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원석연 기자] 그야말로 우여곡절(迂餘曲折)이란 말이 잘 어울린다. 산넘고 강건너 겨우겨우 구직에 성공했는데, 새 일터의 지난 시즌 순위는 6승 29패로 최하위다. 그래도 4승 31패였던 KDB생명(현 BNK 캐피탈)보다 무려 2승이나 더 많이 한 팀이라고 위로해 보지만, 출근하자마자 책상 위에 놓여있는 것은 다섯 장의 사직서. 훈련을 위해 체육관에 선수단을 모았는데 명색이 프로팀 훈련 인원이 고작 7명이다. 시작부터 등골이 서늘하다. 하지만 벌써 좌절할 수는 없다. 여기저기 발품을 팔아 선수들을 모아 겨우 한숨을 돌린 그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2차 세계 대전을 준비하는 연합군의 심정이다”라고.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19년 6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OK저축은행의 마지막 감독

2019년 3월 8일. 아산 이순신 체육관. OK저축은행의 마지막 경기가 끝났다. 얼마 안 가 BNK의 인수 소식이 들려오며 OK저축은행 읏샷 여자프로농구단은 그렇게 단 1년 만에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정상일 감독은 OK저축은행의 초대 감독이자 마지막 감독이다. 4승 31패로 단일 시즌 역사상 최다패를 기록한 KDB생명의 지휘봉을 물려받아 단 1년 만에 팀을 13승 22패, 4위로 끌어올렸다. 이제는 이름도 바뀌고, 연고도 바뀌고, 수장도 바뀐 팀. 정상일 감독 또한 우여곡절 끝에 새 넥타이를 맸지만, 그에게 여전히 OK저축은행은 아픈 손가락이다.

“아직도 시상식이 기억에 남아요. 전날 밤부터 안혜지가 뭐 수상 소감을 좀 준비했나 봐요. MIP는 확실치 않았는데, 어시스트왕은 확실히 받는 거였으니까. 그런데 다음날 올라가서 ‘감사합니다’ 짧게 한마디 하고 내려오더라고요? 그 한마디가 어찌나 울리던지… 그 다섯 글자에 선수단 전체의 마음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어요.”

 

시상식이 끝나고 정상일 감독과 OK저축은행 선수단은 근처 카페로 자리를 옮겨 차를 한잔 마셨다. OK저축은행의 송별회이자 해단식이었다.

“선수들과 제대로 인사를 못 하고 나왔어요. 송별회나 이런 것도 없었고요. 뭔가 그런 자리를 만들기가 굉장히 모호한 시기였습니다. BNK의 인수는 결정이 났지만, 감독 자리는 미정인 때였어요. 나를 그대로 쓴다는 말도 있고, 여자 감독을 고려하고 있다는 말도 있고 확실한 것 없이 소문만 무성했어요. 그러다 보니 따로 인사하는 자리를 만들기가 좀 어려웠죠. 선수들과 밥도 아니고 차를 마시고 집으로 돌아왔어요. 돌아오는 길에 속이 참 답답하더라고요. 제가 한국에 돌아와 처음으로 지도했던 애들이었어요. 1년 동안 정말 어려운 환경 속에서 고생한 선수들을 그렇게 보내려니 마음이 안 좋더라고요. 이제 좀 손발이 맞아 들어가고, 아직 가르쳐줄 것도 산더미 같았는데…” 

그래서일까. 정 감독은 지금도 뉴스란에 BNK 선수들 기사가 나오면 꼬박꼬박 챙겨본단다. 남자 농구의 유도훈 감독만큼이나 ‘어록 제조기’로 소문난 정상일 감독은 BNK 선수들을 두고 ‘초가집 살다 기와집 보낸 느낌’이라고 비유한다.

“지금은 BNK가 인수해서 부산에 있는 기와집으로 갔지만, 작년에는 정말 초가집 신세였어요.(웃음) 숙소나 체육관 같은 환경도 척박했지만, 무엇보다도 팀이 없는 서러움과 미래에 대한 불안감이 선수들을 짓눌렀어요. 시즌 중반에는 오히려 그것을 동기부여제로 삼아 힘을 내긴 했지만, 지금 생각해도 정말 어떻게 운동했나 싶어요.” 

