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터뷰에세이 ‘단편’(斷片/短篇)
| 또 다른 길을 걷는 그대에게... 김연주

“그런데 저 시즌 마치고 은퇴할 수도 있어요. 아. 이거 오프 더 레코드에요.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했어요.”

2016-17시즌이 한창 진행되던 중 그가 던진 말이다. 데뷔 후 가장 좋은 성적을 기록하던 그가 은퇴를 말했다. 당황스러웠지만 일방적 ‘오프 더 레코드’에 말을 더 잇지는 않았다.

어쨌든 그는 은퇴하지 않았다. 당연하다. 2005년 프로에 입단한 이래로 그는 그 해 커리어 하이의 기록을 세웠다. 정규리그 전 경기를 출전해 평균 28분 32초를 뛰었다. 데뷔 후 가장 많은 시간을 소화했고, 평균 7.4득점으로 이 역시 최고 기록이었다. 리바운드와 어시스트로 데뷔 후 최고 기록이었다. 그래놓고 화려하게(?) 은퇴할 수는 없는 일. 그는 당연히 시즌을 준비했다. 그리고 그렇게 한 시즌을 더 뛴 후 이번에는 진짜 은퇴를 선택했다. 선일여고를 졸업하고 2005 WKBL 신입선수선발회에서 1라운드 전체 2순위로 신한은행에 입단한 후 13년 동안 한 팀에만 몸 담았던 김연주의 이야기다.

#1
구김살 없이 항상 밝게 웃던 선수. WKBL의 선수들이 대부분 카메라 앞에서 어색함을 감추지 못하는 게 일반적인 반면 그는 당당하게 사석에서도 카메라를 향해 웃으며 브이(V)자를 그리곤 했다. “피하고 숨어도 어차피 사진은 찍혀서 나올 거”라며, “차라리 당당하게 찍히고 예쁘게 올려달라고 말하겠다”고 했다. 오랫동안 ‘미녀슈터’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고, 실력보다 외모에 대한 이야기가 많아 힘든 시기를 겪은 후에는 “어쨌든 예쁘게 봐주시고 장점으로 이야기 해주시는 거니 감사히 여기고 열심히 하겠다”는 성숙한 태도를 보이기도 했다.

주전으로 뛴 시간이 길지 않아 기록 자체로 많은 걸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신한은행이 통합 6연패를 달리던 시절, 상대 추격에 쐐기를 박는 한 방, 끌려가던 경기의 흐름을 바꾸는 한 방은 종종 그의 손에서 터져 나왔다. 3점 슈터 중에서도 슛 거리가 길었기에 소속팀에서 베스트5에 좀처럼 이름을 올리지 못했음에도 그 장점을 살려 국가대표에도 선발됐었다. 

하지만 선수생활 마지막은 더욱 파란만장했다. 뜻밖의 큰 부상을 당했고, 생각보다 빠르게 복귀했다. 완벽한 복귀가 가능하겠냐는 의문이 들었지만 처음으로 주전 자리를 꿰차며 커리어 하이의 시즌을 만들었다. 그 다음 시즌도 주전 멤버로 활약했고, 다시 FA자격을 얻었다. 그러나 은퇴를 선택했다. 돌아보자면 결국 몇 년 전 당한 부상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저한테는 정말 선물 같은 시간이었어요. 큰 부상을 이렇게 말하는 게 좀 그렇긴 한데 차라리 그래서 몇 년을 더 뛸 수 있었던 건 아닐까하고 생각을 할 때도 있어요.” 

2015년 12월. 연습 도중 왼쪽 아킬레스건이 파열되는 큰 부상을 당했다. 수술대에 올랐고, 시즌을 통째로 날렸다. 모든 부상이 선수들에게 큰 손실을 안기지만, 아킬레스건 부상은 십자인대 부상 등과 함께 선수에게 가장 치명적인 부상이기도 하다. 시즌 아웃을 선고 받은 선수들은 수술과 함께 긴 시간의 재활을 거쳐야 한다. 한 관계자는 “아킬레스건 수술을 받으면 선수의 운동 능력은 결코 이전만큼 회복되지 않는다”고 말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그 부상을 ‘선물’이라고 말했다.

