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 편집부 = '데니스 로드맨'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추억은 무엇인가? 몸을 아끼지 않는 허슬 플레이와 육탄 방어의 '배드 보이' 시절이 먼저 떠오른다면 여러분은 추억세대다.

반면, 염색과 붉은 유니폼, 갖가지 기행이 먼저 떠오른다면 신세대일 지도 모른다. 하지만 추억세대든, 신세대든 누구나 공감할 만한 내용이 하나 있다. 로드맨은 앞으로도 나오기 힘든 성격의 팀 플레이어라는 사실이다.

영구결번의 영예를 누리다
2011년 4월 2일(이하 한국 시간), 펠리스 오브 오번힐스에서 기념비적인 행사가 거행됐다. 데니스 로드맨의 등번호 '10'번의 영구결번식이 열린 것이다. 신세대 팬들에게는 로드맨의 91번이 더 기억에 남을지 모르겠지만 로드맨의 출발은 10번이었다.

이 10번과 함께 그는 디트로이트 피스톤스에서 두 번의 우승을 거머쥐었다. 또 2번이나 <올해의 수비수> 상을 수상했다(1990, 1991). 뿐만 아니다. 올스타에도 2번(1990, 1992) 선정됐다.

여기에 로드맨은 1989년부터 디트로이트를 떠나기 전까지 연속으로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을 놓치지 않았다. 1988-89시즌에는 식스맨 상 투표 2위에 오르며 가치를 인정 받았다(1992-93시즌에 20경기나 결장했음에도 불구하고 로드맨은 1,132개의 리바운드로 리그 1위에 올랐다. 당시 평균 리바운드는 무려 18.3개였다).

그가 대성할 거라 예상했던 이들은 거의 없었다. 로드맨은 철저한 무명이었다. 재능을 알아본 이는 극소수였다. 그러나 딕 모타 감독(현 덴버 너게츠 코치)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빌 레임비어에게 "데니스는 빌 러셀 이후 최고의 리바운더가 될 거야" 라 귀띔해줬다.

같은 해 팀 지휘봉을 잡은 척 데일리 역시 생각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데일리 감독은 로드맨에게 꾸준하게 기회를 줬다. "데니스, 언젠가 난 너에게 기억에 남을 만한 기회를 줄 거야. 기다리는 사람에게는 언제나 복이 찾아오는 법이거든." 데일리의 그 말은 로드맨에게 큰 동기부여가 됐고 결과는 성공적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성공에 목말라 있었던 로드맨은 필사적이었다. 아니, 전투적이었다. 몇 분을 뛰든 그는 매치업 상대를 귀찮게 했다. 그래서 붙여진 별명도 '웜(worm)' 이었다.

그랬던 로드맨을 위해 디트로이트가 이런 행사를 마련한 건 어찌 보면 당연했던 것이었다. 당시 행사는 그의 가장 순수했던(?) 시절을 기념하는 장이기도 했다.

올해의 수비수 상을 수상한 후 기쁨의 눈물을 흘리던 시절을 비롯해 래리 버드를 비난하는 등 할 말은 다 했지만 팀 규율만큼은 잘 따랐던 그 시절을 기념하기 위해서 말이다.

행사를 앞두고 아이재아 토마스를 만난 자리에서 로드맨은 '정말 기쁘고 설렌다' 는 말을 전했다. "내가 이곳에서 영구결번이 될 만큼 많은 일을 했는지 잘 모르겠다"며 겸손해하기도 했다. 디트로이트는 로드맨에게 이만큼이나 특별한 곳이다.

농구팬들에게도 로드맨은 기억해야 할 가치가 충분한 선수다. "넌 아마도 내가 겪어본 선수 중 가장 독특한 녀석일 거야" 라는 옛 동료 조 듀마스의 말처럼 로드맨 같은 스타일의 선수는 지난 20년 간 찾아보기 힘들었다.

로드맨이 독특했던 이유
단장, 감독들이 NBA 선수를 뽑는 기준은 다양하면서도 까다롭다. ‘이왕이면 다홍치마’ 라고 하나만 잘 해서는 눈에 띄기 힘들다.

