞는 동료들과 함께 하며 전성기를 맞이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미네소타로부터 버림받은 상실감은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항상 여기저기 거쳐 가기만 했다. 항상 그랬다”는 그의 말처럼 구글리오타에게는 정착할 곳이 필요했다. 그나마 피닉스에서 제이슨 키드, 앤퍼니 하더웨이, 클리포드 로빈슨, 숀 매리언 등 좋은 동료들을 만났으나, 이때는 본인의 몸이 받쳐주질 못했다. 

다사다난한 선수시절을 보낸 구글리오타는 지금 조용하고 행복하게 지내고 있다. 가산을 탕진한 많은 선수들과 달리 자산을 잘 관리한 그는 열심히 골프를 치며 여유로운 삶을 영위하고 있다. 마치에서 코트에서 보낸 힘든 나날을 보상받기라도 하듯이 말이다.

 

사진 제공 = Gettyimages/이매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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