자초지종

시계를 다시 시상식으로 돌려보자. 정상일 감독의 심금을 울린 안혜지의 수상 소감이 나온 그 시각, 장내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신한은행이 보도자료를 통해 전임 신기성 감독의 후임으로 박성배 감독을 선임했다고 발표했기 때문.

“직감적으로 OK저축은행 연임은 어려울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어요. 그래서 솔직한 심정으로, 감독이 공석이었던 신한은행과 KEB하나은행에서 혹시 불러주지 않을까 기대를 걸고 있었죠. 그런데 시상식 날 그렇게 기사가 떴고, 또 얼마 안 가 하나은행이 이훈재 감독을 선임했다는 소식을 들었어요. ‘틀렸구나’ 싶었죠. 그땐 정말 물밀 듯 밀려오는 회의감을 주체할 수 없었어요. ‘세상 일이 열심히 한다고만 되는 게 아니구나’ 싶더라고요.”

하지만 인생사 새옹지마라고 했던가. 불미스러운 일로 한바탕 홍역을 치른 신한은행이 다시 감독 공고를 냈다. 정확히 1년 전 OK저축은행에 공모로 당선됐던 정 감독은 다시 한번 공모에 응했다. ‘공모 경력 2년 차’ 정 감독은 무사히 면접을 마쳤고, 3일 뒤 구단으로부터 합격 통보를 받았다. 구직에 성공한 것이다.

신한여고에서 연합군으로

그렇게 신한은행의 감독이 되고 열흘 뒤, 정상일 감독은 또 한번 ‘새옹지마’라는 말을 곱씹어야만 했다. FA 1차 협상 결과, 곽주영, 윤미지, 양지영 등 FA 선수 세 명과 비(非) FA였던 김규희, 김형경이 은퇴를 택한 것. 가뜩이나 리그에서 가장 얇은 전력층인데, 한두 명도 아니고 다섯 명이나 무더기 이탈이라니. 정 감독은 또다시 눈앞이 캄캄해졌다.

“선수단을 소집하고 훈련하려고 모였는데, 재활조 빼고 인원이 7명 밖에 없더라고요. 제가 ‘여기 무슨 신한여고냐’고 우스갯소리를 했어요. OK저축은행 처음 왔을 때가 생각나더라고요. 그때도 꼴찌팀을 물려받았는데, 이경은이 FA로 나가고 김시온도 나가면서 가드가 안혜지 하나였거든요. 그때도 몇 달간 잠을 제대로 못 잤었는데…”

그러나 오히려 지난 시즌 설쳤던 밤잠 덕분에 정 감독은 이번 사태를 유연히 대처할 수 있었다. 곧바로 부족한 선수를 충원하기 위해 FA 시장을 수소문하고, 구단에 전화를 돌려 트레이드를 통해 선수를 수급했다. 그렇게 한채진, 김수연, 황미우, 김이슬, 임주리가 신한은행 유니폼을 입었다. 우리은행을 제외하고 5개 구단 선수들이 인천 도원 체육관으로 모여들었다. 정상일 감독은 그런 신한은행을 ‘연합군’이라고 표현했다.

“2차 세계 대전 때 독일을 중심으로 한 추축국에 맞서기 위해 프랑스, 미국, 소련 등 다양한 국가가 모여 연합군을 만들었잖아요. 그때 연합군은 저마다 풍습도 다르고, 언어도 다른 곳에서 왔지만, 이기기 위해 똘똘 뭉쳐 싸웠어요. 우리도 마찬가지에요. 여러 군데서 이적해 왔죠. 지금은 운동법도 다르고, 수비 자세, 공격 방식도 다 다를 거예요. 하나로 모이는 과정에서 부침도 있겠지만, 점차 뛰다 보면 그 다양한 경험들과 사고방식은 결국 팀에 큰 재산이 되어 돌아올 겁니다.”

②편에서 계속...

사진 = 루키 사진팀, 이현수 기자 stephen_hsl@naver.com

저작권자 © ROOKIE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