스피드가 빠르고 패스가 기가 막히다 해도 슈팅이 약하면 순위가 낮아진다. 반대로 빼어난 슈팅 능력을 지녀도 키가 작으면 그 또한 고려 대상이 된다. 키도 크고 빠르고, 슈팅이 좋은데도 가치가 낮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 선수는 수비가 약하거나 운동능력이 부족할 것이다.

이처럼 선수의 가치를 평가하는 기준은 차고 넘친다. 이 가운데 로드맨이 데뷔 한 시즌 만에 디트로이트의 주전으로 올라서고 10년 넘게 NBA에서 스타로 군림할 수 있었던 것은 말 그대로 기적에 가깝다. 그가 잘하는 건 공격이 아닌 수비와 리바운드 등 궂은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벤 월라스의 예에서 볼 수 있듯이 데일리 감독은 로드맨의 기질을 단번에 알아봤다. 그는 1987-88시즌 마지막 20경기에서 로드맨을 주전으로 출전시켜 큰 효과를 봤다.

그렇다면 로드맨이 리그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일까? 단순히 동물적 감각에서 기인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로드맨은 끊임없이 상대팀 비디오를 보면서 매치업의 플레이 스타일을 간파했다. 볼의 낙하지점을 연구해 효과를 본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

여기에 몸싸움을 두려워하지 않는 투쟁심, 적어도 코트 위에서만큼은 팀 플레이에 해를 끼치지 않고 자신이 잘하는 것에만 충실했던 마인드도 큰 원동력이 됐다.

뿐만 아니라 로드맨은 자신의 몸을 해치는 행동은 하지 않았다. 알려진 대로 그는 고성방가, 아내 폭행 등을 비롯한 범법 행위로 수차례 구설수에 올랐다.

구단 연습에도 불참하기 일쑤였고 코트 위에서는 카메라맨을 발로 차고 심판을 머리로 들이받아 징계를 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금지 약물이나 폭행 등 자신의 몸에 피해를 주는 행위는 일체 삼갔다.

리그에서 이러한 캐릭터는 더 이상 보기 힘들어졌다. 라쉬드 월라스, 론 아테스트 정도가 명맥을 이었지만 로드맨처럼 한 분야에서 미친 존재감을 발휘하진 못했다. 그와 함께 했던 동료들이 로드맨을 일컬어 'unique', 'special' 이라는 단어를 빼놓지 않았던 이유다.

변화의 계기
그렇다면 로드맨이 통제하기 어려운 선수가 된 배경은 어디에 있을까? 사실 배드 보이 시절에도 로드맨은 거칠었다. 빌 레임비어, 아이재아 토마스, 릭 마혼 등 터프가이들 틈에서 제대로 배운 셈. 그렇지만 감독과 코칭스태프조차 통제하기 어려운 선수는 아니었다.

그가 삐뚤어진(?) 건 척 데일리 감독과 결별한 후 팀과 갈등을 겪은 상황 때문이었다. 같은 시기, 이혼으로 인한 아픔도 그에게 타격을 줬다.

당시는 배드 보이 말기였다. 로드맨은 자살을 생각했을 정도로 마음에 큰 상처를 입었다. "이제부터는 나 하고 싶은 대로 살 것이다" 라며 일탈을 예고하기도 했다.

훗날 로드맨은 디트로이트를 떠났던 상황을 떠올리며 "어린 아이 같았다. 성숙하지 못했다. 피스톤스는 가족 같은 팀이었다. 팀, 그 이상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모두가 그랬다. 선수들은 심지어 자기 가족조차도 두 번째로 제쳐뒀을 정도였다. 그만큼 타이틀을 갈망했기 때문이었다" 고 회고했다.

즉, 그가 거친 길을 걷게 된 것은 진짜 가족(아내)과 또 다른 가족(디트로이트 일원)의 해체가 발단이 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변신은 파격적이었다. 웨슬리 스나입스가 출연한 영화 <데몰리션 맨>의 주인공을 따라 금색 헤어스타일을 하고 등장하는가 하면, 다양한 색깔로 머리를 물들였다. 그가 어떤 스타일을 하고 나올 지가 관심의 대상이 된 적도 있다. 문신과 피어싱도 하루가 다르게 늘어갔다.

때마침 팀 동료는 '선(善)' 의 이미지, 데이비드 로빈슨이었다. 로드맨은 1993년 10월 1일, 디트로이트에 트레이드를 요구, 샌안토니오 스퍼스로 팀을 옮겼다.

