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정진경 칼럼니스트] 대한민국 여자 농구가 중국의 만리장성을 넘어 도쿄올림픽 지역예선 프리-퀄리파잉 토너먼트에서에서 먼저 1승을 가져가며 올림픽 본선 도전의 희망을 밝혔다. 

쉬리민 중국 감독은 4쿼터 초반 작전타임에서 어린 선수들의 정신력을 강하게 질책하며 선수들의 동기부여를 위해 애를 썼지만 감독 또한 이런 경기 흐름에 적잖이 당황하는 모습이었다.

경기 내내 리드를 유지하던 우리 대표팀은 4쿼터, 감독의 질책 이후 각성한 중국의 추격으로 위기를 맞이했지만 결국 박혜진의 결승 드라이브 인으로 역전에 성공하고, 중국의 턴오버를 유발시키면서 승리를 챙겼다. 

늙지마 김정은 
김정은의 시계를 멈췄으면 좋겠다. 

국내 리그 뿐 아니라 이번 국제 대회 에서도 최고의 컨디션과 능력을 보여 주면서 대표팀 승리를 견인했다. 박지수와 2대2, 본인의 1대1, 그리고 정확한 3점슛 등으로 공격에서 내외곽을 가리지 않는 활약을 했다. 수비에서도 김정은의 움직임은 멈추지를 않는다. 

가끔 개인적으로 연락을 하면 여기저기 아픈 곳도 많고 팀 훈련을 전부 소화 하는 것도 힘들다는 이야기를 비치기는 하지만, 김정은이 보여주는 농구는 언제나 김정은 개인의 것이 아니었다. 

어느 지도자, 어느 팀을 만나더라도 거기에 맞춰가며 성공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김정은의 농구 코트 위 시간을 강제로 멈춰 이대로 머물게 하고 싶다. 

아시아 최강 박지수
국내리그에서 ‘최강’이라는 수식어는 이제 당연하겠지만, 이번 중국과의 경기로 확실히 아시아 최고의 센터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이번 시즌 초반 잠잠하던 미들슛도 높은 확률을 보여줬고, 때로는 인사이드, 때로는 외곽에서의 비율도 잘 잡아 가면서 본인의 역할을 100% 이상 해냈다.

WNBA에서 출장시간의 보장이나, 뚜렷한 활약을 보여주지 못했고, 그로 인해 국내 팬들의 많은 질책도 받고 있지만, 본인이 감당하고 이겨내고 있는 경험이 이번 중국전에서는 자신감 넘치고 여유 있는 플레이로 녹아들었다고 본다. 

뛰어난 신체 조건에 더해 어마어마한 운동능력까지 보여주는 미국과 유럽 선수들을 상대하다가 중국 선수들을 만나니 높이는 여전했겠지만 그 움직임은 마치 눈앞에 슬로우 모션이 펼쳐지는 것 같았을 것이다.

대표팀은 이번 경기 2-3지역방어를 주력 수비로 준비 했는데, 페인트 존 안에서 박지수의 예측과 활동이 이 수비의 성공을 크게 좌우했다. 정신적으로도 많이 성숙해져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블루워커 김한별
이제 김한별은 당당히 한국 농구를 대표하는 선수로 이름을 남길 수 있을 것 같다.

한국 대표팀에 필요한 블루워커의 역할은 김한별 밖에 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했다. 삼성생명에서도 그렇지만 대표팀에서도 김한별이기에, 김한별밖에 할 수 없는 역할을 당당히 펼쳐보였다.

4쿼터 중요한 승부처에서 중국 선수의 턴오버를 유발 시킨 것도 김한별의 수비였다.

김한별의 스틸은 강하고 긴 팔, 그리고 힘에서 나오기 때문에 한 번 볼이 손에 걸리면 좀처럼 놓치지 않는다. 인사이드에서의 리바운드 참여와 꼭 필요 할 때 해 주는 득점, 그리고 강한 승부욕은 한계에 이른 체력을 넘어서는 힘이 되기도 한다. 

또한 팀에 헌신하는 그의 적극성과 경기력은 선수들의 팀워크를 더 견고하게 만들어준다. 

에이스라는 이름 김단비
김단비는 기록상의 활약이 미미해도 에이스라는 수식어를 벗겨 낼 수 없다. 존재만으로도 에이스인 선수가 바로 김단비다. 그것은 대표팀에서도 마찬가지다.