“몇 년 째 고질적으로 아킬레스건이 안 좋았잖아요? 아킬레스건을 아파 본 사람들만 아는 통증이 있어요. 운동을 마치고 나서 갑자기 그 통증이 서서히 오기 시작하면 소름이 끼쳐요. 정말 아파서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그렇다고 칼을 댈 수는 없어서 치료하고 견디면서 뛰었는데 파열이 되면서 수술을 안 할 수 없게 된 거죠. 그런데 분명히 ‘완파됐다’고 진단이 나왔는데 사진 상에는 아킬레스건이 희미하게 연결이 되어 있는 거예요. 보통 아킬레스건은 파열되면 말려서 올라가잖아요. 그래서 ‘완전히 파열된 건 아닌가’ 싶기도 했는데... 수술을 하려고 열고 보니까, 염증이 심하게 생겨서 파열된 아킬레스건이 염증에 붙어서 말려 올라가지 않은 거였더라고요.” 

수술을 하면서 염증도 제거했고 오랫동안 달고 있던 부상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었던 그는 이 후로 2년을 더 활약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2
줄곧 식스맨의 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던 그가 팀의 주전으로 활약한 것은 마지막 두 시즌. 하지만 그는 지난 시즌 정규리그 35경기 중 단 한 경기를 제외하고 모든 경기에 선발로 나섰음에도 불구하고 시상식에서 뜬금없이 식스우먼 상을 수상했다. WKBL의 식스맨 규정이 출전시간을 기준으로 하면서 생긴 결과다. 

“그 상을 4번 받았어요! 내가 최다 수상일걸요? 주전이었는데 식스우먼 상을 받았다고 자존심이 상하지는 않아요. 시상식 단상에 한 번도 못 올라가보는 선수들도 있는 데 그런 말을 하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요. 얼마나 영광이고 감사한데요. 비록 기대에는 못 미쳤지만, 팀이 플레이오프에 올라가는 데 식스맨 정도의 활약은 해줬다는 평가를 받았다고 생각하면 더 감사하죠. 기분 나쁜 상은 없다고 생각해요.”

그러나 “작년에 잘못 받은 상은 조금 그랬다”고 덧붙였다. 그는 2016-17시즌을 마친 후 시상식에서 해프닝을 겪었다. 3점슛상의 수상자가 우리은행의 박혜진이었는데, 시상식에서는 난데없이 김연주의 이름이 호명된 것. 진행상의 실수였다. 자신이 수상자가 아닌 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남의 상을 수상해야 했었다. 그러나 그의 기분이 작년과 올해, 사뭇 달랐던 것은 그 외의 이유도 있었다.

“나이를 한 살 한 살 먹다 보니까 시상식 때 입을 옷 고르는 것도 일이에요. 작년에는 내가 단상에 올라갈 일이 없다는 걸 알고 대충 입고 갔는데 갑자기 상을 받게 되니까 두 배로 당황 했죠. 그런데 올해는 별로 신경은 안 썼지만 뭔가 괜찮았거든요. 원래 시상식 때 제가 입은 옷이 (곽)주영 언니 옷이에요. 언니가 홈쇼핑에서 샀는데 생각보다 사이즈가 조금 작아서 (윤)미지를 줬고, 미지한테는 또 조금 컸던 거죠. 그래서 제가 입었는데 뜻밖에 제 옷처럼 잘 맞는 거예요. 그래서 그날은 기분이 좋았거든요. 하하”

시상식에서 항상 받고 싶었던 상은 3점 슈터답게 3점슛 상. 그리고 자유투 상이었다. 슈터로 뛰면서도 자유투 성공률이 그렇게 높지 않아 오히려 꼭 한 번은 받아보고 싶었다. 그러나 퓨처스리그에서 한 번 받아봤을 뿐 1군 무대에서는 한 번도 수상을 하지 못했다. 

“일단 요건이 안 돼요. 경기 중에 자유투를 던질 일이 없더라고요. 하하하. 쏠 일이 없었어요. 한 시즌에 10번도 못 던진 적도 있을걸요.”

식스우먼 상을 수상했지만 신한은행의 주전 멤버였던 김연주. 실제로 팀의 식스맨은 후배인 김아름과 유승희의 몫이었다. 그가 식스우먼상을 수상하자 후배 김단비는 “후배들 상을 뺏어갔다”며 핀잔을 주기도 했다. 그래서, 그는 후배들에게 미안했을까?

“음... 아니요! 안 미안해요! 저는 그 보다 더 큰 걸 주고 가잖아요. (김)아름아, (유)승희야! 언니 은퇴하잖아! 이렇게 적절한 시기에 빠져주는 언니가 어디 있니? 안 그래?”