성실하고 듬직한 리더형의 로빈슨과 '망나니' 이미지 로드맨의 절묘한 조화는 시즌 내내 큰 이슈가 됐다. 그러나 이내 불협화음으로 이어졌다.

급기야 로빈슨은 천방지축 날뛰는 로드맨을 염두에 두고 "동물원이 된 것 같다" 라며 아쉬워했다. 이에 로드맨은 플레이오프에서 제 몫을 다하지 못한 로빈슨을 두고 '새가슴' 이라며 맹비난하기에 이르렀다. 창단 후 첫 우승 기회를 잡은 샌안토니오는 허무하게 무너졌다.

물론, 로드맨이 노력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1994년 11월, 스퍼스 구단주 및 단장과 면담을 통해 마음을 다잡았고 장기간 징계를 맞아 자숙의 기간도 가졌다. 그러나 예전의 로드맨으로는 돌아오지 못했다.

왕조의 일원이 되다
1995-96시즌을 앞두고 농구팬들은 대형 트레이드 소식을 접한다. 표면상으로는 1대1(+현금) 트레이드였지만 임팩트만 놓고 보면 1990년대 일어난 최고의 딜 중 하나라 볼 수 있다. 바로 로드맨이 윌 퍼듀와 트레이드 되어 시카고 불스로 이적하게 된 것이다.

엄청난 사건이었다. 샌안토니오가 결국 리바운드 천재에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는 점은 둘째 치고 마이클 조던, 스카티 피펜이라는 대스타들과 함께, 그것도 한때 디트로이트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불스서 뛰게 됐다는 사실에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조던은 로드맨의 태클에 가까운 수비를 여러 차례 당했다. 피펜 역시 큰 부상을 입을 뻔 했을 정도로 코트 위에서 자주 충돌했다. 그랬던 선수들이 두 팔 벌려 로드맨을 받아들인 것.

로드맨 스스로도 두 슈퍼스타들과 함께 하게 됐으니 관심이 가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였다. 하지만 의문의 눈초리도 적지 않았다. "로드맨이 이들을 위해 헌신할 것인가?" "팀을 위해 희생할까?" "필 잭슨 감독과는 잘 어울릴 수 있을까?"

결론만 놓고 보자. 로드맨은 붉은색 유니폼을 입은 뒤에도 리바운드 타이틀을 놓치지 않았다.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1996)에도 줄곧 이름을 올렸다.

1996년 우승 당시, 파이널 한 경기 최다 공격 리바운드(11개)를 걷어내기도 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소속팀 불스가 3년 연속 우승을 차지했다는 사실이다. 1995-96시즌, 72승으로 역대 최다승을 챙겼고 1996-97시즌에도 역대 2위인 69승 13패를 기록했다. 그 가운데 로드맨이 있었다.

물론, 사건사고도 적지 않았다. 심판폭행, 상대선수와의 다툼 등 몇 차례 대형 사고를 일으켰다. 1996-97시즌에는 카메라맨을 발로 차는 행위로 20만 달러의 벌금뿐만 아니라 11경기 출장정지 징계를 받기도 했다.

당시, 로드맨은 금전적으로 약 100만 달러의 손해를 봤다. 그러나 적어도 코트 위에서만큼은 조던과 피펜의 충실한 파트너로 맹활약했다. 서로가 서로를 인정했고 덕분에 불스는 또 다른 전설을 쓸 수 있었다.

초라했던 마무리
왕조 해체 후 로드맨의 행보는 실망스러웠다. 여러 팀을 찾아다녔지만 악행(?)을 두려워한 팀들의 철저한 외면을 받았다.

처음부터 문제가 심각했던 건 아니었다. 1998-99시즌 중 LA 레이커스와 입단 계약을 맺었지만 역시나 팀에서 불협화음을 일으키면서 방출 통보를 받고 말았다. 23경기에서 따낸 리바운드는 11.2개로 여전히 위력적이었지만 그뿐이었다.

그 다음 시즌, 댈러스 매버릭스가 로드맨을 영입하면서 분위기 전환을 꾀했다. 하지만 엉뚱하게도 데이비드 스턴 총재와 시비가 붙었다. 결국, 로드맨은 물만 흐린 채 또 한 번 방출 소식을 접해야 했다. 이번에는 단 12경기였다.

