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원석연 기자] ‘10년에 한 번 나올까 말까 한 최고의 포인트가드.’

2019년, 미국 여자농구계는 2001년생 포인트가드 페이지 베커스에 열광했다. 180cm-66kg의 완벽한 신체 조건, 스테픈 커리를 연상케 하는 타고난 슛 터치와 고교 레벨 선수의 것이라고는 믿기 힘든 드리블과 패싱 능력까지. ESPN은 그녀를 일찌감치 전미 랭킹 1위 고교 선수로 점찍었고, 한술 더 떠 미국농구협회(USAB)는 지난 12월, 그녀를 WNBA를 포함한 미국의 모든 여자농구선수를 대상으로 하는 ‘올해의 여자농구선수(2019 USA Basketball Female Athlete of the Year)’로 선정했다. 고교 선수로는 매우 이례적인 사건.

베커스가 2019년 미국을 대표하는 최고의 여자농구선수가 된 결정적인 대회는 지난해 여름 태국 방콕에서 열린 2019 FIBA U19 여자농구월드컵이었다. 베커스는 이 대회에서 11.6점 4.1리바운드 5.4어시스트를 기록하며 대회 MVP에 올랐다. 베커스는 이 대회에서 예선부터 결승까지 총 7경기를 뛰었는데, 그가 가장 낮은 득점(7점)과 야투율(33.3%)을 기록하며 고전한 경기가 있었으니 조별 예선 두 번째 경기였던 대한민국과의 경기다. 한국은 비록 이날 경기에서 67-89로 패했지만, 호주와 함께 이 대회에서 미국을 상대로 65득점 이상을 기록한 유이한 팀이었다. 

 

특히 베커스와 같은 포지션인 포인트가드 자리에서 그에게 당당히 도전장을 내민 한 소녀가 있었다. 상주에서 비행기를 타고 건너온 165cm의 단신 가드 허예은이었다. 상주 소녀는 이 대회에서 자신보다 15cm가 더 큰 MVP를 상대로 6점 5리바운드 6어시스트를 기록하며 한국의 선전을 이끌었다. 이 대회에서 경기당 4.9개의 어시스트를 배달한 허예은은 베커스(5.4개)에 이어 이 부문 전체 2위에 오르는 기염을 토한다. 그리고 이때, 허예은의 고국에서 그의 활약을 비디오로 지켜보며 흡족해한 이들이 있었다.

“잘 어울리지 않나요?” 

2019년 여름, 여자프로농구 청주 KB스타즈의 한 관계자가 허예은의 국가대표 유니폼에 새겨진 스폰서 로고 ‘KB’ 두 글자를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안덕수 감독이 허예은을 처음 본 것은 지난 2018년 여름이었다. 영주 국민체육센터에서 열린 2018 한국중고농구연맹 주말리그 왕중왕전, 상주여고 허예은은 대전여상을 상대하고 있었다.

“2년 전 여름이었습니다. 영주에서 고등학교 대회가 열린다고 해서 경기를 보러 갔는데, 조그마한 애가 동갑내기들과 완전히 다른 농구를 하고 있더라고요. 그런데 하필 그 경기에서 손목을 다쳐 나가는 바람에 더 지켜보지 못했어요. 그래서 다른 대회였던 김천 대회에서 (허)예은이를 다시 보러 갔죠.”

안 감독은 해를 넘겨 2019년, 김천에서 열린 연맹회장기 대회에서 다시 허예은을 찾았다. 허예은은 이날 숭의여고를 상대로 치른 예선전에서 16점 9리바운드 10어시스트로 트리플-더블에 가까운 활약을 펼쳤다. 안덕수 감독은 경기 후 허예은을 불러 세웠다.

“키가 몇이냐?”
“165요.”
“우리 팀 (심)성영이보다 작은 것 같은데…”
“아니에요. 제가 더 커요.”

안덕수 감독은 이 장면을 아직도 똑똑히 기억한다. “작은데 당차더라고요. 프로 선수는 이런 게 필요하거든요.” 이때가 바로 안 감독이 허예은을 미래 1순위로 낙점한 순간이었다.

“프로팀 감독님이 부르니 신기했죠.” 허예은 역시 이때를 생생히 떠올릴 수 있다. “나중에 감독님이랑 같은 팀이 되면 꼭 키를 재서 제 말이 거짓말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싶었어요.” 허예은이 KB를 자신의 프로 첫 팀으로 상상했던 첫 번째 순간이었다.

 

“허예은을 뽑고 싶습니다.”

