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키=이민재 기자] 유타 재즈는 최근 몇 년간 경쟁력이 떨어지는 팀이었다. 그러나 고든 헤이워드라는 에이스의 존재로 매년 성적을 끌어올렸다. 그 결과 2012년 이후 5년 만에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진출이란 업적까지 쌓았다. 이를 이끈 ‘재즈 연주자’ 고든 헤이워드를 만나보자.

테니스와 농구
고든 헤이워드는 어렸을 때 키가 작았다. 8학년 때는 175cm에 불과했다. 현재 203cm인걸 감안하면 작은 편이었다. 그는 체중도 많이 나가지 않았다. 그의 학창시절 별명은 막대기소년(Stick Boy)이었다. 그럼에도 헤이워드는 농구를 계속하고 싶었다.

이를 위해 기술 향상에 힘을 썼다. 신체적인 열세를 이겨내기 위해서 다양한 기술이 필요했다. 포인트가드로서 팀을 이끌어야 하는 여러 능력도 중요했다. 헤이워드의 아버지는 아들의 실력 향상을 위해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특히 볼 핸들링과 외곽슛 등 다양한 기술을 가르쳤다.

헤이워드는 “아버지는 고등학교 때까지 나의 농구 선생님이었다. 매일 아침 나와 함께 코트로 나가 훈련을 했다. ‘스티브 알포드 훈련’까지 매번 연습했다”고 당시를 회상한다(인디애나 대학 출신의 스티브 알포드는 최고의 슈터 중 한 명이었다. 그가 연습한 자유투 훈련을 ‘스티브 알포드 훈련’이라고 부른다. 아버지는 헤이워드가 정확한 슈팅 능력을 갖추길 바라며 이 훈련을 가르쳤다고 한다).

그럼에도 헤이워드의 판단은 확실치 않았다. 키가 크지 않았기 때문이다. 헤이워드는 고등학교 시절 테니스와 농구의 기로에 섰다. 키가 작아 농구를 그만두고 테니스로 전향해 장학금을 받고 대학에 입학하고 싶었다. 실제로 헤이워드는 당시 “188cm까지만 크길 바란다고 기도했다. 의사 선생님도 그 정도까지 클 수 있을 거라고 말했다”라고 말했다.

이때 어머니가 조언을 건넸다. “어머니는 나에게 농구를 계속하라고 했다. 농구는 너의 첫사랑이고 테니스보다 더 농구를 사랑한다고 했다.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더욱 농구에 집중할 수 있었다.” 헤이워드의 말이다.

부모님과 헤이워드의 노력이 큰 덕분이었을까. 헤이워드의 키가 갑자기 크기 시작했다. 8학년 때 175cm였던 키가 2년 뒤 193cm가 되었다. 대학팀이 헤이워드를 스카우팅할 무렵에는 198cm로 컸고, NBA 스카우터가 그의 키를 측정했을 때는 203cm가 됐다.

워낙 탄탄한 기본기와 점점 자라는 신장 덕분에 헤이워드의 기량이 만개하기 시작했다. 지역 내에서 이름이 퍼졌다. 그를 데려오고 싶어 하는 대학팀들도 많아졌다. 이때 한 인물을 만난다. 바로 버틀러 대학의 브래드 스티븐스(現 보스턴 셀틱스) 감독이었다. 

스티븐스 감독은 헤이워드를 간절히 원했다. 여러 번 만나 헤이워드와 이야기를 나누며 ‘NBA 입성의 꿈을 이뤄주겠다’며 러브콜을 보냈다. “헤이워드는 자신이 농구를 잘한다는 걸 안다. 그런데 얼마나 잘하는지는 모른다. 이를 알려주고 싶었다.” 스티븐스 감독의 말이다.

헤이워드의 부모님은 모두 퍼듀대학 출신이다. 인디애나에 살았던 헤이워드의 집과 퍼듀대학은 그리 멀지 않았다. 부모님을 따라 퍼듀대학에 진출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헤이워드는 퍼듀 대신 버틀러를 선택했다. 장학금을 준다는 제의도 거절했다. 버틀러 대학에서 더욱 농구에 집중하기 위한 선택이었다.

이는 실현되었다. 대학 입성 이후 19세 이하 대표팀에 뽑혀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대학 내에서 점점 입지를 쌓기 시작한 건 당연했다. 특히 농구로 각광받지 못한 버틀러 대학은 헤이워드와 스티븐스 감독의 합심으로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 2010년에는 버틀러 대학의 NCAA 토너먼트 준우승을 이끌기도 했다. 