돈 넬슨 前 감독은 그를 두고 "38살의 성인이지만 책임감이 전혀 없다. 나이 값을 하지 못한다" 고 비난했다. 스티브 내쉬 역시 "우리 팀의 일원이 되고자하는 노력을 전혀 하지 않았다" 고 아쉬워했다.

NBA를 떠난 후 로드맨은 프로레슬링 무대에 출전하는가 하면, 란제리 풋볼리그의 커미셔너로 활동하는 등 흥미로운 행보를 이어갔다.

농구에 대한 열의를 버릴 수 없었는지 ABA 리그, 잉글랜드 리그, 필리핀 및 핀란드 등에서 열린 시범경기에도 출전해 눈길을 끌었다. 또, 잦은 방북으로 구설수에 오르기도 했는데 최근에는 북한 방문을 자제하는 듯한 분위기다.

왠지 지금 NBA에서 뛰어도 리바운드 10개 정도는 거뜬히 잡아낼 것만 같은 남자, 데니스 로드맨. 데뷔부터 은퇴까지 그가 걸어온 길은 전혀 평범하지 않았다. 농구 스타일도, 외모도, 심지어 은퇴 후 택한 직업과 의상까지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2011년 명예의 전당 후보에 이름을 올린 이유는 꾸준히 한 우물만 팠기 때문이 아닐까? 괴기한 동작으로 리바운드를 잡아내는 로드맨의 오렌지볼에 대한 열정이 문득 그리워지는 요즘이다.

 | PROFILE
데니스 로드맨
1961년 5월 13일생, 198cm/100kg
뉴저지 태생, 사우스 오크 클리프 고교(텍사스) 출신
 

 | 로드맨 NBA 타임라인
1986-87시즌 NBA 데뷔(2라운드 27순위)
  77경기 출장, 6.5점, 4.3리바운드

1987-88시즌 82경기 중 32경기 주전 출전
  88년 1월 25일, 포틀랜드 전 30점, 18리바운드
  NBA 파이널 출전(준우승)

1988-89시즌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 선발
  NBA 첫 우승(4-0, 對 레이커스)
  식스맨, 올해의 수비수상 투표 2위
  야투 성공률 59.5% 리그 1위

1989-90시즌 시즌 마지막 43경기 주전 출전(39승 4패)
  NBA 올스타전 출전
  NBA 올해의 수비수상 수상 

1990-91시즌 12.5리바운드
  2년 연속 NBA 우승
  2년 연속 올해의 수비수상 수상

1991-92시즌 18.7리바운드로 리그 1위
  (20년 만에 최고 기록)
  NBA 올스타전 출전

1992-93시즌 18.3리바운드로 리그 1위
  
1993-94시즌 샌안토니오 이적
  17.3리바운드 리그 1위
  본격적으로 염색 시작
  마돈나와의 스캔들

1994-95시즌 16.8리바운드 리그 1위
  모터사이클 사고로 어깨 부상(32경기 결장)
  NBA 서부 컨퍼런스 결승출전

1995-96시즌 시카고 이적
  14.9리바운드 리그 1위
  1996년 1월 16일 첫 트리플-더블(對 필라델피아)
  72승 10패로 역대 1위 승률
  NBA 우승(개인 통산 3번째)
  심판 박치기로 2만 달러 벌금(6경기 징계)
  NBA 파이널 한 경기 최다 공격 리바운드(11개)
  올-디펜시브 퍼스트 팀(조던, 피펜, 로드맨)

1996-97시즌 16.7리바운드로 리그 1위
  NBA 우승(개인 통산 4번째)

1997-98시즌 자서전 발간
  15.0리바운드로 리그 1위
  NBA 우승(개인 통산 5번째)
  1998년 오프시즌 중 레슬링 경기 출전

1998-99시즌 LA 레이커스 이적
  23경기 만에 방출

1999-00시즌 댈러스 매버릭스 이적, 12경기 만에 방출
  (12경기 중 두 차례 퇴장)
  롱 비치 잼(ABA, 2003-04)
  오렌지 카운티 크러시(ABA, 2004-05)
  티주아나 드래곤(ABA, 2005-06)
  핀란드 리그, 잉글랜드 리그(2005,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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