#3
그를 만난 곳은 뜻밖의 장소였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의 위치한 한국외국어대학교 앞. 은퇴한지 얼마 안 된 지금, 그는 이곳에서 수업을 듣고 있었다. 동료 선수들이 휴가를 마치고 팀으로 복귀해 다음 시즌을 위한 훈련을 시작한 시점. 2005년 이후 처음으로 농구 없는 여름을 보내고 있는 그의 표정은 밝았다. 은퇴에 대한 아쉬움과 회한, 어쩌면 미련이라도 꺼내볼까 했지만 캠퍼스에 뒤늦게(?) 등장한 그녀는 티 없이 밝은 표정이었다. 은퇴를 조금도 후회하지 않았다. ‘올바른 결정’이라고 했다. 은퇴하면 마음이 복잡할 줄 알았는데, 특별히 힘든 시간을 보내지는 않았단다. 

“아쉬움은 별로 없어요. 선택을 잘했다고 생각하고 지금도 후회는 없어요. 굳이 아쉽다면 마지막 플레이오프를 조금 더 잘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거죠. 원 없이, 내가 가진 것 이상으로 했고, 정말 많은 걸 배우고, 또 얻은 상태로 은퇴했어요.”

프로 데뷔 시절의 목표는 10년을 선수로 뛰는 것. 조금 더 노력해도 12년까지라고 생각했다는 그는, 그랬기에 12년의 선수생활을 마쳤던 지난해에 은퇴를 심각하게 고민했다. 목표했던 시간의 맥시멈을 다했기 때문. 그랬기에 2017-18시즌은 연장전과 같았다. 여분의 시간이었던 이 한 시즌, 내가 팀에 꼭 필요하다는 증명이 있다면 앞으로의 시간을 이어가겠지만 그게 아니라면 내려놓을 때라고 생각했다.

“코트에서 나 스스로 ‘이 이상을 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느끼면서 뛰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에요. 그리고 그런 상황에서 제가 매달리면 저는 물론이고 구단이나 다른 선수들도 다 힘들어져요.”

FA자격을 획득했지만, 구단에 이적할 생각은 없다는 뜻을 전했다. 잔류 아니면 은퇴였다. 하지만 운동을 다시 시작할 자신도 없었고, 꼭 해야 한다는 절실함도 예전과 같지 않았다. 그는 ‘구단 역시 자신이 꼭 잡아야 할 선수는 아니었을 것’이라고 한다. 마지막 협상 테이블에서 구단 측의 제시액도 듣지 않았다. 기분 좋은 이별을 위한 스스로의 방법이었다.

“그래도 내가 할 수 있는 몫은 했다고 생각해요. 이제는 그 역할을 못한다는 판단이 들더라고요. 팀에서 선배의 역할은 정말 중요하거든요. 저는 어린 시절부터 팀에서 정말 좋은 선배들과 함께 뛰면서 많은 걸 배웠어요. 어린 선수들은 선배들과 부딪치면서 성장을 하는데, 선배가 뭐라도 가진 게 있어야 후배들한테 그런 역할이 되거든요. 언제부턴가 저는 그냥 내 것만 하기도 버거웠어요. 후배들에게 그런 언니가 될 자신이 없었어요. 선배로서의 위치와 입지도 지키지 못하면서 부담만 되고 싶지는 않았어요.”

#4
단 한 번의 이적 없이 프로 생활 전체를 신한은행 한 팀에서 뛰었다. 그래서 팀에 대한 애정이 깊다. 상처받은 일, 서운했던 일이 없을 수는 없지만 13년을 한 팀에서 뛰다보니 미운 정도 사랑으로 남는다. 그는 자신이 신한은행의 선수로 뛰었던 것이 행운이라고 한다.

“전 농구를 잘한 선수가 아니잖아요. 그러다보니 어려서부터 농구 잘하는 사람을 좋아했어요. 프로에 와서 그런 언니들을 많이 만났고, 또 그런 언니들과 한 팀에서 뛰었어요. 어쩌면 그 언니들과 한 팀이라 제가 더 많이 못 뛰었는지는 모르지만, 각 포지션에 다양한 스타일로 그렇게 농구 잘하는 선수들이 많은 팀에서 함께 했다는 게, 제 농구 인생의 가장 큰 행운이었어요. 6번의 우승도 좋지만, 그런 선수들과 같이 뛰었다는 게 더 좋아요.”