다재다능한 실력과 클러치 상황에서 담대함 등을 보여준 헤이워드는 당연히 NBA 스카우터의 관심을 받았다. 그 결과 2010 신인 드래프트 전체 9순위로 유타 재즈에 입성할 수 있었다. 1953년 이후 버틀러 대학 출신으로서 1라운드에 뽑히는 영광을 누리게 됐다.

성장기
그의 데뷔 시즌은 어수선했다. 팀 자체 이슈가 많았다. 팀 내 에이스로 활약한 데런 윌리엄스(現 클리블랜드 캐벌리어스)가 트레이드됐다. 제리 슬로언 감독과 윌리엄스가 모두 떠난 유타는 힘을 내지 못했다. 서부 컨퍼런스 11위로 마감할 정도로 생산성이 좋지 못했다. 

대신 헤이워드의 기회는 점점 늘어났다. 평균 출전시간이 12.7분(1월), 18.7분(2월), 21.8분(3월), 35.9분(4월)으로 시간이 갈수록 치솟았다. 4월 7경기에서는 평균 16.4점 3.0리바운드 2.6어시스트 FG 58.1% 3P 57.1%로 유타의 미래가 될 준비를 마쳤다. 헤이워드는 루키 시즌을 보낸 뒤 “더 나은 볼 핸들링 능력을 보여주고 싶다. 루키 시즌에는 스팟업 슈터에 불과했다. 공을 더 많이 소유하고 싶다”며 의지를 밝혔다.

그의 바람은 두 번째 시즌에 이뤄졌다. 평균 출전시간이 30.5분으로 훌쩍 뛰며 점점 진가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NBA 데뷔 첫 플레이오프 진출도 경험했다. 그러나 그 경험은 쉽지 않았다. 1번 시드 샌안토니오 스퍼스의 벽이 너무 높았기 때문. 헤이워드는 4경기 평균 30.8분을 뛰며 7.3점 FG 18.2% 3P 8.3%에 그쳤다. 2년차 헤이워드에게는 힘들지만 값진 경험이었다.

2년 후,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팀 내 1옵션으로 올라설 기회였다. 유타 구단은 득점 에이스 알 제퍼슨(現 인디애나 페이서스), 폴 밀샙(現 애틀랜타 호크스)과 결별하고 헤이워드에게 에이스 자리를 맡겼다. 헤이워드는 “스웨그(swag)이 있어야 한다. 자신감을 느끼고 경기에 뛰면 된다. 코트 내에서 가장 뛰어난 선수라는 생각도 해야 한다. 도전이지만 기대가 된다”면서 1옵션 자리를 즐겼다. 중고등학교 때 포인트가드로 성장하며 쌓은 기술이 그에게 큰 힘이 되었다. 또한 버틀러 대학 시절 보여준 다재다능함과 책임감도 밑거름이 되었다. 해당 시즌 평균 16.2점으로 좋은 생산성을 드러냈다.

새크라멘토 킹스의 데이브 예거 감독은 “헤이워드는 정말 훌륭하다. 뭐든지 열심히 한다. 대부분 오픈 기회를 만든다. 수비에서 터프한 수비 범위도 일품이다. 정확한 플레이만 한다. 제자로 삼기 좋은 선수다”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헤이워드는 지난 2013-14시즌이 끝난 뒤 비제한적 FA가 됐다. 그가 팀에 남을지 아니면 떠날지 관심이 쏠렸다. 이때 샬럿 호네츠가 헤이워드에 4년간 6,300만 달러에 계약을 제시했다. 이에 유타는 계약을 매치시키면서 헤이워드를 지켰다. 당시 평가는 “헤이워드가 유타에 꼭 필요한 선수지만 계약 규모는 크다”였다.

계약 이후 헤이워드는 더욱 성장했다. 농구에만 집중하겠다는 목표까지 밝혔다. 헤이워드는 “나는 여자친구와 약혼까지 했다. 이제는 농구에만 집중해 더 나은 선수가 되도록 노력할 것이다. 더욱 성장할 여지가 남아있다”면서 힘을 쏟았다. 

헤이워드는 데뷔 이후 매년 평균 득점을 올리고 있다. 5.4점으로 루키 시즌을 시작한 그는 올 시즌 21.9점을 올렸다. 모든 노력을 쏟은 결과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경쟁심이 넘쳤다고 한다. 그의 친구인 블레이크 홀은 “헤이워드는 그가 하는 모든 걸 이기고 싶어 했다. 농구, 야구, 풋볼, 축구, 테니스, 비디오 게임, 카드 게임까지 모든 걸 말이다”라고 말했다. 어렸을 때부터 누구보다 이기길 원했던 헤이워드가 매년 지치지 않고 노력한 결과 꾸준히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계약 규모가 크다는 비판도 잠잠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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