KB는 리그에서 코칭스태프와 프런트의 협조가 가장 긴밀한 구단 중 하나다. 안덕수 감독은 프런트에 의사를 전달했고, 프런트는 곧바로 ‘허예은 프로젝트’에 착수했다. 그러나 U19 대표팀에서의 활약으로 이미 허예은은 모든 구단의 1순위 후보가 돼 있었다. 대표팀뿐만 아니라 2019년에만 연맹회장기와 협회장기에서 득점상, 어시스트상, 최우수상, 수비상 등 무려 6개 트로피를 휩쓸었으니 이러한 평가는 정당했다. 문제는 직전 시즌 정규리그 우승을 차지한 KB가 1순위 구슬을 차지할 확률은 4.8%에 불과했다는 것. 

KB 프런트는 골몰했다. 

직전 시즌 우리은행처럼 구슬을 잘 뽑는 법부터 지명 후 트레이드까지 모든 수단과 방법을 연구했다. 그리고 결국 고심 끝에 내린 결론, ‘확률을 높이자’. KB는 FA 시장에서 김수연을 원했던 신한은행과 딜을 했다. 사인앤트레이드로 김수연을 내주는 대신, 2020년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신한은행의 1라운드 지명권 순위가 KB보다 앞설 경우, 순번을 교환하는 거래. 직전 시즌 정규리그 6위였던 신한은행의 1순위 지명 확률은 리그에서 가장 높은 28.6%였다.

 

만약 KB가 희박한 확률로 신한은행보다 앞선 순번이 나오면 이 거래는 아무 것도 남지 않는 '쪽박'이 되지만, 안덕수 감독은 개나 걸을 쫓는 사람이 아니었다. 이로써 4.8%에 그쳤던 KB의 1순위 확률은 신한은행의 28.6%를 더해 33.4%가 됐다. 허예은을 뽑기 위해 WKBL 역대 최초의 ‘지명권 스왑 딜’이 이뤄진 것이다.

물론 6개월 뒤 열린 WKBL 신입선수 선발회에서 KB가 4.8%의 기적으로 1순위 지명권을 획득하면서 이 거래는 결과적으로 KB에게 아무 것도 남는 게 없는 '쪽박'이 됐다. 그러나 허예은을 품에 안은 KB에게 순번이나 보상은 더 이상 중요치 않았다. 트레이드 결과는 '도'가 나왔지만, 드래프트 결과는 완벽한 '모'였다.

“저희 KB스타즈는 상주여고 허예은 선수입니다.” 

2020년 1월 9일 15시, 안덕수 감독이 1순위 지명권으로 허예은의 이름을 불렀다. 허예은이 단상에 올라오자 그의 165cm 키만큼 커다란 꽃다발을 건네며 안 감독이 말했다. “예은아, 정말 뽑고 싶은 선수였다.”

 

프로팀 청주 KB스타즈는 아마추어 상주여고와 많은 것이 달랐다. 가령 훈련 전 몸을 풀 때도 트레이너와 함께 체계적으로 스트레칭을 한다거나, 고등학교 땐 ‘더블팀’이었던 수비 용어를 ‘잼비(베이스라인 부근 더블팀)’라는 생전 처음 듣는 말로 부른다는 것, 그리고 학교에서 먹던 급식이 최고급 식단으로 바뀌었다는 것 등. (허예은은 프로에 가서 가장 좋은 점이 무엇이냐는 질문에 가장 먼저 “밥이 맛있어요”라고 답했다.)

정신없이 프로 생활에 적응하고 있던 그에게 생각보다 빨리 기회가 찾아왔다. 안덕수 감독은 KB의 후반기 첫 경기인 18일 KEB하나은행전에 신인 허예은의 등번호 2번을 15인 로스터에 올렸다. “점수 차가 나면 뛸 수도 있으니 벤치에서 들어가면 뭘 할지 생각하고 있으라”는 귀띔과 함께. 

결국 허예은은 82-66으로 팀이 크게 앞선 종료 3분 44초 전, 심성영과 교체돼 들어가 데뷔전을 치렀다. 허예은과 함께 뛴 이소정, 박지은, 김소담, 김민정은 모두 주전 선수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루키의 득점을 위해 한마음 한뜻으로 공격을 양보했다. 패스, 스크린, 허예은이 공을 잡을 때까지 다시 패스, 또 스크린. 언니들의 헌신 속에 허예은은 데뷔전에서 3개의 슛을 던졌으나, 야속하게도 공은 모두 림을 외면했다. 데뷔전 최종 기록은 0득점 0리바운드 0어시스트.

“당연히 점수가 벌어지길 바랐죠.” 데뷔전에서 무득점을 기록한 허예은이 말했다. “점수 차가 벌어져야 뛸 수 있으니까, 벤치에서 엄청 응원했어요. 그런데 정말로 긴장은 안 됐는데, 잘 못 하고 왔어요. 그래도 다음 기회가 있으니까 아쉽진 않아요.”

2년 전부터 시작된 그 융통성 없는 정직함에 KB는 허예은을 택했다.

 

사진 = 박진호 기자,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 FIBA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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