모두가 기억하는 ‘레알 신한은행’의 주역들을 짚어 냈다. 전주원, 정선민, 진미정, 하은주, 신정자 등의 이름이 나왔다. 그리고...

“(최)윤아 언니랑은 성격이나 모든 게 많이 달랐어요. 같이 어울리는 시간도 많지 않았던 것 같고, 여전히 어려운 언니에요. 그런데 전 고등학교 때부터 윤아 언니 팬이었어요. 언니의 허슬 플레이가 너무 멋있었거든요. 그런 언니랑 한 팀에서 뛰었으니 정말 복 받은 거죠. 정말 코트에서 언니와 함께 뛰었던 거의 모든 순간이 좋았어요. 언니가 현역 마지막으로 뛰었던 경기에 언니의 마지막 패스를 받아서 제가 버저비터를 넣었거든요. 저한테 패스를 줄 거라고 생각했고, 정말 줬고, 그걸 제가 넣었어요. 나한테 공이 올 거라고 생각했을 때 딱 맞아 들어가는 기분은 정말 최고에요. 윤아 언니랑 뛰면서 그런 경험을 정말 많이했어요. 언니랑 뛸 때는 이런 것 하나 하나까지가 정말 좋았어요. 언니의 마지막 패스를 내가 받아서, 그리고 그걸 내가 넣어서 지금도 정말 좋아요.”

“아! (강)영숙 언니도 빼 놓으면 안돼요! 언니가 이거 보면 서운하겠다. 하하하. 빈말이 아니고 우리 팀은, 그리고 특히 저는 언니 때문에 득점을 많이 할 수 있었어요. 팀의 궂은일은 언니가 거의 도맡아했거든요. 제가 넣은 3점슛의 절반, 아니 3분의 2는 언니가 스크린을 걸어줘서 넣을 수 있었던 거예요. 우리가 선수 생활을 하는 동안 모두가 다 항상 사이가 좋고 화기애애했던 건 아니지만, 코트에서는 정말 하나가 되고 열심히 했던 것 같아요. 그리고 그런 대단한 선수들을 언니라고 부르면서 한 팀에서 뛸 수 있어서 정말 행복했어요.”

소속팀에 애정을 갖는 것은 함께했던 선수들 때문만은 아니다. 팀에 대한 믿음도 있다. 그는 “내가 팀에 남겠다고 했으면 이번에도 구단이 거절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내가 아는 신한은행은 선수들에게 항상 기본 이상의 것들을 최소한 지켜주는 팀이며, 팀을 위해 헌신한 선수들을 결코 초라하게 만들지 않는다. 선수를 위해주고 아낌없이 지원하며 지켜준다는 믿음을 주는 팀”이라고 강조했다. 그래서 비록 이제는 신한은행의 선수가 아니지만, 여전히 다음 시즌에도 신한은행이 좋은 성적을 거두기를 바라고 있다.

“솔직히 우승했으면 좋겠어요. 외국인 선수가 (쉐)키나 (스트릭렌)로 바뀌었더라고요. 우리 팀에서 좋은 기억을 안고 있는 선수니까 잘했으면 좋겠어요. 사실 안타깝죠. 포지션상으로는 어려움이 보이잖아요. 원래대로 (나탈리) 어천와가 왔으면 더 좋았겠죠. (곽)주영 언니 부담은 더 커질 거고, (이)경은이가 와서 잘 될 거라고 생각했는데 키나까지 오면 (김)단비랑 셋이 맞춰야 할 부분이 더 많을 거 같아요. 솔직히 전력 자체만 놓고 말하면 신한보다 더 나은 팀들이 있잖아요. 하지만 전력만으로 성적을 내는 건 아니니까 잘해서 좋은 결과 내고, 기왕이면 꼭 우승까지 했으면 좋겠어요.”
 
#5
은퇴 후 마냥 쉴 것만 같았다는 그가 요즘 가장 많이 하고 있는 일은 영어 공부다. 그는 은퇴 후 국민체육진흥공단의 글로벌 인재 양성 프로그램인 국내 연수 프로그램을 수강하고 있다. 목표는 최상급인 해외 연수까지 가는 것. 본지 칼럼니스트인 김은혜 KBSN 해설위원이 밟았던 코스다. 