에이스는 선수 스스로 원해서 되는 자리가 아니다. 농구의 흐름을 보면서 눈에 들어오는 특정 선수들에게 우리는 ‘에이스 기질이 있다’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선수가 가지는 부담과 책임감은 선수가 원하지 않아도 강제로 이루어지는 경우도 많고, 한 팀의 에이스라는 수식어가 붙는 선수들은 대부분 보란 듯이 그 부담과 슬럼프를 이겨내고 우뚝 선다.  

최근 소속팀에서 부상과의 싸움을 하면서도 코트에 있으면 그 존재를 가감 없이 보여 준 김단비는 이번 중국전에서 비록 좋은 스탯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존재만으로 수비를 긴장 시키고, 다른 선수들의 활로를 열어주는 역할을 하면서 '역시 김단비'라는 느낌을 지울 수 없게 했다. 

임영희의 오마주 염윤아
누군가의 이름 뒤에 있는 것이 본인에게 좋지만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한 번 대표팀 최초 승선과 탈락을 겪은 염윤아는 정통 1번이 없는 대표팀에서 선발로 나서 1번의 역할을 아주 잘 소화해 주었다. 염윤아 역시 타고난 1번 선수는 아니었지만 적어도 이번 중국 전에서는 충분히 그런 역할을 보여줬다.

염윤아를 보면 앞으로 임영희의 대체자로서, 혹은 어떤 형태로든 임영희의 역할을 맡아줄 수 있는 선수라는 희망을 갖게 한다. 지금까지 염윤아의 농구 인생도 임영희가 걸어왔던 길과 비슷한 부분이 많다.

임영희가 서른이 넘은 나이에 우승팀의 주장이 되며 정신적 지주로 우리은행의 전성시대를 이끌었던 것처럼, 염윤아도 이적 후 KB 우승의 마지막 퍼즐이 되었고, 선수들에게 맏언니로서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고 있다.

임영희가 갖고 있던 ‘대기만성’이라는 단어를 이어받은 염윤아의 발전이 대표팀에서도 이어지길 응원한다.

최고의 식스맨 박혜진
식스맨이라는 역할은 지금의 박혜진에게 정말 어색한 역할이 아니었을까? 

박혜진은 그간 국제 대회에서는 국내 대회만큼의 두드러진 활약을 보여주지 못해 항상 안타까웠고, 그를 사랑하는 농구 팬들은 물론 본인도 많이 힘들어 했다. 나 또한 우리은행 농구를 벗어난 박혜진을 보면, 어쩔 줄을 몰라 하는 모습이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컸다.

하지만 이번 중국전의 그를 보면서 ‘이 선수는 본인이 가지고 있는 것을 조금 더 편하게 내려놓았을 때 더 무서운 선수가 되겠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본인의 자존심이 식스맨이라는 위치를 거부 할 수도 있었는데 그것을 잘 이겨냈고, 많을 것을 내려놓고 힘을 뺐다. 비로소 더 위대한 선수로의 발걸음을 한 걸음 내딛었다고 생각한다.

역전승을 이끌었던 마지막 드라이브인은 우리가 알고 있던 'MVP 박혜진'의 모습, 그대로였다.

국내 농구의 트랜드
중국전의 승리는 많은 것을 대변한다. 

승리는 좋은 팀워크와 좋은 팀 디펜스만으로 나온 것은 아니었다. 최근 몇 년간 국내 여자 농구의 포지션 파괴 현상은 그 어느 나라보다 두드러졌고, 그 결과는 오늘 중국전에서 잘 드러났다고 생각한다. 

박지수를 제외한 우리나라 대표팀 선수들은 대부분이 1번부터 4번까지의 포지션 소화가 가능한 선수들이다. 각 팀을 대표하는 이 베테랑 선수들은 몇 시즌 전부터 본인의 고유 포지션은 물론, 팀의 취약 포지션까지 소화해야 했다. 

이런 변화는 프로에만 국한된 이야기가 아니다.

올해 열렸던 세계대회에서 좋은 성적을 거둔 U19 대표팀의 경기 중에도 비슷한 양상이 있었다. 센터 유망주 이해란(수피아여고)이 벤치에서 쉬고 있을 때 경기를 뛰고 있는 다섯 명의 선수들 모두 1,2번 포지션을 대표하는 선수였다. 1,2번이 주 포지션인 선수들도 때에 따라서는 다른 역할을 병행할 수 있는 기량을 늘려가고 있다.

