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원석연 기자] 전자랜드의 아름다운 여정이 끝났다. 8년 만에 4강 플레이오프 직행부터 창단 22년 만에 첫 챔프전 진출까지. 그토록 바랐던 우승에는 닿지 못했지만, 그들의 전성시대는 이제부터 시작이다.

인천 전자랜드 엘리펀츠는 21일 울산동천체육관에서 열린 2018-2019 SKT 5GX 프로농구 울산 현대모비스 피버스와 챔피언 결정전(7전 4선승제) 5차전에서 84-92로 패했다. 시리즈 전적 1승 4패. 전자랜드의 창단 첫 챔프전 나들이는 그렇게 끝났다.

‘개그랜드’. 좋은 국내선수 자원을 여럿 보유했지만, 아직 영글지 못한 그들은 클러치 상황 때마다 아쉬운 플레이로 고개를 떨구는 팀. 매 시즌 플레이오프에는 진출하지만, 챔프전에는 진출한 적 없는 ‘졌잘싸’의 대명사. 사람들은 전자랜드를 ‘개그랜드’라 손가락질했다. 

개막 미디어데이에서 유도훈 감독이 “숙원을 풀고 싶다”며 구단 슬로건 ‘챔피언을 향해 꿈을 쏘다’를 읊는 순간에도 전자랜드의 챔프전 진출을 예상하는 이는 많지 않았다. 미디어데이에서 사령탑들이 뽑은 우승 후보 명단에는 현대모비스와 전주 KCC 그리고 창원 LG가 있었을 뿐, 전자랜드의 이름이 불리는 일은 없었다. 

그러나 개막전, 뚜껑을 열고 본 전자랜드는 강했다. 디펜딩 챔피언 서울 SK를 상대로 101-66 대승으로 쾌조의 스타트를 기록한 전자랜드는 그대로 3연승을 질주했다. 

머피 할로웨이-기디 팟츠로 이어지는 외국선수 라인업은 듬직했고, 국내선수 라인업은 한층 더 두터워졌다. 박찬희부터 강상재, 차바위, 정효근, 김낙현 등 젊은 국내선수들은 마치 서바이벌 경쟁이라도 하듯 골고루 좋은 활약을 펼쳤다. 삼산체육관의 수훈선수 인터뷰실은 들어오는 선수가 날마다 바뀌었다.

고비도 있었다. 3승 1패로 순항 중이던 개막 첫 주, 장신 외인 할로웨이가 발등 부상을 당한 것. 전자랜드는 할로웨이의 대체선수로 윌리엄 다니엘스를 긴급 호출했지만, 급하게 투입된 다니엘스는 할로웨이의 공수 존재감을 대체할 수 없었다. 

전자랜드는 할로웨이 부상 후 9경기에서 3승 6패로 가라앉았다. 11월, 할로웨이가 복귀하면서 전자랜드는 다시 연승 가도를 달리며 상승 곡선을 그렸으나 12월, 할로웨이의 발등이 다시 말썽을 부렸다. 전자랜드와 할로웨이는 결국 눈물의 면담 끝에 이별을 결정했다. 

할로웨이가 떠난 전자랜드의 선택은 ‘악동’ 찰스 로드였다. 기량만큼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워낙 다루기 힘든 개성 탓에 올 시즌 KBL에 부름을 받지 못했던 베테랑 센터 찰스 로드. 그러나 유도훈 감독은 로드가 흥분할 때마다 “Look at me(나를 봐)!"라고 외치며 눈을 마주치고 다가갔다. 유 감독 아래서 개과천선한 로드는 결국 전자랜드를 정규리그 2위 자리에 올려놓았다. ‘서-태-힐’ 시대 이후 8년 만에 4강 플레이오프 직행이라는 경사를 맞이한 것이다.

4강에서도 전자랜드의 상승세는 계속됐다. 만만치 않은 매치업 상대인 LG를 1차전 86-72로 잡아냈다. 전반까지 35-35로 팽팽했던 경기, 팟츠가 3쿼터에만 무려 20득점을 올리는 활약으로 역전승을 이끌며 삼산에 봄이 왔음을 알렸다. 기세가 오른 전자랜드는 남은 두 경기를 연달아 잡았다. 시리즈 스코어 3승 0패 스윕승. 전자랜드가 창단 22년 만에 첫 챔프전 진출이라는 숙원을 이뤄낸 순간이었다.

그렇게 맞이한 전자랜드의 역사적인 챔프전. 상대는 리그 역사상 최다 우승을 자랑하는 관록의 현대모비스였다. 1997년 KBL 출범 이후 무려 10번이나 챔프전에 진출한 경험이 있는 ‘최다’ 진출팀과 창단 후 ‘최초’로 챔프전에 오른 새내기의 맞대결. 

1차전에서는 3점 차로 석패한 뒤, 2차전 89-70으로 대승을 거두며 돌풍을 일으킨 전자랜드는 아쉽게도 뒷심을 발휘하지 못했다. 한 시즌 내내 함께했던 팟츠의 어깨 염좌 부상 낙마가 결정적이었다. 공백을 메우기 위해 터키리그에서 뛰던 투 할로웨이를 이틀 만에 데려왔지만, 역부족이었다. 8,500여명의 관중이 가득 들어찬 홈 두 경기에서 고개를 숙인 전자랜드는 울산에서 열린 5차전에서도 끝내 승전고를 울리지 못했다. 그렇게 전자랜드의 위대한 도전은 아쉬움 속에 마무리됐다.

유도훈 감독은 챔프전을 치르며 이런 말을 남겼다. "선수들이 경기에 나오고, 이기면서 ‘맛’을 느껴야 한다. 경기든 일이든 한 번 맛을 봐야 또 그 맛을 보기 위해 동기부여가 되기 때문"이라며 경험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전자랜드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만, 유 감독의 말대로 코끼리 군단은 올 시즌 창단 후 첫 챔프전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뤄내며 ‘맛’을 알았다. 전자랜드의 주축 선수들은 대부분 20대 중반으로 이제 막 전성기를 열기 시작한 선수들.

그러니 ‘패자’ 전자랜드는 고개를 숙일 필요 없다. 2006-07시즌부터 2018-19시즌까지 12년간 7개의 트로피를 들어올린 ‘왕조’ 현대모비스의 양동근과 유재학 감독의 첫 챔프전 성적은 0승 4패였다. 오늘의 쓰디쓴 눈물 ‘맛’을 잊지 않고 기억한다면, 전자랜드의 전설은 이제부터 시작일지도 모른다.

사진 = KBL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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