“면접을 봤는데 영어가 많이 부족해서 해외 연수는 못 가게 됐어요. 제가 얼마나 부족한지를 뼈저리게 깨달았죠. 준비 열심히 해서 내년에는 꼭 가고 싶은데, 막상 해보니까 영어가 정말 어렵네요. 매일 매일 좌절하고 있어요. 하면 할수록 제 모자람도 느끼고 세상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닫는 중이예요. 영어 공부 하나만으로도 이렇게 많은 걸 느끼네요.”

선수 생활을 하며 사이버대학을 수강했다. 체육학과 상담심리학을 복수 전공했다. WKBL 선수들은 대부분 고등학교를 마치고 바로 프로에 들어온다. 그러다보니 프로 생활을 하며 대학 수업을 병행하는 선수들도 종종 볼 수 있다. 특히 신한은행에 이런 선수들이 많다.

“아무래도 (하)은주 언니 영향이 큰 것 같아요. 은주 언니가 운동선수도 공부해야 한다는 말을 많이 해줬어요. 생각만 하고 실행에 옮기지 못하던 것들을 은주 언니 덕분에 직접 할 수 있게 된 거죠. 정말 도움이 많이 됐어요. ‘선수들도 공부를 해야 한다’는 말은 정말 맞는 얘기인 거 같아요. 지금 (김)단비랑 (김)규희도 사이버대 수강하고 있어요.”

현재 수강중인 프로그램은 체육 행정가 양성이 목표다. 당초 대학원을 가고 싶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기에 지금은 이를 통해 해외에서 일해보고 싶다는 꿈을 더욱 키워가고 있다. 아직 구체화 된 것은 없다. 스포츠 심리학을 공부할지, 아니면 심리학 자체에 더 집중할지 결정을 못했다. 스포츠 심리 치료를 최종 목표로 하고 있는데, 최근 미국에서 태동한 긍정 심리학에도 관심이 있다. 이 공부를 꼭 하고 싶은데 그 첫 걸음인 영어에 발목을 잡혀서 머리가 복잡하다.

“‘체육 행정가’라는 게 매력이 있는 것 같아요. 지금 우리나라 체육계에는 구조적으로 개선이 필요하고, 또 그렇게 될 수 있는 골격이 있다고 생각하거든요. 영어 외에 스포츠 전공 수업이 있어서 몇 번 들었는데, 그것만으로도 시야가 어느 정도 넓어진 느낌이에요. 해외에서 잘되고 있는 모델을 공부하고 시야를 넓혀서 더 다양성을 가져갈 필요가 있지 않을까요? 더 공부해서 다양한 시각에서 우리나라 스포츠 구조를 보게 되면 많은 개선점과 발전을 도모할 수 있을 것 같고 저한테도 기회가 되지 않을까 생각해요.”

#6
그러면서 그가 바라본 곳은 일본이다. 가깝고도 먼 나라, 그리고 항상 비교가 되는 곳. 그러나 그는 여행으로도 일본은 가고 싶지 않다고 고개를 저었다.

“사실 은퇴하고 가장 좋은 게 뭐냐고 물으면 일본 안 가는 거예요. 신입생 때부터 매년 일본을 갔죠. 그런데 최근 5년은 너무 힘들었어요. 몸도 힘들고 농구 자체도 안 돼서 마음고생도 많았지만 자존심이 상하는 게 정말 힘들었어요. 작년인가? WKBL 팀들이 일본 전지훈련을 가서 딱 1경기 이기고 50경기 정도를 졌잖아요. 훈련도 힘들었지만 치고 올라오는 일본을 보면서 너무 화가 나더라고요.”

그는 역전의 세대 한 가운데에 있었다. 그래도 그가 청소년대표로 뛰던 시절, 국가대표로 뛰던 때 까지는 한국 여자농구가 일본보다 한 발 앞서 있었다. 그러나 그의 바로 다음 세대부터 역전이 됐고 차이는 점점 벌어졌다. 프로 선수로 생활하면서 그는 앞서 있던 자리를 내주고 뒤처지는 상황을 모두 경험했다.

“정말 전주원-정선민 앞에서는 공도 못 튀기던 일본이었거든요. 그런데 이제는 걔들이 우리를 보는 시선 자체가 달라졌다는 걸 느껴요. 선배들만큼 하지 못한 저희 잘못이 제일 크겠죠. 반성해야 할 부분이니 이렇게 말하는 게 좀 그럴 수도 있지만, 선수들의 문제가 다는 아닌 것 같아요.”