정상급 외국인 선수들의 역할이 중요했던 초기 시절부터, 외국인 선수의 비중이 줄고 국내 선수의 역할이 중요해 진 최근까지의 변화를 보자. 

주로 빅맨이 중심이 되는 외국인 선수의 영향으로 어린 선수들이 센터 포지션을 선호하지 않아 유망주들의 가드 쏠림 현상이 두드러졌다. 

몇 년 전부터는 스킬 트레이닝 열풍이 불었고, WKBL과 각 구단들은 국내외를 오가며 이 부분에 투자를 이어갔다. 이는 선수들의 기술과 능력 향상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최근에는 기술을 극대화 하기위해, 그 이전에 필요한 신체능력의 퍼포먼스를 잘 내기 위한 관리에도 초점이 맞춰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제는 센터 포지션의 선수들도 가드와 같이 드리블 기술을 익히고, 3점슛도 던질 줄 알게 되었다. 가드들은 본인들의 컨트롤 능력을 더 극대화 시킬 수 있게 되었으며, 포스트 업 기술을 배우는 것 또한 필수가 되었다. 

중국과의 경기를 보면, 박지수는 김정은, 김단비, 김한별, 염윤아, 박혜진 즉 경기에 나서는 모든 선수들과 2대2를 할 수 있다. 한 쪽에서 2대2로 공간을 만들면, 다른 쪽 에서는 3점슛을 받아 던질 준비를 하고 있다. 3점슛이 안되면 1대1 마무리도 가능하다.

각 팀의 중심인 이 선수들은 대부분 2대2 해결 능력을 갖고 있다. 볼 핸들러인 본인 혹은 박지수의 득점을 만들거나, 외곽까지 킥아웃이 가능한 시야를 가지고 있다.

박지수가 외곽으로 수비를 끌어내면 다른 선수들이 포스트로 들어가기도 한다. 중국의 장신 선수들을 내 외곽으로 수비 활동 반경을 크게 만들면서 교란 시킨다. 실제로 쉬리민 중국 감독은 타임 아웃때, 선수들이 정신없이 하는 스위치 디펜스에 불만을 드러냈다.

김한별과 박지수가 핸드오프 2대2를 하던 중, 볼을 받는 핸들러가 박지수가 되기도 했다. 박지수는 자연스럽게 드리블을 시작하면서 수비와 1대1을 시도했다. 

지금 대표팀의 베테랑 선수들은 예전과는 조금 다른 능력과 시스템을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우리는 누가 뭐래도 WNBA리거인 아주 좋은 센터를 보유 하고 있고, 크고 작은 부상으로 고생하고 있지만 경험 많은 베테랑들이 버텨주면서 동시에 좋은 정신력도 보여주고 있다. 이 글에 거론하지 않았지만 벤치에 좋은 슈터, 좋은 가드의 자질을 가진 어린 선수들도 있다.

여전히 아시아 여자농구의 패권은 일본이 쥐고 있다.

저변과 시스템 등 인프라 면에서 우리나라는 일본의 상대가 되지 않는다. 농구를 하는 선수 자체가 일본의 한 현 규모에도 미치지 못하고 있다.

하지만 오랜 세월동안 노력을 통해 우리나라를 추월하고 아시아 정상으로 올라선 일본을 보며, 우리나라 농구계도 꾸준한 노력을 진행하고 있다. 조금 더 일찍 변화와 발전의 틀을 잡지 못한 것이 아쉽고, 이로 인해 인기 하락과 더불어 팬들로부터 많은 지탄과 비난을 받은 것도 사실이지만, 그런 가운데에서도 우리 선수들은 꾸준히 성장했고, 지금도 계속 자라나고 있다.

LA올림픽 은메달, 시드니 올림픽 4강 등 빛나는 역사를 만들었던 찬란한 선배들에 이어, 가장 최근 한국 여자농구의 영웅이었던 박정은-이미선-변연하의 시대가 끝나면서 여자농구 대표팀을 향한 우려와 실망이 대단했다. 여전히 갈 길이 멀다.

하지만 중국과의 경기에서 제 몫을 다한 베테랑들과 아시아를 대표하는 센터, 그리고 가능성을 보이는 젊은 선수들까지... 향 후 몇 년 후에는 다시 새로운 조각을 맞춰야 하는 지금의 이 조합으로 퍼즐을 잘 맞추어, 도쿄 올림픽에 출전하고 선전하기를 기대해 본다.

사진 = 대한민국농구협회 제공, 여자 대표선수 S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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