어려서부터 봤던 일본의 모습을 기억했다. 일본에서 농구를 했던 팀 선배 하은주는 “일본은 학창시절 부카츠 활동으로 농구를 할 때 힘든 스텝 훈련을 하면서도 다들 신나서 한다. 기본기 자체가 다르다”고 말했다. 초등학교 시절 그의 모교와 자매결연을 맺었던 일본 학교 농구부는 무려 40명의 선수를 대동하고 한국을 방문했다. 저변과 규모가 전혀 달랐다. 시스템 역시 마찬가지. 청소년 대표로 아프리카 튀니지를 갔을 당시 일본은 청소년 대표에도 전력분석원이 따라왔다. 지금도 유니버시아드대표팀에 트레이너를 지원 못하겠다고 하고, 성적이 안 나면 대학선발은 국제대회를 안 보내겠다는 우리나라보다 이미 15년 전의 일본이 훨씬 앞서 있었다.

“지금 학교에 가면 우리나라는 한 팀에 5명을 채우기도 빠듯하잖아요. 선수가 경기만 뛰어주는 거에 감사한 상황이다 보니 제대로 된 경쟁이 없어요. 프로에 와도 당연히 기본기가 떨어지고 실력이 떨어질 수밖에 없죠. 선배들을 뛰어 넘기도 힘들고... 경쟁을 해본 적이 없는 아이들이에요. 농구를 하면 당연히 게임은 뛰는 거였으니까요. 그러니까 프로에서 처음 벽을 경험해보고 빨리 지치고 쉽게 좌절하게 되죠. 이건 아이들만의 문제는 아니잖아요. 선의의 경쟁을 통해 발전하는 구조가 무너졌다는 게 안타까워요.”

어쩌면 그가 제2의 인생으로 지금의 진로를 잡은 것은 이러한 현장을 지켜봤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7
인생 전체를 통틀어 가장 분주해야할 시점이면서, 반대로 가장 큰 휴식을 주는 시기에 즈음 해 지금은 작은 일의 소중함도 배워가고 있다. 13년 만에 가족과 함께 시간을 보내며 비워뒀던 자리를 찾은 느낌이다. 

“단비나 주영언니가 뭘 좋아 하는지는 아는데 정작 내가 좋아하는 게 뭔지는 잘 모르겠고 부모님이 좋아하는 것도 뭐였는지가 가물가물하더라고요. 뭔가 가족으로부터 조금씩 멀어진 느낌이 들었어요.”

요즘은 하루하루 그 공백을 채워가고 있다. 은퇴하면 여행도 다니며 밖으로 돌 생각도 했지만 뜻밖의 ‘집순이’가 됐다. 영화보다 드라마가 좋으니 집에 앉아 엄마와의 시간을 함께하고 있다. 매번 200g씩 시키던 커피도 이번에는 1kg을 주문했다. 그에게 지금의 시간은 존재만으로도 너무 소중하고 행복하다.

한 명의 선수가 팀에 주는 존재감과 가치는 모두 다르다. 안에서의 느낌과 밖에서의 시선도 다를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한 팀에서 10년 이상 꾸준히 자리를 지켰던 선수의 자리는 분명 의미가 있는 흔적이다. 농구를 시작했던 초등학교 시절 이후 처음으로 공 외의 다른 것을 손에 잡았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를 입에 붙이고, 시선을 코트 밖으로 돌렸다. 모든 게 처음이다. 기대가 큰 만큼 두려움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한 걸음씩 나가고 있는 지금의 시간이 소중하다. 그리고 이렇게 내딛는 걸음이 이어져 새로운 결과를 만들어 낼 것이다.

시스템과 인프라의 문제는 농구 뿐 아니라 한국의 모든 스포츠 종목에 해당하는 고질적 문제다. 오죽하면 일본에서 스포츠를 두고 말할 때 “일본은 천재를 만드는 나라, 한국은 천재가 태어나는 나라”라고 했을까? 하지만 스포츠 행정은 직접적인 현장의 부딪힘보다 경쟁력이 떨어진다는 평가가 이어진다. 예전만 해도 선수는 선수와 지도자에서 그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이제는 ‘선수 출신’이라는 이름표를 달고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는 이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다. 짜릿한 3점슛 이후 활짝 웃던 그의 미소를 인생 2라운드에서도 계속 마주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해당 기사는 <루키 더 바스켓> 2018년 8월호에 게재된 기사를 추가/각색했습니다.

사진 = 박진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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